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이야기: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한글 창제 과정과 해례본 비밀 (Creation of Hunminjeongeum)


위대한 탄생: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 이야기


1. 소리 내어 읽지 못하는 슬픔

조선이 건국된 지 반세기가 흐른 15세기 중반,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대다수 백성의 삶은 여전히 답답하고 억울한 일투성이였습니다. 

특히 글자를 모르는 설움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어느 장날, 땀 흘려 기른 곡식을 팔러 나온 농부가 관아 앞에 붙은 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농부: "여보게, 저기 뭐라고 쓰여 있는 겐가? 혹시 세금이 또 올랐다는 소식인가?" 

상인: "나라고 별수 있겠나. 까막눈이기는 매한가지지. 좋은 소식은 아닐 거야. 며칠 전에도 글 모르는 김 서방네가 빚문서를 잘못 읽고 땅을 몽땅 빼앗겼다지 않나."


이처럼 당시 조선의 글은 오직 한자뿐이었습니다. 

지배층인 양반과 지식인들은 한자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모든 지식과 정보를 독점했지만, 입으로 쓰는 우리말과 글자로 쓰는 한자가 다른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완벽한 소외계층이었습니다. 

법이 바뀌어도 알 수 없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글로 호소할 길이 막막했습니다.


궁궐 깊은 곳, 젊은 군주 세종은 이러한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밤늦도록 책을 읽고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의 눈에는 글자를 몰라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들의 슬픔이 선명하게 아른거렸습니다. 

깊은 고뇌에 잠긴 그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며 나직이 읊조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소리가 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적을 글자가 없어 백성들이 뜻을 펴지 못하는가. 이 가엾은 이들을 위해 내가 직접 길을 찾아야겠다."


이 고뇌에 찬 다짐은 한 나라의 역사를, 나아가 한 민족의 정신을 뒤바꿀 위대한 창조의 서막을 열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2. 어둠 속의 등불: 비밀리에 시작된 위대한 프로젝트

백성을 어엿비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 세종의 결심은 세 가지 위대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 자주 정신(自主精神):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명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굳건한 의지.

• 애민 정신(愛民精神): 글자를 몰라 억울함을 겪는 "어린 백성(당시의 말로 '어리석은', 오늘날의 '어린'과는 다른 의미)"을 가엾게 여기는,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군주의 따뜻한 마음.

• 실용 정신(實用精神):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게" 하고자 하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추구하는 실학적 태도.


이 거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종은 남몰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깊은 밤, 임금은 집현전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학자들인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을 조용히 편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촛불만이 고요히 타오르는 방 안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세종: "경들을 이리 부른 것은, 나라의 명운을 걸 중차대한 일을 맡기기 위함이오. 나는 이제껏 세상에 없던, 우리 백성만을 위한 새 글자를 만들고자 하오." 

신숙주: (놀라며) "전하! 새 글자라 하심은... 그것은 중화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사옵니다. 수백 년간 한자를 숭상해 온 이 나라의 학문적 근간을 흔드는 일이옵니다." 

세종: "나라고 어찌 그 우려를 모르겠소. 허나, 학문의 근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의 삶이오. 글이 없어 눈과 귀가 막힌 저들을 언제까지 외면해야 한단 말이오? 이것은 왕명을 넘어선 나의 간절한 소망이니, 경들이 과인의 손과 발이 되어주시오!"


당시는 중국의 한자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도전을 넘어, 기존의 세계 질서에 맞서는 대담하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젊은 학자들은 엄청난 부담감과 동시에, 시대를 바꿀 위대한 프로젝트에 동참한다는 벅찬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 등불처럼, 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들려는 비밀 프로젝트는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3. 하늘과 땅과 사람의 소리를 담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

이제 세종과 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깊은 철학을 담은 원리를 탐구했습니다.


3.1. 자음: 발음 기관을 본뜬 소리의 모양

세종은 글자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만들어지는 원리 그 자체에서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는 학자들과 함께 거울을 보며 직접 소리를 내고, 그때의 혀와 입술, 목구멍의 모양을 세밀하게 관찰했습니다.


성삼문: "전하, '그' 하고 소리를 내니 혀뿌리(牙)가 휘어지며 목구멍을 막는 듯한 모양이 되옵니다." 

세종: "옳거니! 바로 그 모양을 본떠 'ㄱ' 을 만들거라. '느' 하고 소리 낼 때 혀끝(舌)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은 'ㄴ' 으로 하고, '므' 할 때의 닫힌 입술(脣) 모양은 'ㅁ' 으로 하자!"


이처럼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뜨는 상형(象形)의 원리를 통해 자음의 기본 다섯 글자 ㄱ(어금닛소리), ㄴ(혓소리), ㅁ(입술소리), ㅅ(잇소리), ㅇ(목구멍소리) 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획(加劃)의 원리, 즉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획을 더하는 규칙을 적용했습니다.


• ㄱ → ㅋ

• ㄴ → ㄷ → ㅌ

• ㅁ → ㅂ → ㅍ

• ㅅ → ㅈ → ㅊ

• ㅇ → ㆆ → ㅎ


이로써 자음 체계는 놀랍도록 체계적이고 직관적인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3.2. 모음: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조화

자음이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면, 모음은 우주 만물의 근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종은 동양 철학의 핵심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 둥근 하늘의 모양을 본뜬 ㆍ (아래아)

• 평평한 땅의 모양을 본뜬 ㅡ

• 바로 서 있는 사람의 모양을 본뜬 ㅣ


이 세 가지 기본 글자는 세상의 전부를 상징했습니다. 

세종은 이 기본 글자들을 블록처럼 조립하여 다른 모든 모음을 만들어냈습니다.


• 초출자(初出字): 기본 글자를 한 번 조합하여 만듦

    ◦ ㆍ + ㅡ → ㅗ (하늘이 땅 위에 있음), ㅜ (하늘이 땅 아래에 있음)

    ◦ ㆍ + ㅣ → ㅏ (하늘이 사람 오른쪽에 있음), ㅓ (하늘이 사람 왼쪽에 있음)

• 재출자(再出字): 초출자에 ㆍ를 다시 조합하여 만듦

    ◦ ㅗ + ㆍ → ㅛ

    ◦ ㅏ + ㆍ → ㅑ

    ◦ ㅜ + ㆍ → ㅠ

    ◦ ㅓ + ㆍ → ㅕ


가장 단순한 철학적 상징으로 무한한 소리의 확장을 이뤄낸 것입니다.


3.3. 음양오행: 우주의 질서를 담은 글자

훈민정음은 단순한 소리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우주의 질서인 음양(陰陽)과 오행(五行) 사상이 깊이 스며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음의 기본 다섯 소리는 각각 오행과 연결되었습니다.


오음(五音)
발음 기관
오행(五行)
기본 글자
아음(牙音)
어금닛소리
木 (나무)
설음(舌音)
혓소리
火 (불)
순음(脣音)
입술소리
土 (흙)
치음(齒音)
잇소리
金 (쇠)
후음(喉音)
목구멍소리
水 (물)


이처럼 훈민정음은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도 그 안에 우주 만물의 이치를 담아낸, 철학과 과학이 완벽하게 조화된 위대한 발명품이었습니다.

마침내 자음 17자와 모음 11자, 총 28개의 글자가 완성되자 세종과 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창조물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남아있었습니다.


4. 거센 바람 앞의 촛불: 창제를 둘러싼 격렬한 반대

1444년 2월, 새로운 문자 창제 소식이 마침내 조정에 알려지자, 보수적인 신하들은 벌집을 쑤신 듯 들고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는 집현전의 수장이자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부제학 최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 학자들을 이끌고 세종 앞에 엎드려 격렬한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최만리: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큰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사대(事大)의 도리를 버리고 오랑캐와 같은 길을 가려 하시나이까!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수백 년간 지켜온 중화의 문명을 저버리는 일이자, 성리학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일이옵니다!"


최만리의 주장은 당시 지배층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자의 권위를 지키고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의 시선은 중국이 아닌, 글자 몰라 고통받는 자신의 백성을 향해 있었습니다.


세종: "경의 충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내가 익히 알고 있소. 허나, 경이 말하는 사대의 도리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내 백성의 편안함이오. 글자를 몰라 제 뜻 하나 제대로 펴지 못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백성을 외면하는 것이 어찌 왕의 도리라 할 수 있겠소? 설총이 만든 이두 또한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이 글자는 백성을 위한 나의 길이며, 조선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길이오. 경들은 더 이상 이 일을 막아서지 마시오."

최만리: "전하! 성현의 글(한자)을 익히고 도리를 깨치는 것은 사대부의 책무이거늘, 어찌 아녀자나 무지렁이들까지 쉽게 글을 깨치게 하여 그 질서를 어지럽히려 하시나이까! 이는 학문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옵니다!"

세종: (노여워하며) "과인의 뜻이 그러할진대, 경들은 어찌 이리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가! 경들이 과연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했단 말이오!"


세종의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그는 최만리를 비롯한 반대파 핵심 인물들을 의금부에 잠시 투옥시키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며, 문자 창제에 대한 흔들림 없는 추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만에 석방되었지만, 뜻을 꺾지 못한 최만리는 결국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습니다.

모든 거센 바람을 이겨낸 촛불처럼, 훈민정음은 마침내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낼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5. 세상에 빛을 비추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반포

1443년 12월에 스물여덟 자의 창제를 마친 후, 약 3년간의 세심한 준비와 검토 기간을 거쳐 마침내 1446년 9월, 조선의 온 백성을 위한 새로운 글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세상에 반포되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 세종은 단순히 글자만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문자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한 '설계도'이자 '매뉴얼'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함께 펴냈습니다. 

이는 세계 문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예의(例義)'로, 세종대왕이 직접 집필하여 문자를 만든 이유를 밝힌 '어제 서문'과 28개 글자의 소릿값, 운용법을 간략히 설명한 부분입니다. 

둘째는 '해례(解例)'로,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집현전 학자들이 '제자해', '초성해' 등 6개 장에 걸쳐 제자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히 해설한 부분입니다.

특히 세종이 직접 쓴 '어제 서문'에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핵심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원문 인용]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Ꮱ 이런 젼ᄎᆞ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몯 ᄒᆞᇙ 노미 하니라. 내 이ᄅᆞᆯ 윙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ᅙᆞᄅᆞᆯ ᄆᆡᄀᆞ노니 사람마다 ᄒᆡᅇᅧ 수ᄫᅵ 니겨 날로 ᄡᅮ메 뼌안킈 ᄒᆞ고져 ᄒᆞᇙ ᄯᆞᄅᆞ미니라."


[현대어]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핵심 의미 풀이]

• 자주 정신: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함.

• 애민 정신: 글자를 몰라 제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을 가엾게 여김.

• 실용 정신: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게 하고자 함.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발명이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고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기까지는 또 다른 기나긴 여정이 필요했습니다.


훈민정음


6. 시대를 넘어 살아 숨 쉬는 글자

반포 초기, 일부 보수적인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상말이나 적는 글)'이라 부르며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글자보다 배우기 쉽다는 장점 덕분에 훈민정음은 여성들과 평민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퍼져나가며 마침내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을 담는 핵심적인 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초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이 '위대한 글'이라는 뜻을 담아 지은 것으로, 그전까지는 훈민정음 혹은 언문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타깝게도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독창적인 창제 원리는 잊혔고, 한글의 기원을 두고 '옛 글자를 모방했다'거나 심지어 '궁궐의 창살 모양을 본떴다'는 등 근거 없는 주장들이 진실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40년, 암흑 같던 일제강점기,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거의 5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위대한 발견은 한글이 발음 기관과 천지인을 본떠 만든,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며 모든 억측을 잠재웠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단순한 옛 책이 아니라, 민족의 과학적, 철학적 정체성을 되찾게 한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독창성과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훈민정음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쓰고 있는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백성을 사랑했던 한 위대한 군주의 고뇌와 결단, 그리고 우주의 원리를 담아내려 했던 학자들의 지혜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체계를 넘어, 소통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창조와 애민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이 위대한 유산을 기억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무일 것입니다.


이 글은 현재까지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실록, 국어학·역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과 인물들의 심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대화 장면과 구체적인 행동 묘사에는 필연적으로 상상과 각색이 섞여 있으며, 실제 역사 기록은 인용된 연도·사건·인물 관계와 창제 원리, 해례본 발견 및 유네스코 등재와 같은 사실 부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글의 창제 정신과 의미를 쉽게 전달하기 위한 ‘역사 교양+스토리텔링’ 형식의 재구성으로 읽어 주시고, 세부 학술 정보는 전문 연구서와 논문을 함께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This article retells the story of Hunminjeongeum, the Korean alphabet, from King Sejong’s compassion for illiterate commoners to the secret project with scholars, the scientific design of consonants and vowels based on speech organs and “heaven–earth–human,” and fierce opposition from conservative elites. 
It then follows the 1446 promulgation, later neglect, the 1940 rediscovery of the Haerye, and UNESCO recognition, arguing that Hangul is both a highly scientific script and a symbol of Sejong’s humane, practical love for his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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