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봉인열차’의 진실과 1917년 10월혁명: 4월 테제부터 NEP·유언까지 간단정리 (Vladimir Lenin)


강철의 의지, 역사를 뒤흔든 남자: 블라디미르 레닌


봉인된 열차, 시대를 가르다

1917년 4월, 유럽 대륙이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던 그해 봄,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의 한 플랫폼은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극적인 긴장으로 가득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망명 중이던 47세의 러시아 혁명가가 31명의 동지와 함께 기차에 오르고 있었다. (논쟁)

그들의 목적지는 혁명의 불길이 막 타오르기 시작한 조국, 러시아였다.


이 여정은 단순한 귀국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적국인 독일제국이 자국의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레닌이라는 급진적 혁명의 바이러스를 적국의 심장부로 보내 내부 붕괴를 유도하려는 치밀한 비밀 공작이었다. 

독일 외무부는 이 작전을 위해 현금과 무기를 포함, 약 2,600만 마르크, 현재 가치로 7,500만 유로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볼셰비키에 지원했다.(논쟁/추정)


레닌 일행이 기차에 오르자 플랫폼에 모여 있던 다른 러시아 망명자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독일 스파이! 반역자!" 저주 섞인 고함이 빗발쳤지만, 열차는 묵묵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열차는 훗날 '봉인 열차'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1917년 4월, 레닌이 '봉인열차'로 탔던 열차.


그러나 '봉인'이라는 말은 교묘하게 연출된 한 편의 정치극에 불과했다. 

레닌은 훗날 독일과의 내통 혐의를 부인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탑승한 객차에 국제법상 치외법권을 인정해달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출입구 세 개는 의식처럼 봉인되었다. (논쟁)

하지만 봉인되지 않은 네 번째 출입구는 독일 장교 두 명의 통로로 남겨졌다. 

그들은 경호원이자 연락책으로서 객차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외부 세계와 레닌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유지했다.

훗날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독일은 레닌을 러시아로 보냈다. 마치 장티푸스나 콜레라 배양균이 든 앰풀을 보내는 방식으로." 

한 남자의 귀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거대한 폭풍의 전주곡이었다.


레닌(1920년)


혁명의 씨앗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였다. 

1870년 4월 22일, 그는 제정 러시아의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1887년 카잔대학교 법대에 입학했으나, 그의 반항적 기질은 그를 학문의 길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다.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대학에서 추방당한 그는 이때부터 차르 체제에 대한 저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심취한 그는 러시아 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결국 1900년, 체제의 감시를 피해 해외로 망명한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혁명 이론을 다듬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마침내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자신을 따르는 급진파를 이끌고 '볼셰비키'라는 독자적인 정파를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가 혁명을 꿈꾸던 당시의 러시아는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급속한 산업화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고, 수많은 농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여기에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사회에 결정타를 날렸다. 

수백만 명의 젊은이가 전선에서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도시에서는 "아기에게 먹일 우유와 빵조차 모자라"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1917년 2월, 굶주림과 전쟁에 지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2월 혁명으로 300년간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임시정부와, 노동자와 병사들의 대표 기구인 '소비에트'가 동시에 존재하는 기이한 '이중 권력' 상태가 들어선 것이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려 했고, 민중의 염원이었던 평화와 토지 개혁은 요원했다. 

바로 이 혼돈의 순간, 레닌은 망명지에서 조국의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의 씨앗은 뿌려졌고, 이제 그 씨앗을 거두어들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권력을 향한 투쟁

4월 테제와 당내 갈등

1917년 4월, '봉인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식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명된 이름)의 핀란드역에 도착한 레닌은 자신을 환영하는 인파 앞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외침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제국주의 전쟁 반대!" 

이것이 바로 훗날 '4월 테제'로 불리는 그의 혁명 강령이었다.


4월 테제

그의 주장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동지들조차 충격에 빠뜨렸다. 

한 동료는 "미친 사람의 헛소리다"라고 혹평했고, 이오시프 스탈린과 레프 카메네프를 포함한 볼셰비키 지도부 대다수는 그의 주장에 경악하며 반대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끈질긴 당내 토론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노선이 옳음을 역설했고, 마침내 동지들을 설득하여 당 전체를 자신의 혁명 노선으로 "재무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7월 봉기와 코르닐로프 사건

레닌의 선동에 고무된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7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기상조였던 '7월 봉기'는 임시정부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고, 레닌은 반란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수배령이 내려져 다시 핀란드로 피신해야 하는 위기를 맞았다. 

볼셰비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는 듯 보였다.


핀란드 망명 생활했을 때 변장한 레닌.


그러나 역사는 다시 한번 볼셰비키에게 기회를 주었다. 

8월, 임시정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코르닐로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쿠데타에 직면한 임시정부의 수장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당황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믿지 못하고, 자신이 탄압했던 볼셰비키의 무장 조직 '적위대'에게 무기를 나누어주며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볼셰비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쿠데타 저지에 앞장섰고, 이 사건을 계기로 볼셰비키의 위신과 세력은 급격히 회복되었다.


혁명의 조직

코르닐로프 사건 이후 볼셰비키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마침내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선언을 10대 2로 채택했다. 

봉기를 위한 실질적인 사령부 역할은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산하 '공농혁명위원회'가 맡았다. 

임시정부의 권위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대중 앞에서 담대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권력을 향한 마지막 투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겨울 궁전의 총성

1917년 10월 25일(양력 11월 7일) 새벽,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는 짙은 안개와 혁명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적위대는 레닌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도시의 심장부인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주요 거점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놀랍게도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임시정부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고, 그들을 위해 피를 흘리려는 자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밤 9시 45분, 네바강에 정박해 있던 방호 순양함 '아브로라'호의 함포가 공포탄 한 발을 발사했다.

그 포성은 임시정부 각료들이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던 겨울 궁전을 향한 총공격의 신호였다.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가 이끄는 적위대와 병사들이 궁전으로 쇄도했다.


이날의 사건은 훗날 하나의 신화로 각색되었다. 

1920년 혁명 3주년을 기념해 겨울 궁전 앞에서 상연된 역사 재현 군중극 《겨울 궁전 돌입》을 시작으로, 이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10월> 등에 의해 격렬한 전투 끝에 궁전을 점령한 영웅적 서사로 그려졌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영화보다 훨씬 싱거웠다. 

궁전을 지키던 사관생도와 여성대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투항했고, 궁전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점령되었다.


다음 날 새벽 2시경, 속수무책으로 회의를 계속하던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수장 케렌스키만이 궁전을 탈출하여 망명의 길에 올랐다. 

겨울 궁전의 총성은 그렇게 멎었고, 러시아의 권력은 이제 완전히 볼셰비키의 손에 넘어왔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붉은 제국의 창조와 그림자

권력을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아닌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혁명은 거의 무혈로 끝났지만, 그 직후 러시아는 혁명파(적군)와 반혁명파(백군) 간의 처절한 내전(1917-1922)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레닌은 혁명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독일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기로 결심했다. 

1918년 3월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는 폴란드,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등 막대한 영토와 자원을 독일에 할양했다. 

이는 당내에서도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권력 유지를 위한 레닌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내전 기간 동안 레닌은 '전시공산주의'라는 극단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농산물을 강제로 징발하고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는 정책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농업 생산은 급감했고, 전국은 극심한 기근에 휩싸였다.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1921년, 레닌에게 가장 끔찍한 진실이 닥쳐왔다. 

볼셰비키 혁명의 자랑이자 칼이었던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혁명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총구를 자신들에게 겨누는 이 뼈아픈 배신은 레닌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책이 지지자들마저 굶주림과 반란으로 내몰고 있다는 공포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크론슈타트 발트 함대의 수병들의 모습 깃발엔 "부르주아지에게 죽음을"이라고 쓰여있다


전시공산주의의 파국적 실패를 인정한 레닌은 놀라운 실용주의적 전환을 감행했다. 

1921년, 그는 농민들에게 잉여 생산물의 자유로운 판매를 허용하고 소규모 사기업 활동을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 

레닌 스스로 '일보 후퇴'라고 평한 이 정책 덕분에 파탄 직전이었던 소련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통치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혁명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밀경찰 '체카'는 '적색 테러'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반혁명 세력과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숙청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상 뒤편에는 독재와 폭력이라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유언과 비극적 계승

혁명의 격랑을 헤쳐온 강철의 지도자 레닌의 건강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1918년 저격 사건의 후유증과 과로가 겹쳤고, 1922년 5월 첫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오른쪽 몸이 마비되고 언어능력을 상실했다. 

권좌에서 물러나 요양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24년 1월 21일, 53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근교에서 뇌내출혈로 눈을 감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레닌은 자신의 사후 권력 구도를 깊이 고심했다. 

특히 그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레닌은 스탈린의 무자비한 권력욕과 무례함을 경계하고 있었다. 

결정적 계기는 1922년 말, 스탈린이 레닌의 아내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로 폭언을 퍼부은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병상의 레닌은 격노했다. 

이 개인적인 모욕은 스탈린에 대한 그의 모든 정치적 우려를 확신으로 바꾸었다. 

분노 속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짧은 편지를 보냈고,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의사를 담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즉 '레닌의 유언'을 구술했다. 


레닌의 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이 문서의 추신에서 그는 스탈린에 대한 깊은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스탈린 동지는 서기장이 되어 무제한적인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너무도 무례합니다...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해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반면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지나친 자신감과 행정적인 면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하며, 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 있게 지적했다.


그러나 레닌의 마지막 경고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삼두체제'를 구축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이 유언을 당 중앙위원회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낭독한 뒤 묵살해 버렸다. 

레닌이 가장 우려했던 인물이 그의 후계자가 되는 비극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스탈린(왼쪽)과 트로츠키(오른쪽)


후대의 평가와 교훈

블라디미르 레닌. 

그의 이름 앞에는 극과 극의 평가가 따라붙는다. 

한편에서는 그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여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위대한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칭송받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무자비한 독재와 폭력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비판받는다.

역사 덕후로서 그의 삶을 추적하며, 나는 거대한 이상이 현실의 권력과 만났을 때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목도한다. 

또한, 한 개인의 확고한 신념과 냉철한 결단이 어떻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지를 절감한다. 

레닌의 삶은 우리에게 이상과 현실, 혁명과 권력,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끔찍한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의 거대한 드라마 그 자체이다.


본 글은 1차·2차 사료와 주요 연구서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우선 확인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내면 일부를 소설적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인물·지명·용어는 최초 1회 한·영 병기했고, 불확실하거나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논쟁), 전승·증언 수준은 (전승)으로 표기했습니다. 
경제·이론의 심층 모형보다 ‘레닌이라는 인간의 선택과 균열’에 초점을 맞춰 서사를 전개했습니다.


In 1917 Lenin returned via the “sealed” train, issued the April Theses, and steered Bolsheviks to seize power in October. 
He ended WWI with Brest-Litovsk, won a brutal civil war, and shifted from War Communism to the NEP after famine and revolt. 
The Cheka’s Red Terror scarred his rule. 
Struck by strokes, he dictated the Testament warning against Stalin. 
Lenin remade state and party, leaving a legacy of radical change entwined with rep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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