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스토리: 채식·금욕 규율, 비밀결사, 무리수 충격과 플라톤·케플러의 계보 (Pythagoras)


수(數)의 교주, 피타고라스


사모스의 별과 이집트의 지혜

기원전 572년경. 

에게 해 사모스 섬(Samos, 고대 그리스의 번영한 도시 국가).

따뜻한 에게 해의 바람이 사모스의 번영을 실어 나르던 시절, 피타고라스(Pythagoras, 최초로 자신을 철학자(Philosopher)라 칭한 수학자이자 종교 지도자)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 므네사르코스(Mnesarchus, 무역에 종사했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그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는데, 리라(Lyre, 신성하게 여겨지던 현악기) 연주와 그림, 운동에 능숙했다.


피타고라스의 눈은 언제나 하늘과 바다에 닿아 있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찾던 탈레스(Thales,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이자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인물)의 고향 밀레투스(Miletus, 사모스와 가까운 도시)와 가까이 살았기에, 어린 시절 탈레스 밑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 날, 사모스의 해변. 젊은 피타고라스는 스승 탈레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스승님, 이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밀레투스의 상선이 싣고 온 도자기나 크로토나(Crotona,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항구 도시)에서 가져온 포도주, 이 모든 것이 결국 물(水)의 변형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물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궁금합니다."

탈레스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피타고라스, 너는 질문이 깊구나. 나는 네가 더 넓은 세상, 특히 이집트(Egypt,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가서 그들의 오랜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의 사제들은 자연을 이해하는 데 기하학(Geometry)이라는 신비로운 열쇠를 사용한단다"


피타고라스의 흉상

피타고라스는 스승의 조언에 따라 광범위한 여행에 돌입했다. 

그는 이집트로 건너가 23년 동안 나일강 연안의 신전들을 돌며 멤피스(Memphis, 이집트 고대 수도)의 사제들에게서 기하학과 천문학, 그리고 정화와 윤회(Transmigration of the Soul)에 대한 신비 사상을 배웠다. 

그는 영혼은 불멸하며, 죽음 뒤에는 영혼이 다른 몸으로 옮겨 간다는(환생) 교리를 받아들였다.


"인간의 영혼은 돼지로도 태어날 수 있다. 우리가 동물을 해친다면,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수양의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피타고라스가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페르시아 제국(Persia, 당대 그리스를 위협하던 대제국)이 이집트를 침공했고, 그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바빌로니아(Babylonia,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로 끌려가게 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보낸 12년 동안, 그는 점성술사들과 서기들로부터 방대한 지식을 전수받았는데, 특히 직각삼각형의 변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점토판(Si.427)에는 이미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원리가 토지 경계를 측량하고 기록하는 데 활용되고 있었다. 

이 지식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응용 기하학의 가장 오래된 예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피타고라스는 이 실용적인 수학적 관계를 보았지만, 그는 단순히 공식을 아는 것을 넘어,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만물의 근원과 연결시키려 했다.


기원전 530년경. 고향 사모스 섬.

40년의 긴 타향살이 후, 60세에 가까운 나이로 돌아온 고향은 참주 플리크라테스(Polycrates, 사모스의 독재자)의 폭정 아래 놓여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배운 우주의 조화와 질서가 파괴된 고향의 모습에 좌절했다.


"수는 질서를 의미한다. 이오니아(Ionia, 에게 해 동부 연안의 그리스 지역)의 자유는 페르시아의 통치하에 있고, 사모스는 폭정 아래 혼란스럽다. 내가 배워온 수학적 진리는 이 혼돈을 바로잡아야 한다!"


피타고라스는 철학과 수학적 지식을 가르치고 실현할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 항구 도시 크로토나(Crotona)로 이주했다.


크로토나의 비밀과 수의 지배

크로토나에 도착한 피타고라스는 곧 '피타고라스 학교(Pythagorean School)'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단순한 학문 연구 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 수학, 자연 과학을 연구하는 학원인 동시에, 비밀스럽고 신비적인 의식과 엄격한 계율로 결합된 '결사(Cult)'로 발전했다.


그의 아내 테아노(Theano, 피타고라스의 아내이자 제자) 역시 수학, 철학, 의학에 기여했으며, 그가 사망한 후에도 학파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피타고라스에게는 자녀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학파의 비밀주의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테아노와 학파 내부에서 공유했던 사상과 엄격한 삶의 방식은 그의 인간관계와 사생활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만물은 수다 (All is number)

피타고라스 학파의 중심 철학은 "만물은 수이다(πάντα ἀριθμός ἐστιν)"라는 가정에 근거를 두었다.

그들에게 자연수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원리였다.

"우주의 모든 조화는 정수비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비례를 이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운명을 관리하고 개선하는 길이다".

피타고라스는 수의 복잡한 성질을 밝힘으로써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수를 열심히 연구했고, 이는 기하학 연구로 이어졌다. 

그들의 연구 목록은 방대했는데, 피타고라스 정리(직각삼각형의 변의 관계), 자연수를 짝수와 홀수로 분리, 삼각수와 사각수의 발견, 황금비와 정오각형의 작도, 정다면체 다섯 종류(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중 일부 사실 증명 등이 학파의 업적으로 전해진다.


음악의 수학적 탄생

피타고라스의 가장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음악이었다. 

그는 세상을 숫자로 이해했으며, 음악 음계 역시 완벽한 숫자의 체계로 만들려고 했다.


(대장간 앞, 망치 소리를 듣는 피타고라스. 그는 12파운드, 9파운드, 8파운드, 6파운드 망치들의 소리에서 조화를 발견한다.)

피타고라스: "멈춰라! 저 소리의 조화... 망치들의 무게 비율이 정수비로 떨어지는 순간, 완벽한 하모니가 발생한다!" (전승)


그는 현(絃)의 진동 실험을 통해 음정의 진동수가 가장 간단한 정수배 비율일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정(협화음정)이 발생한다는 대발견을 했다.

• 옥타브(Octave, 8도): 2 : 1 (재질과 장력이 같은 10cm 현과 20cm 현).

• 완전 5도(Perfect Fifth): 3 : 2 (20cm 현과 30cm 현).

• 완전 4도(Perfect Fourth): 4 : 3 (30cm 현과 40cm 현).

피타고라스: "현악기의 길이를 절반으로 줄이면 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간다. 이것이 우주의 언어다! 숫자로 표현되는 아름다움, 바로 하르모니아(Harmonia)다!"


이러한 발견으로 그는 조성(Tonality)의 존재를 처음 알아낸 인물이며, 서양 음악 이론의 토대가 되는 7음계(도-레-미-파-솔-라-시)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는 이 조화와 질서, 비율을 지칭하는 여신의 이름인 '하르모니아'를 따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천체를 코스모스(Kosmos,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 우주)라 이름 붙였다. 

이는 현대에 사용되는 코스모스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천구의 음악 (Music of the Spheres)

음악을 수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우주관으로 확장되었다. 

그들은 별과 행성이 어떤 수학 공식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이 천체들이 완벽한 수학 비례를 이루며 운동하면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조화로운 음악(천구의 음악 또는 천구의 하모니)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의 제자: "스승님, 저 거대한 천구들이 엄청난 속력으로 움직이는데, 왜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피타고라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소리가 항상 우리와 함께 했기 때문이지. 마치 오랜 시간 대장간에서 일한 구리 세공인처럼, 소리와 대비되는 침묵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듣지 못하는 것이다"


엄격한 금욕주의와 비밀주의

학파는 철저한 금욕적 삶을 추구했으며, 이는 영혼의 정화를 위한 수행이었다. 

그들은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는 채식주의(Vegetarianism)를 지향했는데, 이는 영혼이 동물로도 환생할 수 있다는 믿음(윤회설) 때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19세기 '베지테리언'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까지 채식주의를 '피타고라스 식단(Pythagorean Diet)'이라고 불렀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또한 비밀결사(Secret Society)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대부분의 가르침은 구두로만 전해졌고 외부 발설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들은 연구 결과를 모두 피타고라스의 이름으로만 발표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 자신이 실제로 발견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비밀에 싸여 있다.


"우리의 지혜는 만민에게 열려 있지 않다. 오직 수행과 금욕을 통해 수의 진리에 다가선 자만이 '마테마티코이(Mathematikoi, 연구에 몰두했던 파벌, 이후 '수학'의 어원이 됨)''로 불릴 자격을 갖는다!"


이러한 엄격한 규율 속에는 '콩을 멀리할 것', '빵을 통째로 뜯어 먹지 말 것', '흰 수탉을 만지지 말 것' 등 이해하기 어려운 규율들도 있었다. (전승)

특히 콩 금지령은 당시 크로토나 사회에서 큰 논란거리였다. 

채식은 영혼의 순수함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이러한 규율들은 학파를 신비주의적 배타 집단으로 만드는 과실을 낳았다.


무리수의 배신과 크로토나의 몰락

피타고라스 학파의 중심 교리는 '모든 수는 정수 또는 정수의 비율(유리수, Ratio Number)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믿음은 학파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연구하던 중, 한 제자에게서 충격적인 발견이 터져 나왔다. 

그 이름은 히파수스(Hippasus, 피타고라스 학파의 일원).

히파수스는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를 계산하던 중, 그 길이가 (루트 2)가 되며, 이 루트 2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수를 무리수(Irrational Number)라고 부른다.


제곱근 2는 무리수이다.


(학파의 은밀한 회의실.)

히파수스: "스승님, 이 대각선의 길이(현)는 유리수와 대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수직선(Number Line)에는 어떠한 비율로도 나타낼 수 없는, 비(比)를 벗어난 점이 존재합니다!"


피타고라스는 히파수스의 손에 들린 양피지 위로 그려진 정사각형을 노려보았다. 

온 우주가 정수비의 하모니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에 의해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만물이 수라는 중심 교리에 균열이 간 것이다.


피타고라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로) 네가 발견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혼돈이다!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비-비율(Ratio-less)의 개념을 입 밖에 내지 마라. 이는 신성 모독이다!"

히파수스: "하지만 이는 논리적인 증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진리입니다. 진리를 덮는 것은 학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만물은 수라는 믿음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학파 내부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무리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곧 피타고라스 학파의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격분한 피타고라스 학파 동료들이 히파수스를 바다에 던져 익사시켰다고 전해진다.(논쟁/전승)

이는 비밀주의와 교조주의가 과학적 진리를 억압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장 큰 논란으로 기록된다.


피타고라스와 어부들

외부의 갈등: 정치적 몰락

시간이 흐르면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정치적 힘과 귀족적인 경향은 크로토나와 남부 이탈리아의 민주적인 세력(Democratic forces)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크로토나 시민 회의장 앞.)

민주파 지도자: "피타고라스 학파는 철학을 무기로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려 한다! 그들은 비밀스러운 의식과 귀족적 우월감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웃 도시 시바리스(Sybaris, 크로토나의 적대 도시)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의 한 장군이 이끄는 크로토나 군이 시바리스를 점령하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오히려 몰락의 도화선이 되었다. 

학파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여 앙심을 품고 있던 한 학생이, 승전 후의 혼란을 틈타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이 노획물을 독점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민주 세력의 분노와, 평소 학파의 배타적인 교조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과 결합되어 거대한 사회적 갈등으로 폭발했다.


피타고라스의 몰락

(기원전 5세기 말. 크로토나 피타고라스 학교.)

민주적인 세력에 의해 선동된 시민들이 학교 건물을 포위했다.

시민 1: "저 비밀스러운 결사를 해산시켜라! 그들의 수(數)는 우리 시민의 자유를 셈하는 도구가 아니다!".


피타고라스의 제자 38명은 스승을 보호하려 맞섰지만, 쇠퇴하는 귀족 정치적 이해관계와 폭발적인 민중의 분노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학교 건물은 불태워졌고, 학파는 해산되었다.

피타고라스는 가까스로 크로토나에서 탈출하여 메타폰툼(Metapontum,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으로 피신했다.


(메타폰툼의 작은 은신처. 피타고라스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린다.)

피타고라스: "숫자는 완벽한 질서를 약속했다. 하지만 인간의 질투와 정치적인 탐욕, 그리고 내가 억압하려 했던 무리수(무리수)의 혼돈이 결국 내 세상을 집어삼켰구나. 진정한 조화는 우주에만 있는가?"


그는 75세에서 80세 사이, 메타폰툼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수의 메아리와 후대의 평가

피타고라스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뿌린 '수학적 형이상학'의 씨앗은 서양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피타고라스의 영혼 불멸설과 수학적 세계관은 후대 철학자 플라톤(Platon)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플라톤은 수학을 이데아 세계로 나아가는 지성의 훈련이라 보았으며, 자신의 아카데미아(Academia, 플라톤이 세운 학원)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를 새겼다.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정수비의 음정 이론은 17세기까지 서양 음악 이론을 지배했다. 

이 이론은 바흐(J.S. Bach)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최종적으로 극복되며 현대 음악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만물은 수이며 별과 행성이 수학 공식에 따라 움직인다'는 신념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에게 영감을 주어 지동설(Heliocentrism)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 전통은 근대 과학혁명의 핵심 인물인 케플러(Kepler, 행성 운동 법칙 발견자)와 뉴턴(Newton, 만유인력 법칙 발견자)에 의해 계승되어, 우주를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는 과학적 전통을 확립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에서 증명의 중요성을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된다. 

비록 피타고라스 정리 자체는 고대 바빌로니아(Babylonia) 등지에서도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시도하고 체계화한 것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거대한 업적이다. 

피타고라스의 학문적 접근 방식은 그리스 수학이 단순한 계산 기술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또한,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묶어 '4과(Quadrivium)'로 정의하며 학문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학파의 비밀주의로 인해 많은 업적이 피타고라스 한 사람의 이름으로 귀속되었으며, 정수비의 진리를 훼손하는 무리수의 발견을 인정하지 않고 히파수스를 박해하고 처단한 것은 과학적 진실을 교조적으로 억압한 큰 과실로 남아있다.

또 학파의 귀족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적 경향은 결국 대중의 반감을 샀고, 이는 학교 건물의 파괴와 학파의 해산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했다.

결론적으로,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우주의 언어로 정의하고, 음악과 천문학, 철학을 수라는 매듭으로 묶어 서양 지성사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 위대한 사상가이자, 동시에 엄격한 교조와 비밀주의로 인해 비극적인 스캔들을 남긴 종교적 교주였다.


조화와 균열의 영원한 대화

피타고라스의 일생은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한 조화(Harmony)와 현실 세계의 필연적인 균열(Irrationality) 사이의 영원한 긴장을 보여준다.


피타고라스는 현(絃)의 단순한 정수비(2:1, 3:2, 4:3)에서 우주의 완벽한 질서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 하모니를 통해 인간의 영혼이 정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형태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에서조차 정수비로 표현될 수 없는 무리수가 필연적으로 존재함이 드러났다. 

이는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만물은 수다'라는 이상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증이었다.


우리의 삶 역시 피타고라스의 우주와 같다. 

우리는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완벽한 '정수비의 조화'를 꿈꾸지만, 인간의 복잡한 감정, 예측 불가능한 운명, 그리고 정치적 갈등과 같은 '무리수의 요소'들은 언제나 우리의 계산과 이상을 무너뜨린다.


피타고라스는 이 균열(무리수)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그 균열이 그의 세계를 붕괴시켰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진정한 지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상(Ideal)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혼란과 불완전함(Irrationality)까지도 포용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나가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수학과 철학은 완벽한 진리를 찾았다고 자만하는 순간, 현실의 복잡성에 의해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겸손함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 글은 고대 사료와 현대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장면·대사·심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재구성입니다. 

전승·일화는 [전승], 해석이 갈리는 쟁점은 [논쟁]으로 표기해 맥락을 구분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생애 연대, 이집트·바빌로니아 체류 기간, ‘망치 소리’ 일화, 히파수스 익사 등은 주로 후대 전승에 의존합니다. 

음악 비례(모노코드), 정리의 증명 전통, 크로톤 학파 탄압, 플라톤으로 이어진 사상적 영향은 핵심 논지입니다. 

본문은 학설 간 차이를 단정하지 않으며, 최신 연구에 따라 수정될 수 있습니다.


Set in archaic Greece and Magna Graecia, this narrative follows Pythagoras from Samos through Egypt and Babylonia to Croton, blending attested facts with later traditions. 

It traces his school’s ascetic rules, proof-oriented mathematics, monochord ratios and “all is number,” the “music of the spheres,” the shock of irrational numbers (Hippasus), political backlash in Croton, and a legacy shaping Plato and the mathematical c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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