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이야기로 배우는 세일럼 마녀재판: 무엇이 평범한 마을을 광기로 몰아넣었나?
300년 전 비극의 시작
1692년,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세일럼(Salem)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적인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세일럼 마녀재판'입니다.
이 광기 어린 재판은 약 1년 동안 이어지며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1명은 잔혹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최소 5명이 감옥에서 병으로 사망하는 등 최소 25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녀'라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마을은 불신과 공포의 그림자에 휩싸였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300여 년 전의 낡은 사건 기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평범했던 마을 사람들이 이웃을 '마녀'로 지목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 광기의 이면에는 어떤 불안과 공포가 숨어 있었는지 함께 탐색하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세일럼의 비극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마녀사냥'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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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럼 해안가 풍경, 1770년경~1780 년경 |
1. 모든 것은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마녀재판의 배경
세일럼 마녀재판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뉴잉글랜드 식민지 사회는 마치 마른 장작더미처럼 작은 불씨 하나에도 큰불로 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갈등의 중심에는 지리적, 경제적 분열이 있었습니다.
항구와 가까워 부유한 상업 중심지였던 세일럼 타운(Salem Town)과, 가난한 농업 공동체였던 내륙의 세일럼 빌리지(Salem Village 현재의 매사추세츠주 댄버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고발이 시작된 곳은 바로 이 가난하고 소외된 세일럼 빌리지였습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세 가지 핵심적인 불안 요소가 마을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 정치적 혼란: 1684년,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영국 본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보장받던 왕실 헌장을 박탈당했습니다. 이후 영국과의 관계는 급변했고, 1692년에는 새로운 총독 윌리엄 핍스가 부임하는 등 정치적 리더십이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 사회적 공포: 식민지 개척민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원주민과의 유혈 충돌(윌리엄 왕 전쟁)이 계속되었고, 각종 전염병과 농사 흉작은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공포는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켰습니다.
• 종교적 압박: 세일럼은 매우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청교도 사회였습니다. 청교도들은 모든 불행과 재앙을 '악마'의 소행으로 믿었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박적인 욕구가 강했습니다. 악마는 언제나 공동체를 타락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고 믿었기에, 사람들은 항상 보이지 않는 악의 존재를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불안은 마녀사냥이 일어나기 좋은 토양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세일럼 마녀재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은 여러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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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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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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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갈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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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상업 중심의 세일럼 타운과 가난한 농업 중심의 세일럼 빌리지
간의 갈등, 또는 가문 간의 토지 분쟁이 '마녀 고발'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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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학적 원인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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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이 호밀에 핀 곰팡이균(맥각균)에 중독되어 환각과 발작 증세를
보였거나, 뇌염과 같은 질병을 앓았다는 주장입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악마의 소행'으로 진단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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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히스테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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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종교적 불안감이 극에 달한 사회 구성원들이 특정
집단(마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집단적인 광기에 빠졌다는 심리학적
분석입니다. 식민지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집단 히스테리
사례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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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분열로 이토록 위태로웠던 공동체에서, 재앙이 일어날지 말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작은 불꽃이 이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2. 광기의 불꽃: 사건의 전개와 주요 인물
광기를 점화한 불꽃은 1692년 1월의 차가운 공기 속, 새뮤얼 패리스 목사의 집 안에서 피어올랐습니다.
그의 아홉 살 난 딸 베티와 열한 살 조카 애비게일 윌리엄스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 힘에 홀린 듯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몸을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고, 자신들만 볼 수 있는 환영에 비명을 질렀으며, 마치 악마를 피하려는 듯 가구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의사 윌리엄 그릭스는 아이들의 증상을 진찰한 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자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 진단은 마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어른들은 소녀들을 다그쳐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 실토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결국 소녀들은 세 명의 여성을 '마녀'로 지목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었기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습니다.
• 티투바: 패리스 목사 집안의 서인도 제도 출신 남아메리카 칼리나족 노예 여성이었습니다. 인종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가장 먼저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세라 굿: 마을에서 구걸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여성이었습니다.
• 세라 오즈번: 오랫동안 병을 앓아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노파였습니다.
재판 과정은 처음부터 비상식적이었습니다.
특히 재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령 증거(Spectral Evidence)'를 공식적인 증거로 채택했다는 점입니다.
유령 증거(Spectral Evidence) 상상해 보세요.
마을의 누군가가 꿈속에서 당신의 유령(당신의 '환영')이 나타나 자신을 해쳤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1692년 세일럼에서는 그 꿈이 법정에서 유효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리적 증거나 다른 목격자는 필요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환영을 봤다는 주장만으로 당신은 마녀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대로 보내질 수 있었습니다.
오직 고발자의 주관적인 주장에만 의존했던 이 원칙은 재판의 심장에 박힌 치명적인 결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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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년 석판화로 제작된 세일럼 마녀 재판의 상상도 |
유령 증거가 인정되자, 고발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습니다.
또한 재판은 피고에게 끔찍한 '딜레마'를 안겨주었습니다.
마녀로 고발당했을 때, 죄를 '자백'하고 다른 마녀의 이름을 대면 참회한 것으로 간주되어 목숨을 구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반면,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 악마와 한패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하지만 자백이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뮤얼 워드웰처럼 자백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를 번복한 사람은 악마의 편으로 다시 돌아선 것으로 간주되어 결국 처형당했습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고발해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 광기 어린 재판을 이끈 주요 인물들과 희생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주도자
◦ 코튼 매더 목사: '매더 왕조'라 불릴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과학에 관심이 많아 거센 반대에도 천연두 예방법을 옹호한 지식인이었지만, 동시에 유령 증거'만'으로 판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도 마녀재판을 신앙심 회복의 기회로 여겨 광기를 부추긴 모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 윌리엄 스토턴 재판장: 새롭게 부임한 부총독으로, 재판의 수석 판사를 맡아 유령 증거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사형 판결을 주도했습니다.
◦ 존 호손 판사: 재판의 판사 중 한 명으로, 그의 고손자인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은 훗날 조상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성(Hathorne)에 'w'를 추가해 호손(Hawthorne)으로 바꾸고, 청교도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 《주홍 글자》를 썼습니다.
• 대표적인 희생자
◦ 브리짓 비숍: 1692년 6월 10일, 가장 먼저 교수형에 처해진 희생자입니다.
◦ 레베카 너스: 마을 모두의 존경을 받던 71세의 독실한 교인이었습니다.
배심원단은 처음에 그녀에게 '무죄'를 평결했지만, 판사들의 압력에 못 이겨 평결을 번복했고, 그녀는 결국 처형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 자일스 코리: 81세의 농부였던 그는 재판 자체를 부정하며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법관들은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그의 가슴에 무거운 돌을 하나씩 올려놓는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는 이틀 동안 고통 속에서도 "더 무거운 돌을(More weight)."이라고 외치며 저항하다 압사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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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일스 코리는 1690년대 세일럼 마녀 재판에서 강제로 답변을 받아내려는 시도 중에 압살당했다. |
처음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했던 고발의 화살은 점차 마을의 유력 인사와 부유한 상인들에게까지 향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마녀의 불길이 마침내 식민지의 최상류층에까지 닿으면서, 상황은 극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3. 재판의 끝과 뼈아픈 반성: 결과와 영향
마녀사냥의 광풍은 식민지의 유력 인사들은 물론, 윌리엄 핍스 총독의 아내마저 마녀로 지목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핍스 총독은 1692년 10월, 마침내 '유령 증거'를 법정에서 금지하고 마녀재판을 위해 설치했던 특별 법정을 해산시켰습니다.
이로써 1년 넘게 세일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광기는 막을 내렸습니다.
세일럼 마녀재판의 최종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 총 기소 인원: 200명 이상
• 사형 집행: 19명 (교수형)
• 고문치사: 1명 (자일스 코리)
• 옥중 사망: 최소 5명
사건 이후,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깊은 반성과 함께 자신들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한 긴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1. 1697년: 재판의 판사 중 한 명이었던 새뮤얼 시월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의 글을 낭독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습니다.
2. 1702년: 매사추세츠 의회는 세일럼 마녀재판이 불법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3. 1711년: 희생자 22명의 유죄 판결을 무효화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가족들에게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4. 2001년 & 2022년: 3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나머지 희생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면이 이루어졌고, 2022년 마지막 희생자였던 엘리자베스 존슨 주니어가 무죄를 선고받으며 기나긴 사죄의 역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일럼 마녀재판은 미국 사회에 두 가지 중요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첫째, 종교 지도자들이 사법 절차를 주도했던 신정정치(Theocracy)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둘째, 객관적인 물증 없이 자백이나 증언만으로 유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증거재판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뼈아픈 반성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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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댄버스, 매사추세츠(세일럼빌리지)의 마녀 재판 희생자 추모비 |
4. 세일럼의 교훈: 왜 우리는 지금도 '마녀사냥'을 이야기하는가?
세일럼 마녀재판은 단순히 300여 년 전의 해프닝으로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사회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때, 이성이 어떻게 마비되고 집단적 광기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를 이용해 특정 집단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현상을 '마녀사냥'이라고 부릅니다.
세일럼의 비극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3가지 핵심적인 통찰을 줍니다.
1.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위험성
나와 생각이나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태도는 세일럼의 비극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는 언제든 새로운 '마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2. 거짓과 선동의 파급력
세일럼에서는 몇몇 소녀들의 거짓 증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오늘날에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악의적인 소문이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가 한 개인이나 집단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사이버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세일럼의 비극과 맞닿아 있습니다.
3. 절차적 정의의 중요성
세일럼 재판은 객관적 증거 없이 '유령 증거'와 같은 비상식적인 증거를 채택하고, 여론과 감정에 휩쓸려 유죄를 판결했습니다.
이는 적법한 절차를 무시한 판결이 얼마나 부당하고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줍니다.
누군가를 단죄할 때는 반드시 명백한 증거에 기반한 공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세일럼의 비극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을지 모를 '마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싶은' 욕망을 성찰하고, 거짓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기르며,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관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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