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랑크의 창업군주: 대머리왕 샤를 2세의 격동의 시대 (843–877)
1부. 왕관의 무게: 막내아들의 비운과 유산 분쟁
823년 6월,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의 손자이자 서방 황제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Ludovicus I Pius)의 넷째 아들로 샤를(Charles)이 태어났다.
이 늦둥이는 이미 제국의 영토를 나눈 세 이복형 (로타르 1세, 피핀, 그리고 독일왕 루트비히)의 경계심 속에서 자라났다.
노년의 황제는 막내아들에게도 합당한 몫을 주려 했고, 이로 인해 제국의 평화는 깨졌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는 샤를에게 아키텐(Aquitaine)과 남부 프랑크의 땅을 물려주려 했으나, 이는 형제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로타르 1세 (이복형): "아버지의 결정은 제국을 사적으로 분할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우리는 막내 동생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카롤링거 제국의 질서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샤를은 어린 나이부터 이복형들과의 내전에 휘말렸다.
그가 후대에 '대머리왕 샤를(Charles le Chauve)'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 시절의 비극 때문이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 물려받을 영토(regnum)가 없었으며, 이 '머리가 없다'는 의미가 후대에는 대머리라는 뜻으로 와전되었다. (전승/해석)
840년,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가 세상을 떠나자, 로타르 1세는 황제로서 전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샤를은 즉시 동프랑크의 왕인 독일왕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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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 2세 |
2부. 스트라스부르 서약: 두 언어의 결별 선언
로타르 1세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기 위해, 샤를 2세와 독일왕 루트비히는 군사적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해야 했다.
842년 2월, 그들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교환된 맹세, 즉 스트라스부르 서약(Oaths of Strasbourg)은 단순한 동맹 이상이었다.
이는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라는 두 언어권의 정치적 분리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맹세는 병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어가 아닌 지방 언어로 낭독되었다.
샤를 2세는 루트비히의 병사들을 위해 고대 고지 독일어(Old High German)로, 루트비히는 샤를의 병사들을 위해 원시 프랑스어(로망스어, Romance Language)로 맹세했다.
※수백 년 동안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결국 '로망스'라는 단어는 "로마식 언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비현실적이거나 이상화된 사랑과 모험을 다루는 장르"라는 뜻으로 굳어졌습니다.
루트비히 독일왕 (원시 프랑스어로 맹세): "Deo amur et pro christian poblo et nostro commun salvament..." (신과 그리스도 백성, 그리고 우리의 공동 구원을 위하여, 오늘부터 짐은 신이 주신 지혜와 힘으로, 나의 형제 샤를을 모든 면에서 구원할 것이다.)
이 맹세는 후일 프랑스어의 시초가 된 로망스어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았으며, 카롤링거 제국의 문화적 분열이 이미 심화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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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프랑크에서 카를 2세에 의해 작성된 사본 |
3부. 베르됭 조약과 서프랑크의 시련
연합군에 패배한 로타르 1세는 결국 화해를 택했다.
843년, 세 형제는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을 체결하고 제국을 세 부분으로 나눴다.
로타르 1세: 중프랑크 왕국 및 황제 칭호.
독일왕 루트비히: 동프랑크 왕국 (후일 독일의 모태).
샤를 2세: 서프랑크 왕국(West Francia), 론 강 서쪽의 로망스어 사용 지역 (후일 프랑스의 모태).
샤를 2세는 마침내 정식 왕위를 얻었지만, 그의 왕국은 불안정했다.
지방의 대규모 귀족들(Grandees)은 왕권에 불복하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샤를은 이들의 도전을 교회의 지지 확보와 문화 부흥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그는 학자들을 후원하며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계승했고, 주교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자신의 왕권을 신의 권위 아래 두었다.
샤를 2세: "(주교들에게) 짐은 신께서 이 서쪽 땅에 세우신 통치자이다. 그대들의 도움으로 짐은 귀족들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이 땅에 법과 정의를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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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롤링거 왕국의 최대 판도, 843년 세 부분으로 나뉘는 지도. |
4부. 바이킹의 공포: 피스트르 칙령
샤를 2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위협은 북방에서 몰려온 바이킹(Norsemen)이었다.
9세기 중반부터 이들은 드라카르(Drakkar)를 타고 센 강과 루아르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프랑크의 중심부를 휩쓸었다.
845년에는 전설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바이킹 대함대가 수도 파리를 포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샤를 2세는 굴욕적으로 막대한 양의 은화, 즉 데인겔트(Danegeld, 공물)를 지급하고서야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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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킹의 공격: 센 강을 항해하다 |
이러한 무력함에 대한 반성으로, 샤를은 국가 방위 시스템을 혁신했다.
864년, 그는 피스트르 칙령(Edict of Pistres)을 선포했다.
이 칙령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 강을 따라 영구적인 성채와 요새를 건설하여 바이킹의 내륙 침투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
둘째, 기병대(Cavalry)를 대폭 강화하여 바이킹의 빠른 도주를 막고 추격전을 벌일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샤를 2세 (피스트르 칙령을 선포하며): "우리는 더 이상 약탈자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기병대는 서프랑크의 방패가 될 것이며, 이 땅을 지킬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백작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요새를 구축하고 군비를 확충해야 한다."
이 칙령은 후일 프랑스 기사도(Chivalry)와 봉건 제도의 군사적 근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부. 황제의 종말과 새로운 국가의 유산
샤를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을 안정시키는 한편, 제국 재통합이라는 샤를마뉴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875년, 그는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교황 요한 8세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Holy Roman Emperor)로 즉위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황제의 칭호는 그의 권위를 높여주었으나, 실제로는 감당하기 힘든 외교적, 군사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말년의 그는 동프랑크의 침입과 이탈리아에서의 실패를 겪으며 고난에 처했다.
877년 10월, 샤를 2세는 이탈리아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알프스 산맥의 몽 스니 고개(Mont Cenis) 근처 브리데레벵(Brides-les-Bains)에서 병사했다.
향년 54세였다.
대머리왕 샤를 2세는 비록 내전과 침략으로 얼룩진 격동의 시대에 살았지만, 베르됭 조약을 통해 서프랑크라는 독립된 정치 체제를 확립했고, 피스트르 칙령으로 국가 방위의 초석을 다졌다.
그의 서프랑크 왕국은 후일 프랑스 왕국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카롤링거 제국의 붕괴 속에서 새로운 유럽 국가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은 대머리왕 샤를 2세와 서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실제 사건·연대·인물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구성한 역사 서사 형식의 글입니다.
다만 독자의 몰입을 위해 등장인물의 대사와 심리 묘사, 장면 전개는 문학적으로 각색되어 있으며, 일부 학계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대표적인 견해를 따라 정리했습니다.
학술 논문이 아닌 ‘역사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재미있는 한 편의 시대극을 감상하듯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This article narrates the turbulent life of Charles the Bald, founder of West Francia.
It follows his struggle for inheritance against powerful half-brothers, the Strasbourg Oaths and Verdun Treaty, Viking invasions and the Edict of Pistres, and his late imperial coronation.
Through him, we see how the Carolingian Empire’s breakup birthed medieval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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