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식민지: 로어노크 섬의 미스터리
흔적도 없이 사라진 115명의 사람들
1590년 8월, 3년 만에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온 존 화이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포함한 115명의 영국인 정착민이 살던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그를 맞이한 것은 섬뜩한 침묵뿐이었습니다.
전투의 흔적도, 시신 한 구도 없었습니다.
정착민들이 애써 지은 집들은 허물어져 있었지만, 모든 것이 평화롭게 사라진 듯 기묘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 기둥에 선명하게 새겨진 '크로아토안(CROATOAN)'이라는 단어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불가사의한 집단 실종 사건, '사라진 식민지'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과연 115명의 사람들은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요?
1. 신대륙을 향한 꿈: 왜 그들은 머나먼 여정을 떠났나?
16세기 말, 영국은 강력한 경쟁국 스페인을 따라잡기 위해 신대륙에 눈을 돌렸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아래, 영국은 두 가지 큰 야망을 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꿨습니다.
1. 경제적 이익: 신대륙에는 스페인이 독차지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은광과 천연자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영국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확보하여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했습니다.
2. 전략적 요충지: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견제하는 것은 영국의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신대륙에 해상 기지를 건설하면, 스페인의 보물선을 공격하고 해상 무역로를 위협하는 전략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계획의 중심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총애를 받던 탐험가 월터 롤리(Walter Raleigh) 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왕으로부터 식민지 개척에 대한 칙허를 받아 신대륙 탐험과 정착의 선봉에 섰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첫 번째 시도는 희망이 아닌 불안의 씨앗을 남긴 채 막을 내렸습니다.
|
| 월터 롤리 경 |
2. 첫 번째 시도와 불안한 시작 (1585년)
1587년, 115명의 정착민이 사라지기 2년 전인 1585년에 이미 로어노크 섬에는 첫 번째 영국 식민지 개척 시도가 있었습니다.
군인 중심으로 구성된 이 첫 번째 정착민들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실패의 쓴맛을 보고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실패의 원인은 훗날 도착할 두 번째 정착민들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 식량 부족: 영국 본토와 로어노크 섬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보급선이 제때 도착하지 않자 정착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 원주민과의 갈등: 사소한 사건이 파국을 불렀습니다. 원주민 마을에서 은잔 하나가 없어지자, 영국인들은 이를 도난으로 간주하고 마을 전체와 그들의 농작물까지 모두 불태우는 극단적인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인과 일부 원주민 부족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국 첫 정착민들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함대를 만나 영국으로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월터 롤리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15명의 군인들이 섬에 남겨졌고, 이들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처럼 실패와 불신으로 얼룩진 땅에, 새로운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데어 카운티 지역의 로어노크 식민지 |
3. 115명의 새로운 희망, 그리고 존 화이트 (1587년)
첫 번째 시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월터 롤리 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587년, 그는 새로운 115명의 정착민을 신대륙으로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군인들 대신 아내와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 단위의 이주민들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닌, 평화롭고 영구적인 삶의 터전을 만들겠다는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이 두 번째 정착의 여정은 다음과 같은 주요 사건들로 채워졌습니다.
1. 지도자 존 화이트: 원정대의 지도자는 화가이자 롤리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John White)였습니다. 그는 이전 탐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식민지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2. 버지니아 데어의 탄생: 1587년 8월 18일, 존 화이트의 딸 엘레노어는 딸을 낳았습니다. 버지니아 데어(Virginia Dare)라는 이름의 이 아기는 신대륙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인이었고, 정착촌에 큰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3. 예상치 못한 정착: 원래 이들의 목적지는 북쪽의 풍요로운 땅 '체서피크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의 조종사였던 시몬 페르난데스(Simon Fernandes)는 항해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북쪽으로 가는 것을 강요하며 거부했고, 정착민들을 이전의 실패지였던 로어노크 섬에 강제로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역사가 깃든 바로 그곳에 새로운 시작을 해야만 했습니다.
원치 않는 장소에 고립된 정착민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곧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
| 북미에서 탄생환 최초의 잉글랜드계 어린이 버지니아 데어의 세례 |
4. 남겨진 단서, '크로아토안'
결국 식민지의 운명은 지도자 존 화이트의 어깨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펼쳐진 사건의 전말은 한 편의 비극과도 같았습니다.
식량이 바닥나자, 정착민들은 지도자인 존 화이트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보급품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갓 태어난 손녀 버지니아를 섬에 남겨두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1587년 말,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화이트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나라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모든 선박에 출항 금지령을 내렸고, 모든 배는 전쟁을 위해 징발되었습니다.
화이트의 계획은 무참히 좌절되었고, 그의 발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영국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온 1590년 8월 18일, 그날은 바로 손녀 버지니아 데어의 세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재회 대신 그를 맞이한 것은 황량하게 버려진 마을과 섬뜩한 정적이었습니다.
집들은 해체되어 있었지만, 약탈이나 전투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을을 수색하던 화이트는 울타리 기둥에 새겨진 단 하나의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CROATOAN'이었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 만약 위험에 처해 강제로 떠나게 되면 '몰타 십자가' 표시를 함께 남기라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기둥에는 십자가 표시가 없었습니다.
이는 정착민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이주했음을 암시하는 신호였습니다.
|
| 크로아토안 |
'크로아토안'은 인근에 있던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의 이름이자 그들이 사는 섬(현재의 해터라스 섬)의 이름이었습니다.
화이트는 가족과 정착민들이 그곳으로 갔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색을 시작하려던 순간, 거대한 폭풍이 함대를 덮쳤고 배의 닻마저 유실되었습니다.
선장은 더 이상의 항해를 거부했고, 화이트는 눈앞에 가족을 두고도 결국 발길을 돌려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평생 딸과 손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오직 '크로아토안'이라는 단어와 수많은 가설 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5.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사라진 식민지"의 행방을 추적해왔습니다.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여러 정황과 과학적 증거들은 하나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5.1. 가장 유력한 가설: 원주민과의 동화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정착민들이 식량 부족과 고립을 견디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인근의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에게 합류하여 그들의 사회에 동화되었다는 것입니다.
• 명백한 단서, 'CROATOAN': 정착민들이 남긴 '크로아토안'이라는 단어는 당시 영국인들과 우호적이었던 크로아토안족과 그들이 살던 섬(현재 해터라스 섬)을 명확히 가리킵니다. 이는 강제적인 이동이 아닌, 계획된 이주였음을 시사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 역사적 기록: 1709년, 탐험가 존 로슨(John Lawson)은 해터라스 섬을 방문하여 "조상 중에 백인이 있었다"고 말하며 회색 눈을 가진 원주민들을 만났다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책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고 전했는데, 이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영국인들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증언입니다. (전승)
• 고고학적 증거: 최근 해터라스 섬에서 결정적인 증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16세기 유럽식 도자기, 총의 일부, 칼자루 등이 원주민 마을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대장간에서 쇠를 단조할 때만 나오는 미세한 부산물인 '망치 비늘(hammerscale)'의 발견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품 교류를 넘어, 영국인 대장장이가 그곳에 정착하여 활발하게 대장 기술을 사용하며 살았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논쟁)
• 환경적 요인: 기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정착민들이 로어노크 섬에 머물렀던 1587년에서 1589년 사이, 그 지역은 8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었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농사가 불가능해지자, 정착민들은 생존을 위해 식량을 가진 원주민들에게 의탁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5.2. 다른 가설들: 비극적인 최후
원주민과의 동화설 외에도 여러 비극적인 가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명확한 증거가 부족합니다.
• 원주민의 습격: 훗날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영국인들에게 파우하탄 연맹의 족장이 자신이 로어노크 사람들을 몰살시켰다고 주장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어노크 정착지에는 전투나 학살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 이 주장의 신빙성은 낮습니다.
• 스페인의 공격 또는 해상 조난: 당시 영국의 적국이었던 스페인이 공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측 기록에 따르면, 그들 역시 로어노크 식민지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찾아다녔습니다. 또한, 정착민들이 작은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려다 바다에서 조난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5.3. 주요 가설 비교표
두 가지 주요 가설의 핵심 근거와 설득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설
|
핵심 근거
|
설득력
|
|
원주민과의 동화
|
'CROATOAN' 메시지, "책으로 대화"했다는 후대의 목격담, 최신
고고학적 증거(망치 비늘), 극심한 가뭄이라는 환경적 동기
|
높음. 여러 정황과 과학적 증거가 뒷받침됨.
|
|
전멸 (습격/질병 등)
|
파우하탄 족장의 주장
|
낮음. 정착지에 전투나 학살의 고고학적 증거가 전혀 없음.
|
이러한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로어노크의 사람들은 비극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새로운 사회에 합류하는 힘겨운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계속되는 이야기
로어노크 식민지의 이야기는 '사라졌다'는 표현 때문에 비극적인 전멸을 떠올리게 하지만, 최신 연구들은 우리에게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마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원주민 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유력한 가설은 '원주민과의 동화'이지만, 그들의 이름이 적힌 무덤이나 그들이 직접 쓴 기록과 같은 결정적인 '스모킹 건'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로어노크 이야기는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실종 이야기를 넘어,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선택,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냈을 미지의 역사에 대한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어쩌면 그들의 흔적은 지금도 노스캐롤라이나의 어느 땅속에서, 혹은 그 후손들의 DNA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로어노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1587–1590년 로어노크 식민지 실종 사건을 사람들의 선택과 생존에 초점을 맞춰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고고학·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단정이 어려운 대목은 (추정)/(전승)/(논쟁)으로 구분해 표기합니다.
스페인 공격설·전멸설 등은 사료 부족으로 신중히 다루며, 크로아토안(해터라스) 동화설·분할 이주설(Site X) 등 유력 가설을 중심으로 맥락을 설명합니다.
첫 등장 인명·지명은 한영 병기 후 한글 표기를 따릅니다.
사실 오류나 최신 연구 반영이 필요하면 알려 주세요.
신속히 검토·정정하겠습니다.
Roanoke’s “Lost Colony” (1587–1590) vanished before governor John White returned; only CROATOAN was carved on a palisade.
This piece treats the case as a human survival story, balancing evidence and doubt. Most supported: settlers split and assimilated with Native communities—Hatteras/Croatoan and perhaps inland “Site X”—amid drought, war, and supply cuts.
Massacre, Spanish raid, or sea-loss lack proof.
The mystery endures; adaptation remains most plausible.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