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독립선언서의 저자이자 모순의 노예 소유주 (Thomas Jefferson)


토머스 제퍼슨: 자유의 설계자, 모순의 거인


미국의 정신을 빚어낸 인물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의 주된 기초자, 제3대 대통령,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립자로서 미국 역사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라는 미국의 핵심 가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했던 그는, 평생 60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했던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이기도 했다. 

'자유의 사도'와 '노예 소유주'라는 이 극명한 대비는 그의 삶에 내재된 핵심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이 글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따라가며, 한 인물 안에 공존했던 위대한 업적과 깊은 모순을 함께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한 거인의 복잡한 유산과 그가 미국에 남긴 빛과 그림자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1. 어린 시절과 독립을 향한 여정 (1743–1783)

1.1.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에서 계몽주의 학자로

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버지니아 식민지의 부유한 농장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세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5,00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수십 명의 노예를 상속받으며 일찍부터 남부의 플랜테이션 경제 체제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의 지적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시절이었다. 

그는 윌리엄 스몰 교수로부터 수학, 형이상학, 철학을 배우며 지적 탐구의 길로 들어섰고, 존 로크,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과 같은 영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에 깊은 세례를 받았다. 

훗날 제퍼슨은 이 세 사람을 "세상이 이제까지 만들어낸 3명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칭송하며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대학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772년, 젊은 과부였던 마사 웨일스 스켈턴과 결혼했다. 

이듬해 장인 존 웨일스가 사망하면서 제퍼슨은 135명의 노예와 함께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게 되어, 그의 삶은 노예제와 더욱 깊이 얽히게 되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1.2. 자유를 위한 펜을 들다: 미국 독립 선언

영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제퍼슨은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1차, 제2차 대륙회의의 대표로 활동하며 그는 식민지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대한 요약》(1774)이라는 팜플렛에서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릴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독립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문필가로서의 명성 덕분에, 그는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 포함된 5인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독립선언서의 핵심 초안 작성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계몽사상에 기반하여 인류 보편의 권리를 담은 문서를 완성했다. 

독립선언서는 다음과 같은 불멸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불멸의 문장은 인류 보편의 권리를 선언했지만, 바로 그 선언의 초안에서 노예 무역을 비판했던 조항이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 식민지 대표들의 강력한 반대로 최종본에서 삭제된 것은 건국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비극적 괴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3. 혁명기의 시련: 버지니아 주지사

제퍼슨은 독립전쟁 기간인 1779년부터 1781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는 재임 중 수도를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로 이전하고, 훗날 그의 3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기초를 닦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영광이 아닌 굴욕으로 기억될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1781년, 영국군이 수도 리치먼드를 급습하자 전시 지도자로서 그의 역량은 시험대에 올랐다. 

그는 정부 관리들과 함께 혼란 속에서 도망쳐야 했고, 이 개인적인 실패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낳았으며 그의 정치적 명성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독립 혁명의 중심에서 개인적 시련을 겪었던 제퍼슨은, 이제 막 태어난 신생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더 큰 무대로 나아가게 된다.


2. 신생 국가의 설계자 (1784–1800)

2.1. 프랑스에서의 외교관 생활과 넓어진 시야

1784년,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이를 열렬히 지지하며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혔다.

이 시기 그의 사생활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787년, 그의 어린 딸을 돌보기 위해 14세의 샐리 헤밍스가 파리로 왔다. 

그녀는 제퍼슨의 장인인 존 웨일스가 노예인 베티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제퍼슨의 죽은 아내 마사에게는 이복동생이었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두 사람의 성적인 관계가 이때 시작되어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고 보고 있다.


2.2. 건국의 두 기둥: 해밀턴과의 대립

1789년 귀국한 제퍼슨은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과 신생 국가의 미래를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으며, 이들의 갈등은 미국 초기 정치사의 핵심 축을 이루었다. 

두 사람의 비전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대비되었다.


구분
토머스 제퍼슨 (민주공화당)
알렉산더 해밀턴 (연방주의)
이상 국가
농업 중심의 공화국, 자작농이 미덕의 근원
상공업과 금융 중심의 강력한 중앙 국가
정부 형태
강력한 주 정부, 제한된 연방 정부
강력한 연방 정부
헌법 해석
엄격한 해석 (문자 그대로)
광범위한 해석 (묵시적 권한 인정)
외교 정책
친(親)프랑스
친(親)영국


이들의 대립과 타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790년의 타협'이다. 

제퍼슨은 독립전쟁 당시 각 주가 진 빚을 연방정부가 일괄 상환하자는 해밀턴의 재정 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해밀턴은 새로운 수도를 남부 버지니아 근처(현재의 워싱턴 D.C.)에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는 대가로 제퍼슨과 남부 의원들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2.3. 대통령을 향한 길

국무장관직을 사임한 제퍼슨은 1796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존 애덤스에게 패배하고, 당시 선거법에 따라 2위 득표자로서 부통령이 되었다. 

그는 애덤스 행정부 내내 대통령의 정책, 특히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된 '외국인 및 선동법'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정적 관계를 이어갔다.


1800년 대통령 선거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 중 하나였다. 

제퍼슨과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에런 버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정확히 73표로 동률을 기록했다. 

대통령 결정권은 하원으로 넘어갔고, 35번의 투표에도 승자가 가려지지 않는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이때 연방주의자의 거두이자 제퍼슨의 오랜 정적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에런 버를 제퍼슨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연방주의자 의원들을 설득하여 36번째 투표에서 제퍼슨을 지지하도록 했다. 

이 아이러니한 도움으로 제퍼슨은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적인 해밀턴의 아이러니한 도움으로 험난한 과정 끝에 대통령이 된 제퍼슨은, 이제 자신이 꿈꾸던 국가의 모습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3.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영토 확장과 원칙의 시험 (1801–1809)

3.1. 영토 두 배 확장: 루이지애나 매입

토머스 제퍼슨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은 단연 루이지애나 매입이다. 

1803년, 그는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활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단돈 1,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 결정으로 미국 영토는 하룻밤 사이에 두 배로 넓어졌고, 서부 개척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이 결정은 제퍼슨에게 깊은 고뇌를 안겨주었다. 

대통령이 외국 영토를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에, '헌법의 엄격한 해석'을 주장해 온 자신의 정치적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 자신의 원칙을 잠시 접어두고 상원의 조약 비준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국가의 미래라는 '더 큰 선'을 위해 자신의 핵심 원칙을 기꺼이 유연하게 적용했던 이 현실주의적 면모는, 훗날 그가 노예제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경제적 현실 논리 속에서 외면하는 모습과 비극적으로 중첩된다.

영토 매입 후, 제퍼슨은 자신의 비서였던 메리웨더 루이스와 군인 윌리엄 클라크가 이끄는 탐험대를 파견하여 새롭게 얻은 미지의 땅을 탐사하고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도록 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3.2. 대통령의 권한: 원칙의 시험대

대통령으로서의 8년은 제퍼슨의 원칙이 현실의 시험대에 오르는 시간이었다. 

그는 다양한 국내외 문제에 직면하며 신생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1. 제1차 바르바리 전쟁 : 국가 주권의 시험 

지중해 연안의 바르바리 해적 국가들이 미국 상선 보호의 대가로 공물을 요구하자, 제퍼슨은 이를 거부하고 신생 해군을 파견하여 해적들을 소탕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오랜 관행에 도전하고,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주권과 위상을 확립하려는 그의 결단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 노예 수입 금지법 서명 : 도덕적 신념의 시험 

1807년, 그는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수입하는 국제 노예 무역을 연방법으로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중요한 진전이었으나, 미국 내에서 이미 존재하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거나 국내에서의 노예 거래를 막지는 못한, 그의 도덕적 신념이 현실 앞에서 절반의 성공에 그친 사례였다.


3. 통상금지법: 경제 이론의 시험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선박을 나포하자, 제퍼슨은 모든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유럽 국가들에 압력을 가하려던 이 법은 오히려 미국 경제, 특히 뉴잉글랜드의 무역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그의 경제 이론이 현실에서 참담하게 실패했음을 증명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 몬티첼로로 돌아갔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복잡하고 논쟁적인 유산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다.


4. 몬티첼로의 성인(聖人)과 그의 그림자

4.1. 퇴임 후의 삶과 지적 유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제퍼슨은 고향 몬티첼로에서 '몬티첼로의 성인'이라 불리며 지적 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마지막 열정은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에 쏟아졌다. 

그는 직접 대학의 교정을 설계하고, 특정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구상했다. 

교회 대신 도서관을 캠퍼스의 중심에 둔 그의 설계는 정교분리와 지식의 가치에 대한 그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스스로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는 자신의 묘비명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미국 제3대 대통령'이라는 화려한 직함을 제외하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업적만을 기록해달라고 유언했다.


1.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

2.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3.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182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에, 그는 오랜 정적이자 말년의 친구였던 존 애덤스와 같은 날 세상을 떠나는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3가지의 흔적만이 적힌 묘비


4.2. 그림자 1: 노예제의 모순

제퍼슨의 위대한 지적 유산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는 평생에 걸쳐 600명이 넘는 흑인 노예를 소유했으며, 생전에 단 두 명을 해방시켰고, 유언을 통해 다섯 명을 추가로 해방시킨 것이 전부였다.

그는 노예제를 "늑대의 귀를 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잡고 있기도 위험하고 놓을 수도 없다"고 표현하며 그 비도덕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부채와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저서 《버지니아 주에 관한 비망록》에서는 흑인이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인종적 편견을 드러냈는데, 이는 그가 주창한 '평등'의 이상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러한 모순은 한 방문객이 몬티첼로의 한 하인이 제퍼슨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고 기록할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4.3. 그림자 2: 샐리 헤밍스와 '그림자 가족'

제퍼슨의 삶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그의 노예였던 샐리 헤밍스와의 관계이다. 

그녀는 제퍼슨의 죽은 아내 마사의 이복동생이기도 했다. 

아내 사후, 제퍼슨이 샐리 헤밍스와 수십 년간 관계를 맺고 여러 명의 자녀를 낳았다는 주장은 200년 가까이 논쟁의 대상이었다.

1998년 Y-DNA 검사를 통해 헤밍스의 후손이 제퍼슨 가문 남성계 혈통임이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검사는 토머스 제퍼슨 개인을 아버지로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제기된 제퍼슨의 조카들(카 가문)이 아버지일 것이라는 가설을 결정적으로 반증했다. 

이 과학적 증거와 압도적인 정황 및 역사적 증거들을 종합하여, 오늘날 토머스 제퍼슨 재단을 포함한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제퍼슨이 샐리 헤밍스 자녀들의 아버지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 헤리티지 소사이어티(TJHS)와 같은 일부 단체는 제퍼슨의 다른 남자 친척이 아버지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여전히 이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이 논쟁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제퍼슨은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자녀를 사실상 모두 해방시켜주었다(두 명은 도망을 묵인했고, 두 명은 유언으로 해방)

이들은 몬티첼로에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유를 얻은 유일한 노예 가족이었으며, 이 사실은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로 여겨진다.

이처럼 제퍼슨의 삶은 위대한 이상과 어두운 현실이 공존하는 복잡한 모습이었으며, 그의 유산 또한 오늘날까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샐리 헤밍스의 상상화


5. 미국에 남겨진 빛과 어둠

토머스 제퍼슨의 유산은 미국에 남겨진 빛과 어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미국과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빛으로서 그가 독립선언서를 통해 제시한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의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이상이 되었다. 

또한 정교분리 원칙을 확립하고 공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 그의 노력은 현대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어둠으로서 그가 꿈꾼 '자유의 제국'은 노예제라는 근본적인 모순 위에 세워졌다. 

그는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면서도 평생 노예 소유주로 남았고, 인종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는 이후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깊고 긴 그림자를 남겼다.

결론적으로 토머스 제퍼슨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이상가이자, 동시에 시대의 한계와 개인적 모순에 갇힌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완벽한 영웅이나 위선적인 악당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현재 진행형의 과제이다.


이 글은 토머스 제퍼슨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되, 주요 연대와 사실 관계는 사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일부 장면·심리·표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서사적 각색을 가볍게 더했습니다.
노예제·인종 문제처럼 학계에서 논쟁이 남아 있는 부분은 여러 해석 중 대표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했으며, 단정하기 어려운 지점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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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traces the life and legacy of Thomas Jefferson, chief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ird U.S. President, and found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It follows his rise from Virginia planter to architect of American democracy, shaped by Enlightenment ideas and battles with Alexander Hamilton. 
It also confronts the paradox of a champion of liberty who kept enslaved people, including Sally Hemings, and how his ideals and contradictions still shape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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