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도시를 깨운 거대한 맥동: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 1호선 탄생 이야기
1970년대 서울, 희망과 혼돈의 심장
1970년대 대한민국 서울은 뜨거운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는 500만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도시는 폭발적으로 팽창했지만, 그 속을 채우는 교통 시스템은 성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도로는 매일같이 버스와 택시로 가득 차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고, 시민들은 지독한 교통 체증 속에서 귀한 시간을 길 위에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희망과 혼돈이 뒤섞인 ‘성장통’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도시의 막힌 혈관을 뚫어줄 새로운 대동맥에 대한 갈망이 커져 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땅속을 달리는 새로운 희망, ‘지하철’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 1호선은 어떻게 꿈에서 현실이 되어 서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을까요?
그 흥미진진한 탄생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1. 지하철, 꿈은 어떻게 현실이 되었나: 건설의 배경
1.1. 꽉 막힌 서울,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1970년대 초, 서울의 교통난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도시의 모든 이동 수요 중 무려 95%가 버스와 택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더 큰 문제는 이 교통량의 75%가 사대문 안 도심이라는 좁은 공간에 집중되었다는 점입니다.
서울의 심장부가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하기 직전이었던 셈입니다.
도로를 넓히고 버스를 늘리는 미봉책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의 지상 활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대규모 인원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송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절실했습니다.
그 유일한 해답은 땅 아래 새로운 길을 내는 것, 바로 ‘지하철 건설’이었습니다.
1.2. 보이지 않는 경쟁: 평양 vs 서울
1970년대 냉전의 시대, 남과 북의 체제 경쟁은 모든 분야에서 불꽃 튀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두고 우주에서 경쟁했다면, 남과 북은 땅속에서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 무대는 바로 ‘지하철’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서 지하철을 가진 나라는 일본과 중국뿐이었습니다.
누가 먼저 ‘지하철 보유국’이 되느냐는 단순한 교통수단 건설을 넘어, 국가의 기술력과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였습니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려 미국에 충격을 안겼듯, 이 경쟁의 첫 승기는 북한이 잡았습니다.
1973년 9월, 북한이 평양에 ‘천리마선’을 개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는 남한 사회에 큰 충격과 자극을 안긴 ‘스푸트니크 모멘트’였고, 서울의 지하철 건설을 더욱 재촉하는 강력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3. '두더지 시장'의 결단과 정치적 계산
평양 지하철 개통 소식에 자극받은 정부와 서울시는 지하철 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이 있었습니다.
철도청장 출신이었던 그는 서울의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해 지하철이 필수적이라 확신했고, 강력한 의지로 사업을 밀어붙여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지하철 건설의 동력은 단순히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는 순수한 열정만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시대의 필요성과 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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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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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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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문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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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 돌파 인구와 포화상태인 도심 교통난 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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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체제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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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지하철 개통(1973)에 맞선 체제 우월성 과시 및 자존심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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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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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촌야도' 구도 속, 서울 시민 지지 확보를 위한 대선 공약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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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도시의 필요성과 남북 경쟁, 정치적 목적이 복합적으로 얽혀 시작된 지하철 건설.
그러나 이 거대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은 수많은 돈과 기술, 그리고 땀을 요구하는 거대한 도전이었습니다.
2. 땅속에서 펼쳐진 위대한 도전: 건설 과정
2.1. 빌려온 돈과 기술로 첫 삽을 뜨다
지하철 건설의 가장 큰 현실적 장벽은 막대한 돈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경제력으로는 건설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해결책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찾아왔습니다.
정부는 일본의 ‘대외경제협력기금(OECF)’ 차관을 도입하기로 결정했고, 이 자금은 1호선 건설의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기술 역시 일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일본 기술자문단은 서울을 단 하나의 중심업무지구(사대문 안)를 가진 도시로 보고, 모든 노선이 교외에서 도심으로 모였다가 다시 뻗어 나가는 ‘방사형 노선망’을 구상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의 가장 핵심 구간인 서울역-청량리 구간이 대한민국 지하철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2.2. 대한민국 토목 기술의 새 이정표
서울 도심 지하 15~20m 깊이에서 펼쳐진 공사는 대한민국 토목 기술 역사에 길이 남을 도전이었습니다.
수많은 고층 빌딩과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매설물을 그대로 둔 채 안전하게 땅을 파내려 가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고난도 작업이었습니다.
국내 기술진은 이 위대한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당시 최신 공법들을 성공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지하철 1호선(당시 종로선 핵심 구간)은 “땅을 열고(도로를 파고) 구조물을 만든 뒤 다시 덮는” 개착식 공법(오픈 컷, 컷 앤드 커버)이 중심이었습니다.
먼저 도심 한복판 도로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공사는 ‘길을 우회시키고, 땅을 열고, 다시 길을 돌려주는’ 순서로 진행됐습니다.
차량 통행을 한쪽으로 돌려 놓고, 지하에 깔린 상수도·가스·통신 같은 매설물을 확인한 다음, 굴착 구간 가장자리에 흙막이 벽을 세워 토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벽부터” 잡았습니다.
그다음이 진짜 핵심입니다.
땅을 한 번에 깊게 파면 벽이 버티지 못하니, 보통 1~2미터씩 층층이 파내려가며 그때마다 가로로 띠장(벽을 묶는 보)을 대고, 안쪽으로 버팀보(버팀대)를 걸어 토압을 받아냈습니다.
특히 서울 도심처럼 지하수가 움직이고 토압이 미세하게 변하는 곳에서는, 버팀보 끝에 재키(잭)를 써서 압력을 미리 걸어 두어 변동을 줄이는 식의 “현장형 해법”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도심은 땅속에 물길이 많았습니다.
굴착을 시작하면 예상치 못한 지하수와 지하 실개천을 만나기 쉬웠고, 물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바닥이 질척해지고 주변 지반이 꺼질 위험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펌프 배수, 집수정 운영 같은 방식으로 물을 통제하면서 바닥을 정리하고, 그 위에 철근을 짜서 바닥 슬래브(바닥판)를 치고, 옆벽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상부 슬래브(천장판)를 덮는 식으로 “콘크리트 상자”를 완성했습니다.
상자 구조물이 만들어지면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되메우고, 도로를 복구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도시의 혈관이 새로 깔린 셈이었죠.
이 과정이 더 까다로웠던 이유도 있습니다.
시청역·동대문 쪽처럼 도심의 밀집 교차로를 통과하는 구간은 구조물이 빽빽했고, 남대문·동대문 같은 역사 유산 근처는 진동과 변위를 더 조심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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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신각 앞 (현 종각역) 지하철 공사 현장 (1971년) |
이러한 기술적 성취를 바탕으로 완성된 지하철 1호선은 이후 모든 지하철 건설의 기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훗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댐과 함께 ‘대한민국 토목문화유산’ 으로 지정되며 단순한 교통 시설을 넘어선 역사적 기념비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3. 첫 전동차의 등장: 일본에서 온 붉은 철마
터널이 뚫리고 선로가 놓였지만, 정작 그 위를 달릴 전동차를 만들 기술은 국내에 없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 전동차인 ‘초저항’ 전동차 60량(6량 10개 편성)은 일본 히타치 제작소에서 만들어져 바다를 건너와야 했습니다.
이 붉은색 철마는 두 가지 혁신적인 기술을 품고 있었습니다.
• 첫째, 교류(25,000V)와 직류(1,500V) 전기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전기 방식을 사용하는 지상의 국철 구간과 지하의 서울시 구간을 하나의 열차가 그대로 달리는 ‘직결 운행’을 가능하게 한 핵심 기술이었습니다.
이로써 1호선은 단순한 도심 지하철을 넘어, 서울과 수도권을 잇는 광역 교통망의 중추가 될 수 있었습니다.
• 둘째, 기존 철도청 열차와 시각적으로 구별하기 위해 상징적인 붉은색 도색을 채택했습니다.
이 강렬한 붉은색은 이후 오랫동안 1호선의 상징으로 시민들의 기억에 남게 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이 달릴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역사적인 개통의 날, 시민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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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편성(1002호) |
3. 눈물과 환희가 교차한 날: 1974년 8월 15일
3.1. 비극 속의 개통식
1974년 8월 15일, 서울은 광복 29주년과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 개통이라는 겹경사를 맞아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통식이 열리기 불과 한 시간 전, 남산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끔찍한 비극이 터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저격 시도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문세광이 쏜 유탄에 육영수 여사가 맞아 서거한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순식간에 온 나라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수도권 전철과 서울 지하철 개통으로 들떴던 분위기는 일순 울음바다로 바뀌었다."
결국, 온 국민의 환호 속에 열려야 했던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은 국가적 비극의 그늘 아래, 조촐하고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 역사적인 순간은 그렇게 눈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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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
3.2. 새 시대로의 첫 출발
비록 개통식은 슬픔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역사는 예정대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역–청량리 구간을 중심으로 서울의 첫 지하철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국철 전철화가 맞물리며 인천·수원 방면까지 ‘수도권 전철’의 시대가 함께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 대중교통 혁명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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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개통 기념 승차권 |
그날, 청량리에서 첫 전동차가 달렸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1호선은 애초부터 “도심 지하철”이면서 동시에 “수도권을 묶는 전철”이라는 운명을 함께 안고 태어났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역–청량리 구간이 문을 열며 서울의 지하철 시대가 시작됐고, 수도권 전철망은 경부선·경인선·경원선을 축으로 확장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1호선은 ‘서울의 심장’을 지나, ‘수도권의 팔다리’로 뻗어갔습니다.
남쪽으로는 수원까지 이어지며 통근권을 키웠고, 더 내려가 2005년 천안까지, 2008년 신창까지 연장되며 ‘하루 생활권’의 지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북쪽으로도 전철화와 연장, 직결 운행이 이어지며 끝내는 연천까지 닿았습니다.
결국 1호선은 “서울의 첫 지하철”을 넘어, 수도권을 한 장의 지도처럼 접어 이어 붙인 첫 번째 동맥이 되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은 단순히 새로운 교통수단 하나가 생긴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는 서울이 포화 상태의 도심 기능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수도권 전체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첫 운행을 시작한 지하철 1호선은 이후 반세기 동안 묵묵히 서울 시민의 발이 되어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4. 서울의 심장을 뛰게 한 철의 대동맥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지 50년.
그동안 1호선이 실어 나른 누적 승객은 100억 명에 육박합니다.
이 대기록은 1호선이 단순한 교통 인프라를 넘어, 서울 시민의 일상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삶의 동반자’였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교통과 부동산은 결국 한 문장으로 만납니다.
“시간이 줄어들면, 거리의 의미도 바뀐다.”
도시철도(전철) 역이 생기면 주변 주택 가격이 전반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은 국내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특히 변화는 개통 ‘그날’만이 아니라, 계획이 알려지고 공사가 시작되며 기대가 가격에 선반영되는 구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호선은 1970년대 서울의 “막힌 혈관”을 뚫은 것과 동시에, 역 주변 땅과 집의 가치에도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청량리–서울역–영등포–구로처럼 사람과 일자리가 몰리는 구간은 접근성의 이점이 더 선명해졌고, 인천·수원·천안·신창으로 이어지는 확장은 “서울 안에서의 이동”을 “수도권 전체의 통근”으로 바꾸며 주거 선택지를 넓혔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은 지하철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산업단지 조성, 주택 공급, 학군, 재개발·재건축, 경기 흐름이 함께 얽힙니다.
그래서 1호선의 영향은 “가격을 무조건 올렸다”가 아니라, 더 정확히는 ‘어디에 살아도 서울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을 만들어, 수요가 움직이는 방향을 바꿨다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1호선은 서울의 심장부를 관통하며 도시 기능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켜 수도권의 균형 있는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수도권 교통망의 근간을 마련한 것도 바로 1호선이었습니다.
이처럼 서울 지하철 1호선은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과 도시 발달사를 온몸으로 증언하는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 글은 서울 지하철 1호선의 탄생과 초기 운행, 이후 확장 흐름을 다룬 역사·교통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했습니다.
다만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 전개와 감정·표현은 서사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사실로 확인되는 내용은 최대한 정확한 연도·지명·사건 중심으로 서술했고, 자료마다 해석이 갈릴 수 있는 지점은 단정적으로 몰아가지 않겠습니다.
In 1970s Seoul, rapid growth choked streets with buses and taxis, pushing leaders to imagine an underground artery.
Cold War rivalry added fuel after Pyongyang opened a subway in 1973.
Seoul launched a first line linking the city core and rail corridors, financed and advised in part through Japanese loans, and built by opening streets, bracing excavations, controlling groundwater, and restoring roads above a concrete “box.”
Trains were imported from Japan. The system opened on Aug. 15, 1974—overshadowed by the attack that killed First Lady Yuk Young-soo.
From that sorrowful start, Line 1 kept stretching, binding the capital region into one commuting map and reshaping dail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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