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약속, 유상철 (柳想鐵)의 투혼
태동과 숨겨진 그림자 (1971년 ~ 1993년)
1971년 10월 18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당시 서대문구 응암동이었으나 현재는 은평구에 속함)의 한 가정에서 유상철(柳想鐵)이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내성적이고 말이 적은 성격 때문에 일찍이 '유비(劉備,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별명은 후일 그의 온화함과 강한 리더십이 재조명되면서 더욱 굳어졌다.
어린 시절 유상철은 응암초등학교(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처음 포지션은 윙어였다가 미드필더로 옮겨갔고, 경신중학교(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사립 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를 거치며 축구 명문 코스를 밟았다.
이 시절은 한국 축구가 기술보다는 무작정 뛰는 지구력과 투박한 힘을 중시하던 시대적 한계가 존재했다.
유상철 역시 강력한 체력과 몸싸움이라는 강점을 키워나갔지만, 이 시대의 대부분 한국 선수들이 그랬듯 퍼스트 터치를 포함한 전반적인 기본기는 투박하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다.
성장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픔은 가족사였다.
1992년, 유상철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누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갓 스무 살이 넘은 청년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지탱해준 것은 가족, 특히 어머니 이명희 여사였다.
유상철은 건국대학교(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에 위치한 사립 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해 학업과 축구를 병행했고, 이 시기에 평생의 동반자 최희선을 만나 1997년에 결혼하게 된다.
유상철의 축구 인생을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하고 고독했던 비밀은 바로 왼쪽 눈의 실명(失明)이었다.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실상 실명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감독도, 동료 선수도, 심지어 가족에게까지도 이 고통을 숨겼다.
한쪽 눈의 실명이라는 신체적 핸디캡은 축구 선수에게 치명적이다.
공의 속도와 위치, 공간 인지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상철은 이 약점을 숨기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백 배 더 노력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어느 날, 어머니 이명희(어머니, 훗날 췌장암으로 유상철보다 먼저 별세) 여사가 아들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유상철은 훈련장에서 돌아온 후 늘 눈을 비비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불안함을 느꼈고, 결국 그 사실을 알아냈다.
어머니 이명희: "상철아, 너... 정말 괜찮은 거니? 네 눈 말이다."
유상철은 고개를 떨구었다.
평생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그였지만, 어머니의 눈빛 앞에서 숨길 수 없었다.
유상철: (떨리는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어머니. 오른쪽 눈이 있으니..."
어머니 이명희: "무슨 소리냐. 네 청춘이 달린 일인데! 네가 이룬 모든 것이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을지 생각하면... 차라리 내 한쪽 눈을 너에게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의 눈물 어린 말씀은 유상철이 포기하지 않고 '인간 승리자'로 거듭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실명을 숨기고도 199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미국 버팔로에서 열린 국제 대학 스포츠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94년 드래프트 1순위로 울산 현대(울산 HD FC, 유상철이 프로 생활 대부분을 보낸 K리그 팀)에 입단하며 프로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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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현대 입단 |
멀티플레이어의 탄생과 유럽의 꿈 (1994년 ~ 2001년)
프로 데뷔 직후, 유상철의 진짜 시험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울산 현대를 이끌던 차범근 감독은 미드필더인 유상철에게 오른쪽 수비수, 즉 윙백을 맡겼다.
1994년 데뷔 시즌에 그는 26경기에 출전해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수비수 포지션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유상철의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은 처음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여러 포지션을 맡다 보니 팀 내 주전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일부 축구계 인사들은 그를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어정쩡한 선수"라며 비판했다.
유상철이 등장할 당시 한국 축구는 포지션의 전문화가 부족했다.
유상철의 다재다능함은 이후 히딩크 감독 체제에서 전술적 자산이 되지만, 그전까지는 '전문성 부족'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졌었다.
울산 코치: "유상철, 넌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수비를 하랬더니 자꾸 골문에 집착하고, 미드필더를 시키면 뒤로 처져. 한 가지만 제대로 파야지!"
유상철: (속으로 다짐하며) 나는 축구선수로서 최고가 되고 싶다. 포지션이 문제가 아니다. 팀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뛸 수 있다.
그는 뛰어난 체력과 중거리 슈팅, 몸싸움 능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활약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성장했다.
1996년과 2005년에는 울산의 K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98년에는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어 14골 3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그는 수비수(1994년)와 미드필더(1998년) 포지션으로 모두 K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존재감도 커졌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아시아 종합 스포츠 대회) 8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짜릿한 동점골을 터뜨리며 팀의 역전승을 이끌었고,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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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대표시절의 유상철 |
1998년 프랑스 월드컵(FIFA 월드컵)은 그에게 쓰라린 경험과 함께 월드컵 데뷔골을 안겨주었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이 5-0 대참패를 당하자, 당시 차범근 감독(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맞이한 조별리그 마지막 벨기에전(벨기에와의 경기, 파리에서 열림)에서 유상철은 후반 26분 하석주(당시 대표팀 동료)의 프리킥을 받아 투혼의 헤딩 동점골을 기록했다.
이 골은 한국이 월드컵 최하위를 면하고 1무라는 승점을 따내는 유일한 성과였다.
월드컵 이후, 유상철은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1999년 일본 J리그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J리그 명문 구단)로 이적했다.
초반 두 시즌 동안 44경기에서 24골을 넣는 절정의 골 감각을 보여주며 일본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이 시기, 축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문이 돌았다.
바로 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의 세계적인 명문 구단) 이적설이었다.
1998년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루이 판 할(네덜란드 출신 명장)은 유상철 테스트를 원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축구계의 가장 큰 문제는 유럽 진출의 어려움이었다.
국내 구단들은 이적을 '국부 유출'로 보았고, 선수들의 몸값이 지나치게 높았다.
게다가 유럽 팀들은 남미나 동남아시아 선수들에게는 낮은 이적료를 제시했지만, 한국 선수들에게는 거액을 요구하며 입단 테스트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로 인해 재능 있는 선수들의 유럽 진출이 좌절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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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셀로나 이적설 |
유상철은 즉시 영입이 아닌 입단 테스트라는 점에 자존심이 상해 스스로 거부했으며(논쟁), 에이전트(선수와 구단을 연결하는 대리인) 간의 의사소통 문제도 겹쳤다.
훗날 그의 아내는 이천수의 유튜브를 통해 "이적이 확정된 상황이었지만 에이전트끼리의 문제로 막판에 뒤집어졌다"고 증언하며 이적설이 사실에 가까웠음을 밝혔다.
유상철: "테스트라니, 내가 겨우 그 정도 선수인가? 나는 이미 K리그 득점왕에 월드컵 골까지 넣었다. 당당하게 영입 제안을 받아야지."
결국 유럽 진출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는 2001년 가시와 레이솔(J리그 팀)로 이적해 홍명보(당시 한국 축구의 상징적인 수비수), 황선홍(당시 한국 축구의 대표 공격수)과 함께 '한국인 삼인방'을 구축하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2002 월드컵 신화와 투쟁의 기록 (2002년 ~ 2006년)
2002년 한일 월드컵(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FIFA 월드컵)은 유상철의 축구 인생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분기점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 출신, 2002년 한국 대표팀 감독)은 유상철의 다재다능함을 높이 평가했다.
히딩크는 유상철을 골키퍼를 제외한 9개의 포지션을 소화하는 '전천후 만능형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중용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체력과 기본기 부족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특히 유상철과 같은 멀티플레이어는 전술 변화의 핵심이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에는 부족했던 '전술적 유연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2002년 6월 4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전(월드컵 H조 예선 경기).
한국은 전반 황선홍의 골로 1-0 리드를 잡고 있었다.
후반 15분, 유상철은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강력한 오른발 중거리 슛을 성공시키며 승부에 쐐기를 박는 추가골(2-0)을 기록했다.
이 골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첫 승리를 안겨준 골이었다.
중계 해설: "들어갑니다! 유상철! 우리의 유상철! 믿기지 않는 중거리포입니다! 우리의 월드컵 첫 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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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전 유상철의 골 |
유상철의 투쟁심과 강인함은 토너먼트에서 더욱 빛났다.
특히 16강 이탈리아전(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6강전)은 그의 유틸리티 플레이 능력이 극대화된 경기였다.
유상철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으나, 히딩크 감독이 수비수 세 명을 빼고 공격수 세 명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자, 유상철은 중앙 미드필더에서 백3의 좌측 스토퍼로, 홍명보(당시 대표팀 주장)가 빠진 후에는 백4의 중앙 수비수까지 소화했다.
홍명보(대표팀 수비의 핵): "유상철, 네가 중앙을 맡아줘야 한다. 빌드업은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될 거다. 하지만 수비 안정은 네 몫이다!"
유상철: (숨을 헐떡이며) "알겠습니다, 형님. 제 자리입니다." (유상철의 전술 이해도와 체력이 팀을 지탱하는 핵심 이유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이탈리아의 공격수)의 팔꿈치 공격에 맞고 코뼈가 부러진 김태영(당시 대표팀 수비수)에게 일본 인맥을 통해 구한 '타이거 마스크'를 건네주는 등, 동료를 챙기는 따뜻한 '유비'의 모습과 그라운드 위에서는 격렬하게 싸우는 투사(鬪士)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전승)
결국 대한민국은 4강 신화를 달성했고, 유상철은 미드필더 부문에서 FIFA 월드컵 올스타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그의 강한 승부욕은 때때로 논란을 낳기도 했다.
2003년 K리그 복귀 후, 부산 아이콘스(현 부산 아이파크)의 이장관(당시 부산 수비수)의 백태클에 격분하여 주먹다짐을 벌여 5경기 출전 정지와 벌금을 물었다.
또한 2004년 요코하마 시절, ACL 경기에서 성남의 서혁수에게 비신사적인 보복 행위를 하다가 경고를 받기도 했다.
유상철은 평소 온화하고 세심한 성격이었지만, 승부의 세계에서는 이처럼 극렬한 투쟁심을 드러냈다.
이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극도의 압박 상황과 선수 생활의 고독함(특히 실명 비밀) 속에서 폭발적으로 표출된 인간적 갈등의 단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2002년 월드컵 이후 국내 무대에 복귀한 그는 인터뷰에서 "남은 경기 전승과 경기당 1골"을 공언했고, 실제로 8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며 약속을 지켰다.
특히 마지막 경기에서는 스트라이커로 나와 헤딩으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선수 은퇴를 앞둔 2005년, 울산 현대에 재복귀하여 K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2006년 3월 12일 상무와의 홈 개막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당시 그는 비로소 왼쪽 눈이 실명 상태였음을 대중에게 고백하며, 그의 축구 인생이 얼마나 고독하고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지도자의 길, 마지막 약속 (2009년 ~ 2021년)
현역 은퇴 후 유상철은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FIFA 월드컵)에서는 KBS 해설을 맡았고, 이후 예능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어린이 축구 육성 프로그램) 3기부터 5기까지 감독을 맡으며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섰다.
이때 그의 지도를 받았던 7살짜리 축구 신동이 바로 현재 한국 축구의 미래로 불리는 이강인(PSG, 당시 7세)이었다.
유상철은 이강인을 "어렸을 때부터 기술적으로 완성된 선수"라며 세계적 유망주가 될 것을 예견하는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었다.
이강인은 훗날 유상철의 사망 소식에 "그때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축구 인생의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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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상철과 어린 '슛돌이'이강인 |
유소년 축구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유상철은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공업 고등학교) 축구부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프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당시 대전 시티즌(현 대전 하나 시티즌, K리그 팀)은 승부조작 사태(K리그를 뒤흔든 사회적 논란)로 인해 팀 분위기가 극도로 어수선했다.
유상철은 어수선한 팀을 추슬러 K리그 최하위를 면하게 했지만, 2012년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이후 울산대학교(울산광역시에 위치한 사립 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거쳐, 2018년에는 전남 드래곤즈(K리그 팀)의 감독으로 K리그에 복귀했으나, 성적 부진(팀이 강등권까지 떨어짐)의 책임을 지고 8개월 만에 사퇴하는 아픔을 겪었다.
2019년 5월 14일, 그는 다시 한번 프로 무대, 인천 유나이티드(K리그 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인천은 당시 K리그 1 잔류가 위태로운 강등 위기에 몰려 있었다.
유상철은 팀의 잔류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중순, 그의 몸에 황달 증세(피부와 눈이 노랗게 변하는 증상, 췌장암의 주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정밀 검사 결과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췌장암 4기였다.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생존율이 매우 낮은 악성 종양이다.
유상철의 경우, 어머니 이명희 여사 역시 췌장암으로 2020년 3월 사망했기에, 이는 유전적인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상철은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자, 2019년 11월 20일 직접 팬들에게 편지를 공개하며 병명을 밝혔다.
유상철 (편지): "이는 분명 저에게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진단이었지만 저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저는 선수들과 팀에게 피해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남 원정(성남 FC와의 원정 경기)을 마치고 병원에 가기 전 선수들에게 "빨리 치료를 마치고서 그라운드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1차 치료를 마친 후 약속대로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유상철: "나는 약속을 지켰다. 병원에 있으면서도 역시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는 걸 느꼈다."
팬들은 그의 투병 소식에 '마지막 약속도 꼭 지켜달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유상철은 "어떤 기적이 나올지 모르지만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항암 치료(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화학적 치료)를 병행하면서도 끝까지 벤치를 지키며 인천을 이끌었다.
2019년 시즌 최종전, 인천은 강등권 경쟁팀인 경남 FC와 비기며 극적으로 K리그 1 잔류를 확정했다.
팬들과 선수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독에게 감사와 쾌유의 염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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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축구팬들의 응원 |
이후 유상철은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2020년 1월 2일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인천 구단은 그를 명예 감독으로 임명했다.
병세가 호전되어 복귀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았으나, 2021년 1월, 췌장에 남아있던 암세포가 뇌로 전이되면서(뇌압 상승)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이마저도 이겨내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지만, 병마는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2021년 6월 7일 오후 7시 20분, 유상철은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서울아산병원(대형 종합 병원)에서 향년 49세(한국 나이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부인 최희선, 딸 다빈, 두 아들 선우, 성훈)의 뜻에 따라 장례는 비공개 축구인장으로 치러졌으며, 황선홍, 김병지, 최진철 등 2002 월드컵 동료들을 비롯한 많은 축구인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의 유해는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의 진달래메모리얼파크에 2020년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곁에 안장되었다.
유상철은 월드컵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먼저 고인이 되었기에, 많은 이들의 아쉬움과 애도를 받았다.
유상철은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로 평가받는다.
그의 별세 소식에 축구 동료뿐 아니라 정치인, 연예인, 시민, 그리고 일본인까지 추모 물결에 동참했다.
FIFA(국제 축구 연맹)는 "한 번 월드컵 영웅은 언제나 월드컵 영웅"이라며 애도를 표했고, 2025년에는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호명되었다.
그의 투병과 인천 잔류 드라마는 축구 팬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않는 투혼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유가족의 동의 하에 그의 생전 모습과 목소리를 재연한 AI 응원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스포츠 영웅을 넘어, 기술과 인류애가 결합된 문화적 아이콘으로 남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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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투쟁이 남긴 공동체의 자긍심
유상철의 일생은 한 선수가 짊어져야 했던 고독한 짐과, 그 고독을 극복했을 때 공동체에 선사할 수 있는 기적의 가치를 웅변한다.
그는 왼쪽 눈의 실명이라는 치명적인 비밀을 평생 숨겼다.
그의 다재다능함, 끝없는 활동량, 그리고 지치지 않는 투쟁심은 타고난 재능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두 배, 세 배 더 치열하게 응시해야 했던 한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만약 유상철이 자신의 장애를 세상에 공개했다면, 그는 아마도 그토록 오랜 시간 선수 생활을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선택했고, 그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간의 잠재력과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증명해냈다.
그의 축구 커리어는 끝없는 변화와 적응의 연속이었다.
수비수로 시작해 득점왕까지 차지하고, 히딩크호에서는 전술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쓰임을 창조해내는 주체성의 발현이었다.
그는 "어떤 포지션에서 최고가 되기보다는 축구선수로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고 자평했는데, 이는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전인적인 완성도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말년의 췌장암 투병은 또 한 번의 처절한 고독한 싸움이었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강등 위기에 처한 팀을 잔류시키겠다는 ‘마지막 약속’을 지켜냈다.
이 마지막 약속은 단순히 팀을 구한 것을 넘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려 했던 한 인간의 강력한 긍정의 힘이자, 삶을 대하는 투혼이었다.
우리는 유상철의 삶을 통해 배운다.
고독한 개인의 희생과 숨겨진 노력이 때로는 가장 위대한 공동체의 자긍심과 연결된다는 것을.
그의 땀방울은 단지 경기장의 승패를 넘어, 우리 모두가 삶의 위기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슬픔만이 남은 것이 아니다.
강한 승부욕과 온화한 성품,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읽어냈던 그의 투혼의 잔상(殘像)이 남아, 후대의 축구 팬들과 청년들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이 될 것이다.
이 글은 공개 보도·기록·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서사를 재구성했습니다.
필요 시 일부 장면·대사를 극적으로 각색했으며, 불확실하거나 전승에 가까운 부분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논쟁)으로 표기합니다.
인물·지명·용어는 최초 1회 한영 병기하고, 민감한 가족사·개인 정보는 공개 자료 범위 내에서만 서술합니다.
오류 제보 시 신속히 정정합니다.
Yu Sang-chul (1971–2021) became Korea’s ultimate utility footballer, shining for Ulsan, Yokohama, and the national team, scoring vs Poland at the 2002 World Cup and filling any role the team needed.
Quietly coping with near-blindness in one eye, he later coached and led Incheon’s dramatic 2019 survival.
Diagnosed with stage-4 pancreatic cancer, he kept his “last promise” to return to the bench.
He died in 2021, leaving a legacy of grit, leadership, a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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