"밤비노" 베이브 루스: 세상을 바꾼 전설의 일대기
단순한 야구 선수를 넘어서
베이브 루스는 단순히 위대한 야구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며, 미국 문화 지형 자체를 바꾼 아이콘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홈런과 동의어가 되었고, 그의 삶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아메리칸 드림'의 가장 극적인 청사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야구의 규칙뿐만 아니라, 팬들이 경기를 즐기는 방식과 선수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재정의한 최초의 스포츠 셀러브리티였습니다.
이 글은 그의 미천했던 시작부터 불멸의 전설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추적합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하여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는지,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복합적인 인간미가 어떻게 그를 대중의 영웅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의 유산이 오늘날까지 야구와 미국 사회에 어떻게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할 것입니다.
제1장: 전설의 시작 (1895–1914)
1.1. 불우했던 유년 시절
조지 허먼 "베이브" 루스는 볼티모어의 거리에서 험난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부모는 다루기 힘든 아들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결국 그가 7살이 되던 해에 가톨릭 계열의 기숙 학교인 세인트 메리 공업학교(St. Mary's Industrial School for Boys) 로 보냈습니다.
이곳은 사실상 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교화 시설이었으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루스의 인생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기의 깊은 박탈감은 훗날 그가 보여준 호탕한 사생활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분석이 있는 반면, 평생에 걸쳐 고아원과 아픈 아이들을 향해 보였던 진심 어린 애정과 관대함의 뿌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훗날 유명해진 뒤에도 세인트 메리를 잊지 않고 기부금을 보내고, 은사인 마티아스 수사에게 캐딜락을 선물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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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브 루스 3세 시절 사진 |
1.2. 야구와의 운명적 만남
루스의 인생을 바꾼 것은 세인트 메리 학교에서의 야구와의 만남이었습니다.
특히 마티아스 수사(Brother Matthias) 는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이끌어준 은인이었습니다.
일화에 따르면, 루스가 동료들의 서투른 투구를 비웃자 마티아스 수사는 그에게 직접 해보라고 권했고, 이것이 그가 투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루스는 야구에 놀라운 열정을 보였고, 학교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한 해에 약 200경기를 소화했다고 추정할 정도로 야구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투수로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지역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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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브 루스(맨 위 줄 왼쪽)가 1912년 메릴랜드주 세인트 메리 남자 산업학교에 있을 때의 모습 |
1.3. 프로의 문턱
1914년, 19세의 루스는 마이너리그 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하며 마침내 프로 선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프로 경력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구단주 잭 던(Jack Dunn)은 신생 리그와의 경쟁으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고, 결국 팀의 최고 유망주들을 메이저리그 팀에 팔아 자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루스는 볼티모어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곧바로 보스턴 레드삭스 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위대한 경력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2장: 보스턴의 희망, 두각을 나타낸 투수 (1914–1919)
2.1. 최고의 좌완 투수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은 베이브 루스는 빠르게 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구위는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으며, 레드삭스를 리그 최강팀으로 이끄는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투수로서 그가 이룬 주요 성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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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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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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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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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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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승 달성, 평균자책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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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최정상급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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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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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3회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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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핵심 선수임을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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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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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승, 평균자책점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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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음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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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시절의 루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29와 3분의 2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남긴 투수였고, 이 기록은 수십 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곧, ‘홈런으로 야구를 바꾼 사내’ 이전에 이미 그는 ‘가을 야구에서 숨도 못 쉬게 만드는 좌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루스의 변신은 “원래 못하던 사람이 타자 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최고였던 사람이, 또 다른 최고로 방향을 틀어버린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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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 소속으로 투구하는 베이브 루스 |
2.2. 방망이를 든 투수
루스가 활약하던 시기는 '데드볼 시대(dead-ball era)'로, 소위 '스몰볼(Small Ball)'이라 불리는, 즉 번트나 도루를 결합한 단타 위주의 작전으로 득점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던 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투수였던 루스가 때려내는 장타와 홈런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날에도 경기에 출전해 팀에 기여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타격 재능을 눈여겨본 구단은 마침내 그를 외야수로 기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야구 역사의 흐름을 바꿀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2.3. 홈런왕의 탄생
본격적으로 타자로 출전하기 시작한 1919년, 루스는 야구계를 경악시키는 대기록을 세웁니다.
그는 무려 29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당시 2위 선수의 홈런이 12개에 불과했으며, 루스 한 명이 기록한 29개의 홈런은 당시 메이저리그 팀 전체의 연간 평균 홈런(28개)보다 많은 수치였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록 경신을 넘어, 야구의 패러다임이 힘과 장타를 중시하는 '라이브볼 시대(live-ball era)' 로 전환되는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제3장: 양키스의 제왕, 시대를 지배하다 (1920–1934)
3.1. 밤비노의 저주
1920년 1월, 야구계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팀의 최고 스타인 베이브 루스를 라이벌 팀인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한 것입니다.
이 결정의 배후에는 레드삭스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Harry Frazee)의 재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제작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루스를 현금 12만 5천 달러와 30만 달러의 대출을 받는 조건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 트레이드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는 무려 86년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는 기나긴 암흑기에 빠졌습니다.
팬들과 언론은 이를 루스의 애칭을 따 '밤비노의 저주(Curse of the Bambino)' 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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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양키스 유니폼 입은 베이브 루스의 모습 |
3.2. 홈런, 야구를 바꾸다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루스는 야구의 개념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그의 54개 홈런은 단순히 새로운 기록이 아니라, 스포츠의 틀 자체를 뒤흔든 통계적 변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2위와의 격차: 홈런 2위 조지 시슬러는 19개를 기록했습니다.
루스는 가장 가까운 경쟁자보다 거의 세 배나 많은 홈런을 쳤습니다.
• 팀과의 비교: 아메리칸 리그에서 루스 한 명보다 더 많은 홈런을 친 팀은 단 한 팀뿐이었습니다.
• 팀을 넘어서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는 팀 전체가 50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루스 혼자보다 4개나 적은 수치였습니다.
그의 등장은 야구의 패러다임을 '단타와 작전' 중심의 스몰볼에서 '장타와 힘'을 앞세운 빅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팬들은 그의 홈런에 열광했고, 야구는 미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습니다.
3.3. '살인 타선'과 전성기
루스는 뉴욕에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또 다른 전설적인 타자 루 게릭(Lou Gehrig)과 함께한 1927년 양키스 타선은 '살인 타선(Murderers' Row)' 이라 불리며 리그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그해, 루스는 게릭과의 선의의 홈런 경쟁 속에서 자신의 기록을 다시 한번 경신하며 역사적인 60홈런을 달성했습니다.
이 기록은 34년간 깨지지 않는 대기록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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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의 1928년 순회 공연 사진 |
양키스 시절 주요 기록
• 홈런왕: 12회
• 타점왕: 6회
• 월드 시리즈 우승: 4회 (1923, 1927, 1928, 1932)
• 통산 기록: 타율 .342, 714홈런, 2214타점, OPS 1.164 (역대 1위)
3.4. 전설이 된 순간들
그의 경력은 신화적인 일화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예고 홈런 (Called Shot): 1932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 팬들의 야유 속에 타석에 들어선 루스가 센터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그 방향으로 홈런을 쳤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의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그의 신화적인 이미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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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고 홈런 |
• 조니 실베스터와의 약속: 아픈 소년 조니 실베스터를 위해 월드 시리즈에서 홈런 한 개를 치겠다고 약속하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무려 3개의 홈런을 터뜨려 약속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대중적 인기를 잘 보여줍니다.
제4장: 신화 뒤의 인간
4.1. 두 개의 얼굴
베이브 루스는 경기장 밖에서 매우 복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 호탕한 자유인: 그는 술, 파티, 그리고 수많은 여성 편력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때때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중들은 이를 그의 '인간적인' 매력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 아이들의 영웅: 반면에 그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자선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고아원이나 어린이 병원을 자주 방문하며 기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세인트 메리 학교에서 겪었던 자신의 유년기 결핍이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에 대한 깊고 평생에 걸친 공감으로 이어진 것으로, 화려한 공적 이미지 뒤에 가려진 그의 인간적인 핵심이었습니다.
4.2. 가족과 관계
그의 사적인 관계 역시 극적이었습니다.
• 두 번의 결혼: 첫 번째 부인 헬렌 우드포드(Helen Woodford)와의 관계는 그의 잦은 외도와 소홀함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반면, 두 번째 부인 클레어 호지슨(Claire Merritt Hodgson)은 그의 방탕한 생활에 안정을 가져다주며 남은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 루 게릭과의 우정: 동료였던 루 게릭과는 초기에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가족 간의 문제로 인해 수년간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게릭의 어머니가 루스의 아내 클레어가 의붓딸 도로시를 친딸만큼 예쁘게 입히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루게릭병)으로 은퇴하는 게릭의 은퇴식에서 루스는 그를 뜨겁게 포옹하며 극적으로 화해했고, 이 장면은 야구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한편, 동료였던 레프티 고메즈는 이들의 불화가 언론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크다고 주장하며, 두 사람의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우정은 변치 않았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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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옹하는 루스와 게릭 |
4.3. 최초의 스포츠 셀러브리티
베이브 루스는 라디오, 신문, 영화 등 1920년대 급성장하던 새로운 미디어와 완벽하게 결합하며 미국 최초의 '스포츠 셀러브리티' 가 되었습니다.
• 이미지 관리: 그는 에이전트 크리스티 월시(Christy Walsh) 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미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월시는 루스의 이름으로 신문 칼럼을 대필하고, 수많은 광고와 제품 보증(endorsements) 계약을 성사시켜 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 브랜드가 된 이름: 그의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베이비 루스(Baby Ruth)' 캔디바는 공식적으로는 1904년에 사망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딸 '루스 클리블랜드'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캔디바가 출시된 1921년은 루스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고, 대통령의 딸이 사망한 지 17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기에, 이는 로열티 지급을 피하려는 명백한 시도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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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by Ruth |
1925년, 루스는 갑자기 크게 아팠고 병원에 오래 누워 있었습니다.
그 사이 해외 매체에서 “루스가 죽었다”는 오보가 퍼지며, 미국 전체가 뒤집혔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지만, 이 소동은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이 이미 선수의 이름이 아니라, 나라가 흔들리는 ‘사건’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의 타격 성적만 소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건강, 소문, 사생활, 표정까지 ‘콘텐츠’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스포츠 스타가 겪는 모든 빛과 그림자가, 이미 그때 루스에게서 시작됐습니다.
제5장: 황혼과 마지막 이닝 (1935–1948)
5.1. 선수 생활의 끝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루스의 기량은 눈에 띄게 쇠퇴했습니다.
결국 그는 1934 시즌을 끝으로 양키스를 떠나,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짧은 선수 생활을 보낸 후 1935년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선수 생활 내내 그가 간절히 원했던 꿈은 감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단주들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생활 방식을 불신했고, 결국 그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말년에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커미셔너였던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와 구단주들이 루스가 야구의 인종 통합을 주장할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그를 막았다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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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13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영구 결번식 사진. (이 사진은 1949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
5.2. 암과의 싸움
1946년, 루스는 목에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검사 결과 비인두암(nasopharyngeal carcinoma)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명성 덕분에 당시로서는 최신이었던 실험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화학 요법(항암 치료)과 방사선 치료를 동시에 받은 최초의 환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비록 병을 이겨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지막 투병 과정은 암 치료법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5.3. 영원한 작별
1947년 4월 27일, 양키 스타디움에서는 '베이브 루스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암으로 인해 쇠약해진 그는 마이크 앞에 서서 특유의 거칠지만 진심 어린 목소리로 팬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남겼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들의 야구라는 경기는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예닐곱 살 어린아이일 때, 저 아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죠... 만약 정말 열심히 노력한다면, 오늘 여기 있는 이 선수들이 정상에 오른 것처럼, 여러분도 마침내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1948년 8월 16일, 그는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이 이틀간 양키 스타디움에 안치되었을 때, 수만 명의 팬들이 찾아와 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습니다.
이는 한 명의 운동선수를 넘어, 시대의 영웅을 떠나보내는 국가적인 애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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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 스타디움 원형 홀에 안치된 베이브 루스의 사진. 오른쪽에는 그의 아내 클레어와 딸 줄리아가 보인다 |
제6장: 불멸의 밤비노, 영원한 유산
6.1. 야구의 구원자
베이브 루스는 단순한 스타 플레이어를 넘어 '야구의 구원자'로 평가받습니다.
• 위기 극복: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독감 대유행, 그리고 1919년 월드 시리즈 승부조작 사건인 '블랙삭스 스캔들'로 인해 메이저리그는 신뢰를 잃고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전쟁과 질병, 부패에 지쳐있던 미국 대중은 새로운 영웅을 갈망했습니다.
바로 이때, 루스의 압도적인 홈런과 카리스마는 '장엄한 뜬공'이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며 팬들의 관심을 야구장으로 되돌렸고, 무너져가던 리그를 구원했습니다.
• 경제적 영향력: 그는 선수들의 연봉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고액 연봉자였습니다.
또한,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 덕분에 뉴욕 양키스는 새로운 구장을 지을 수 있었고, 사람들은 양키 스타디움을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 이라고 불렀습니다.
6.2. 문화적 아이콘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야구 패러다임의 전환
그는 '데드볼 시대'의 작전 야구를 끝내고, 현대 야구의 근간이 된 '홈런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의 등장은 야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적인 매력을 재정의했습니다.
2. 스포츠 영웅의 재정의
그는 뛰어난 운동 능력뿐만 아니라, 미디어와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통해 부와 명예를 쌓은 '셀러브리티 운동선수'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이후의 모든 스포츠 스타들은 그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갔습니다.
3.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교화 시설 출신의 불우한 소년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미국 최고의 영웅이 된 그의 인생 스토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는 '아메리칸 드림'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6.3.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의 전설은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 그의 등번호 3번은 뉴욕 양키스에서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 1936년, 그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첫 5인 중 한 명으로 헌액되었습니다.
• 2018년, 사후에 미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추서받으며 그의 영향력이 시대를 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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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기자마자 처음으로 입성 |
왜 우리는 여전히 베이브 루스를 기억하는가
우리가 베이브 루스를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남긴 숫자와 기록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홈런을 통해 '광란의 20년대'라 불렸던 한 시대의 낙관주의와 역동성을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스윙 하나하나는 낡은 관습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외침과도 같았습니다.
교화 시설 소년에서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거듭난 그의 여정은 단순한 스포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순수한 재능이 열정과 만났을 때 가능성의 경계를 어떻게 재정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훈이며, 이 메시지는 '광란의 20년대'만큼이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베이브 루스는 시간을 넘어, 단순한 야구 선수가 아닌 영원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베이브 루스(Babe Ruth)의 생애와 야구사적 맥락을, 공개 기록과 연구·언론 보도에서 확인되는 흐름을 뼈대로 삼아 구성했습니다.
다만 실제 자료에 남지 않는 대화·감정·현장 묘사, 장면 전환을 위한 서사적 연결은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숫자·연도·기록처럼 검증 가능한 정보는 사실에 가깝게 정리하되, ‘예고 홈런’처럼 증언이 엇갈리거나 해석이 나뉘는 대목은 필자의 해석이 들어 가 있습니다.
이 글은 연대기 자료집이 아니라 “한 시대를 바꾼 한 인간”의 선택과 대가를 따라가는 재구성 서사로 읽어주세요.
George Herman “Babe” Ruth rose from a hard childhood in Baltimore to become the symbol of modern baseball.
Sent at seven to St. Mary’s Industrial School, he found discipline and purpose through the game under Brother Matthias.
In 1914 he entered pro baseball with the Baltimore Orioles and was soon sold to the Boston Red Sox, where he quickly became an elite left-handed pitcher and a World Series hero.
Yet Ruth’s true revolution came with the bat.
In the dead-ball era he began hitting with unprecedented power, and in 1919 he shattered expectations with 29 home runs.
Sold to the New York Yankees in 1920, he turned crowds into believers and power hitting into the sport’s new language—54 homers in 1920, then 60 in 1927 as the heart of the famed “Murderers’ Row.”
His life mixed excess and generosity: parties and scandals alongside deep affection for children and charity.
Myths followed him, including the “called shot”.
Illness and decline ended his playing days, and after a long fight with cancer, he died in 1948.
Ruth’s legacy reshaped baseball’s style, business, and celebrity culture, leaving an icon bigger than the nu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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