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의 화신, 보에몽 1세: 십자군의 영웅인가, 기회주의적 정복자인가?
노르만 시대의 풍운아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거대한 서사시 속에서 보에몽 1세만큼 중요하면서도 논쟁적인 인물은 드물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을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던, 정복과 통치에 대한 타고난 재능을 지닌 시대의 풍운아였다.
11세기 유럽을 뒤흔들었던 노르만 가문의 전형적인 모험가였던 그는, 한편으로는 십자군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군사적 천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의 맹세마저 이용했던 냉철한 기회주의자였다.
이 논평은 보에몽 1세의 복합적인 유산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의 불타는 정치적 야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의 리더십이 십자군의 운명에 어떤 결정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를 단순히 '영웅' 혹은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한 거인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균형 잡힌 역사적 평가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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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란트의 보에몽 |
1. 계승권 없는 아들: 야망의 시작
보에몽의 평생에 걸친 행동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결정적 사건을 먼저 분석해야 한다.
이 초기 생의 좌절은 그의 성격과 야망의 방향을 결정지은 원초적 경험이었으며, 그가 왜 머나먼 동방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만 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열쇠이다.
노르만 혈통과 계승 위기
보에몽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한 위대한 노르만 군주, 로베르 기스카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정복과 통치에 대한 순수한 타고난 천재성"을 지닌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미래는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으로 인해 어긋나기 시작했다.
기스카르가 정치적 이유로 보에몽의 어머니 알베라다와 이혼하고 살레르노의 롬바르드 공주 시켈가이타와 재혼하면서, 보에몽의 계승권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시켈가이타는 자신의 아들 로저 보르사가 후계자가 되도록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기스카르 역시 롬바르드 귀족들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로저 보르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군사적으로는 유능했으나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보에몽은 결국 이복동생에게 아버지의 공작령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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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 기스카르와 로저 백작 |
초기 군사 경력과 이탈리아에서의 좌절
계승권에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에몽의 군사적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081년부터 1085년까지 아버지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벌인 발칸 원정에서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비잔티움의 군사 전술을 익혔고, 디라키움(Durazzo) 공성전에서 아버지 기스카르가 도미니크라는 이름의 베네치아인에게 조카딸과의 결혼을 약속하며 도시를 배신하도록 설득하는 책략을 직접 목격했다.
이는 단순한 매수를 넘어, 개인의 야망을 이용한 정치적 협상과 동맹의 힘을 보여주는 교훈이었으며, 훗날 그가 안티오키아에서 피루즈를 회유할 때 그대로 재현될 전략의 원형이었다.
1085년 기스카르가 사망하자, 보에몽은 이복동생 로저 보르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했다.
그는 군사적 능력으로 바리(Bari)를 포함한 아풀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며 동생을 압박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숙부인 시칠리아의 로저 1세가 개입했다.
로저 1세는 로저 보르사를 지지했고, 정치적으로 고립된 보에몽은 결국 반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자, 보에몽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방으로 향했다.
그에게 동방은 단순한 미지의 땅이 아니라, 자신의 억눌린 야망을 실현하고 계승권 없는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유일한 기회의 땅이었다.
2. 십자군의 부름: 권력을 향한 새로운 길
1096년, 제1차 십자군의 함성이 유럽 전역에 울려 퍼졌을 때, 보에몽에게 이는 단순한 종교적 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좌절을 딛고, 자신의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야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십자군 원정 배경
11세기 말, 셀주크 투르크가 소아시아와 시리아 일대를 넓히며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이 큰 압박을 받자,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방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성지 예루살렘 회복”과 순례자 보호를 내세워 원정을 호소했고, 이게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 불씨가 됐다.
신앙적 열기만이 아니라 토지·명예·부채 해결 같은 현실적 동기까지 겹치면서, 기사·평민이 대규모로 동방으로 몰려가 전쟁이 ‘시대적 이동’처럼 번져갔다.
전략적 선택: 아말피의 십자가
보에몽이 십자군에 합류하기로 결심한 순간은 매우 극적이다.
그는 숙부 로저 1세와 함께 아말피를 공성하던 중 십자군의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망토를 찢어 십자가를 만들어 어깨에 맸다고 전해진다.
이 행동이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이후 행보를 볼 때 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행위였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당시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전쟁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보에몽은 이들을 이끌고 동방으로 가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이복동생과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가져다줄 것임을 직감했다.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 맘즈베리의 윌리엄이 "십자군 원정 전체가 보에몽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의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비잔티움과의 복잡한 관계
십자군 지도자로서 그의 첫 번째 시험대는 과거의 숙적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펼쳐졌다.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와 정복한 모든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놀랍게도, 과거 황제와 칼을 맞댔던 보에몽은 다른 지도자들보다 먼저 이 맹세를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교활한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협력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다.
비잔티움의 역사가 안나 콤니나에 따르면, 보에몽은 충성 맹세의 대가로 십자군의 '동방 총사령관(Domestikos of the East)' 직위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무모한 요구가 아니었다.
당시 많은 노르만인들이 비잔티움의 용병으로 복무한 전력이 있었기에, 제국의 군사 체계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동방 총사령관'은 외국인도 임명될 수 있었던 제국의 실질적인 고위 군사직이었으며, 마침 공석인 상태였다.
이는 그가 제국의 군사정치 구조 최상층부로 편입되려는, 과거 제국에 맞섰던 경험을 역으로 활용하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그가 처음부터 원정의 주도권을 쥐고 동방에 자신만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음은 명확했다.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황제와의 관계를 자신의 목표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겉으로는 협력하면서도, 자신의 독립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교활한 전략가였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야망이 펼쳐질 무대는 시리아 북부의 견고한 도시, 안티오키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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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십자군 전쟁 지도 - 주요 군대의 이동 경로 |
3. 승리의 설계자: 안티오키아 공성전
안티오키아 공성전은 보에몽의 군사적, 전략적 천재성이 최고조에 달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8개월에 걸친 길고 험난한 이 공성전 기간 동안 그는 십자군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마침내 평생의 숙원이었던 자신만의 영지를 손에 넣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
1097년 10월,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의 거대한 성벽 앞에 도착했을 때, 보에몽은 이미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십자군을 위기에서 구하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한 상태였다.
공성전이 장기화되면서 식량 부족과 이슬람 구원군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그의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직접 식량 원정대를 조직하여 굶주린 군대를 먹였고, 기습 공격을 통해 이슬람 구원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십자군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지탱했다.
그의 에너지와 군사적 재능은 그를 명실상부한 십자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 만들었다.
피루즈와의 밀약과 교묘한 명분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견고한 성벽은 무력만으로는 정복할 수 없었다.
여기서 보에몽의 책략가적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성벽의 '두 자매의 탑'을 지키던 피루즈라는 아르메니아인(추정)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부와 명예를 약속하고 그를 매수했다.
이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교훈 즉, 견고한 요새는 무력뿐만 아니라, 핵심 인물의 개인적 욕망(도미니크에게는 높은 신분의 결혼, 피루즈에게는 '부와 명예')을 파고들어 무너뜨릴 수 있다는것을 완벽하게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1098년 6월 3일 새벽, 피루즈가 내려준 밧줄 사다리를 타고 보에몽과 그의 병사들은 성벽 위로 잠입해 성문을 열었고, 십자군은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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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군 보에몽 안티오크 성벽에 오르다 |
도시를 차지한 보에몽은 곧바로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깰 명분을 찾았다.
그는 십자군이 케르보가의 대군에게 역으로 포위당했을 때 황제가 약속했던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제가 먼저 맹세를 깼으므로 자신들의 의무도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황제의 대리인이었던 타티키오스의 철수 사건이 있었다.
보에몽이 타티키오스에게 다른 지도자들이 그를 해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철수를 유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것이 정당한 명분이었는지 혹은 교묘한 구실이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보에몽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황을 얼마나 교묘하게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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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8년 6월, 타렌트의 보에몽 1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함 |
최후의 승리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곧바로 모술의 아타베그 케르보가가 이끄는 거대한 이슬람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군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보에몽은 다시 한번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전투 계획을 수립하고, 군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케르보가의 군대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이슬람 군대의 내부 분열과 보에몽의 대담한 전술이 결합되어 십자군은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마침내 그는 이탈리아에서 얻지 못했던 자신만의 영지를 손에 넣었지만, 그 영광의 순간은 동시에 새로운 투쟁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4. 안티오키아의 군주: 실현된 꿈과 새로운 위협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주가 됨으로써 보에몽은 평생의 숙원을 이루었다.
그는 이제 계승권 없는 아들이 아니라, 동방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지배하는 강력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국가는 건국과 동시에 생존을 위한 험난한 투쟁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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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5년경의 십자군 국가, 파란색이 안티오키아 공국 |
안티오키아 공국과 이중의 위협
보에몽이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은 십자군 국가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국가(1098-1268)로, 동방 라틴 세계의 중요한 보루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국은 지리적으로 두 개의 거대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서쪽에서는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비잔티움 제국이 끊임없이 압박해왔고, 동쪽과 남쪽에서는 알레포를 비롯한 강력한 이슬람 세력들이 호시탐탐 그의 영토를 노렸다.
보에몽은 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주변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1099년 성탄절, 그는 십자군 맹세를 이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피사의 다고베르트를 새로운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실권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세력을 견제하고 교황과의 관계를 다지려는 치밀한 정치적 행보였다. (논쟁)
안티오키아를 확보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야망은 결코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포로 생활과 조카의 섭정
1100년, 보에몽의 권력은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그는 다니슈멘드 왕조의 이슬람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공국의 군주가 사라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의 조카 탕크레드가 섭정으로 나서 공국을 지켜냈다.
탕크레드는 유능한 군인이자 통치자로서, 보에몽이 없는 동안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며 공국의 기반을 다졌다.
보에몽은 3년간의 포로 생활 끝에 풀려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지만, 그의 야망은 이제 안티오키아를 지키는 것을 넘어 더 큰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공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비잔티움 제국에 있다고 판단하고, 이 오랜 숙적과의 정면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이는 그의 야망이 보여줄 마지막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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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에몽 1세 해방 |
5. 마지막 승부수: 비잔티움과의 정면 대결
유럽으로의 귀환은 보에몽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정복자이자 동방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그는 이 명성을 이용해 평생의 숙적인 비잔티움 제국과의 최후 결전을 준비했다.
이는 그의 야망이 걸린 마지막 도박이었다.
영광의 귀환과 새로운 십자군
유럽에 돌아온 보에몽은 개선장군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1106년,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의 딸인 콩스탕스와 결혼하며 자신의 외교적 위상을 과시했다.
이 결혼을 통해 얻은 권위를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시오스 황제를 "그리스도의 적"이자 "미치광이 이교도, 배교자 율리아누스, 또 다른 유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피에 굶주린 헤롯"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침공을 정당화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이 십자군을 배신했으며,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박해한다고 비난했다.
교황 파스칼 2세마저 그의 주장에 동조하여 성 베드로의 깃발을 하사했고, 그의 원정은 사실상 새로운 '십자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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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에몽과 콩스탕스의 결혼 |
1107년의 원정과 데볼 조약의 굴욕
1107년, 보에몽은 3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디라키움을 공격했다.
이 군대를 안티오키아 방어에 투입하는 대신,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과 알렉시오스에 대한 복수심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평생에 걸친 그의 집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과거 노르만족과의 전투 경험을 통해 그들의 전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지구전을 펼쳤다.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까지 받은 비잔티움 군대에 의해 완벽하게 포위된 보에몽의 군대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무너져 내렸다.
결국 보에몽은 굴욕적인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1108년, 그는 데볼(Devol)에서 알렉시오스 황제를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참혹했다.
보에몽은 황제의 봉신이 되어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안티오키아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만 보유하며 사후에는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
또한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를 제명하고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를 복권시켜야 했다.
그의 가장 큰 야망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는 패배자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6. 유산과 역사적 평가: 모순으로 가득 찬 거인
보에몽 1세는 군사적 천재성과 외교적 수완,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야망이 기묘하게 공존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십자군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성한 맹세마저 저버린 기회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성공과 실패, 영광과 굴욕이 교차하는 한 편의 대서사시와 같았다.
인물 종합 평가
보에몽은 시대를 대표하는 노르만 전사의 전형이었다.
비잔티움의 공주 안나 콤니나는 그를 "가장 키가 큰 사람보다도 한 큐빗(약 45cm)은 더 컸으며, 허리와 옆구리는 가늘고 어깨와 가슴은 넓었다"고 묘사하며 그의 압도적인 외모와 존재감을 기록했다.
그는 용맹한 군인이자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책략가였다.
살레르노의 역사가 로무알드는 그를 "항상 불가능을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했는데, 이는 그의 끝없는 야망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 말일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저울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비잔티움 제국 정복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데볼 조약의 굴욕은 그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얻지 못했던 자신만의 영지를 동방에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은 다른 십자군 국가들보다 더 오래 존속하며 170년간 라틴 동방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다.
비록 그의 마지막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이룬 업적은 중세 역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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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4년의 우트르메르(십자군 국가) |
마지막 안식처가 말하는 것
보에몽의 복합적인 유산은 이탈리아 남부 카노사 디 풀리아(Canosa di Puglia)에 있는 그의 독특한 영묘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기독교인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이슬람 양식에 가까운 돔 형태의 이 건물은 그의 동방에서의 삶을 암시한다.
영묘의 청동 문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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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에몽의 영묘 |
한쪽 문에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함께 라틴어 비문("Grecia victa quater" - 그리스를 네 번 꺾었노라)이 새겨져 그의 업적을 칭송한다.
그러나 다른 쪽 문에는 보에몽 자신과 평생의 경쟁자였던 이복동생 로저 보르사의 모습이 나란히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두 사람의 아들인 보에몽 2세와 윌리엄의 모습도 함께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가문의 불화를 끝내기로 약속했던 후계자들을 통해 왕조의 평화 협약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사후 화해의 염원을 넘어, 대를 잇는 화합을 기원하는 강력한 메시지로서 그의 공적인 영광 이면에 가려진 개인적인 고뇌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처럼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우리에게 그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영광과 고뇌, 성공과 실패가 뒤섞인 복잡하고 인간적인 거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은 1차 십자군과 보에몽 1세를 다룬 주요 연대기 기록과 현대 연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다만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구성, 대사, 심리 묘사는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부분이 있습니다.
연대·지명·직함 등 사실 요소는 가능한 범위에서 교차 확인했습니다.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논쟁), 전승 성격이 강한 대목은 (전승)으로 표기했습니다.
원전 판본과 학설은 계속 갱신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인용이나 학술 목적이라면 별도로 1차 사료와 연구서를 함께 확인해 주세요.
Bohemond I, Robert Guiscard’s disinherited Norman son, treated the First Crusade as a path to a throne.
Trained in wars against Byzantium, he swore a tactical oath to Emperor Alexios I, then emerged as a key strategist at Antioch.
In 1098 he exploited a secret deal with the guard Firuz to open the walls, claimed the emperor’s failed relief voided crusader promises, and held Antioch as his own.
Captured in 1100, he left Tancred to secure the principality.
Returning to Europe, he raised an anti-Byzantine expedition, but was checked at Dyrrhachium and forced into the Treaty of Devol (1108), vassal in name.
His legacy remains split: savior in battle, opportunist in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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