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거짓말: 무적함대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나
1. 서막: 두 제국의 충돌 (1587-1588)
1.1. 운명의 도화선
1587년 겨울, 에스파냐의 심장 엘에스코리알 궁전.
펠리페 2세는 지독한 통풍으로 뒤틀린 다리를 이끌고 차가운 집무실의 창가에 섰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를 이어받아 유럽과 신대륙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다스리는 그였지만, 육신의 고통 앞에서는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전령이 굳은 얼굴로 들어와 서신을 올렸다.
잉글랜드에서 온 소식이었다.
서신을 펼쳐 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가톨릭 교도이자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지녔던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런던의 처형대에서 참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펠리페 2세의 얼굴에서 고통의 흔적이 사라지고, 차가운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저 이교도 여왕이 선을 넘었구나... 신께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 명하신다. 잉글랜드로 가겠다."
그의 결심은 단순히 메리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단 여왕 엘리자베스를 폐위시키고, 자신 또는 친족을 잉글랜드 왕좌에 앉혀 핍박받는 영국 가톨릭 교도들의 신앙을 지켜내려는 오랜 숙원의 마침표였다.
그러나 이 비극의 이면에는 교활한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자신의 혈육인 메리를 처형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여왕의 최고 고문 벌리 경(윌리엄 세실)은 여왕에게 '스페인 함대가 이미 웨일스에 상륙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다.
공포에 질린 여왕은 결국 메리의 사망 영장에 서명했고, 비극의 톱니바퀴는 돌이킬 수 없이 구르기 시작했다.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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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페 2세 |
1.2. 해묵은 갈등의 소용돌이
그러나 펠리페의 이 결단은 단순히 메리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곪아온 종교, 경제, 그리고 전략적 갈등이 마침내 터져 나온 필연적 결과였다.
모든 갈등의 근저에는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스페인과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신흥 신교도 국가 잉글랜드 사이의 종교적 대립이 있었다.
이 종교적 적대감은 잉글랜드의 해적질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 지원이라는 두 개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비호 아래,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여왕의 해적'들은 스페인의 보물선을 약탈하며 제국의 동맥을 위협했고, 이는 '잔혹한 스페인'에 맞서는 잉글랜드의 초기 서사 구축 작업의 일부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가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것은 펠리페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이었다.
동시에 잉글랜드는 바로 그 해적질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스페인의 폭정에 맞서 싸우는 네덜란드 신교도 반군을 지원했다.
이 대리전 양상은 스페인의 주력군을 네덜란드에 묶어두는 효과를 낳았다.
결정적으로, 당시 스페인의 숙적이던 프랑스가 '세 앙리의 전쟁'이라는 내전으로 스스로 무너지자 펠리페는 유럽 대륙에서 거칠 것 없는 '자유재량권'을 얻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잉글랜드 침공은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전(聖戰)이자, 제국의 안보를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2. 거대한 함대의 출격 (1588년 5월-7월)
2.1. '축복받은 함대', 그 거대한 위용
우리가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라 부르는 이 함대의 공식 명칭은 '가장 위대하고 축복받은 함대(Grande and Felicíssima Armada)'였다.
'무적함대'라는 별명은 잉글랜드가 자신들의 '기적적인 승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프로파간다의 걸작이었다.
적을 거대하고 무적이게 만들수록, 그들을 물리친 자신들의 위대함은 더욱 빛나기 때문이었다.
그 규모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130척의 거대한 함선에 3만여 명의 병력이 승선한 이 함대는 당시 유럽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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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적함대 (위대하고 축복받은 함대) Armada Invencible 아르마다 인벤시블레 |
그러나 이 거대한 함대에는 처음부터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본래 총사령관으로 내정되었던 노련한 해군 제독, 산타크루즈 후작(알바로 데 바산)이 출정 직전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펠리페 2세는 그의 후임으로 육군 출신의 명망 있는 귀족,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임명했다.
그는 단 한 번도 해전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었다.
공작 스스로도 자신의 무능함을 통감하고 국왕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폐하, 저는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멀미조차 이기지 못하는 몸입니다. 부디 이 중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지만 국왕의 결심은 확고했다.
경험 없는 지휘관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운명의 바다로 나아가야만 했다.
2.2. 거대한 도박: 스페인의 전략
펠리페 2세가 구상한 대전략은 군사 분석가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담했지만, 동시에 거의 오만함에 가까운 치명적인 허점을 안고 있었다.
아르마다의 주 임무는 잉글랜드 함대와의 정면 대결이 아니었다.
핵심 목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일시적으로 장악하여, 플랑드르(Flanders)에 주둔한 파르마 공작의 정예 육군(테르시오) 3만 명을 잉글랜드 땅으로 안전하게 수송하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본질적으로 해상 결전이 아닌 거대한 규모의 상륙 지원 및 수송 작전이었다.
문제는 이 계획이 완벽한 날씨, 완벽한 타이밍, 그리고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심해 항구를 전제로 한 병참의 악몽이었다는 점이다.
무선 통신이 불가능한 시대에 함대와 육군은 서로의 상황을 모른 채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야 했다.
파르마 공작의 육군은 수심이 얕은 플랑드르 해안에서 수백 척의 소형 바지선에 나눠 타고 아르마다가 기다리는 공해상으로 나와야만 합류가 가능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이는 현실을 무시한 위험천만한 도박이었고, 과거의 영광에 취한 스페인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3. 불운의 전주곡
1588년 5월, 마침내 리스본 항을 떠난 함대는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대한 폭풍우를 만났다.
함대는 뿔뿔이 흩어져 간신히 스페인 북부의 라 코루냐 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 달 넘게 보관했던 식량과 식수는 썩어 나갔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질병이 돌기 시작했다.
첫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함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마치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재앙을 암시하는 불운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3. 운명의 해협: 7일간의 추격전 (1588년 7월)
3.1. 잉글랜드의 대응
스페인 함대가 마침내 영국 해협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플리머스 항에 전해졌다.
당시 잉글랜드는 실질적인 반(反)교황 정서에 휩싸여 있었고, 국민들은 스페인에 대해 깊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휘관들은 달랐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의 접근 소식을 듣고도 여유롭게 볼링 게임을 계속하며 이렇게 말했다는 전설(전승)이 전해진다.
"경기를 끝낼 시간도, 저 스페인 놈들을 혼쭐낼 시간도 충분하다."
이는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잉글랜드는 자신들의 바다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전 전략 분석가의 시각에서 볼 때, 두 나라의 함대는 전술 사상부터 함선의 설계, 주력 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검증된 전통적인 백병전(Boarding Action) 전술을 고수했다.
그들의 높고 큰 성채형 함선들은 적선에 근접해 갈고리를 걸고 정예 보병(테르시오)을 투입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는 기동성이 뛰어난 작고 날렵한 함선에 장거리 컬버린포를 탑재하여 원거리에서 적을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 즉 포격전(Gunnery Duel) 을 추구했다.
이는 구시대와 신시대의 해전 사상이 영국 해협에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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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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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함대 (Felicima Arm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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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함대 (English 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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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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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하여 보병(테르시오)을 이용한 백병전(Boarding Action)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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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함포 사격을 통한 포격전(Gunnery Duel)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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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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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높아 백병전에 유리하지만, 기동성이 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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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날렵하여 기동성과 조종이 용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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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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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거리 고위력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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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고속의 컬버린(Culverin)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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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적인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
3.2. 깨지지 않는 반월진
해협에 들어선 아르마다는 곧바로 초승달 모양의 견고한 방어 진형, 즉 반월진(半月陣)을 구축했다.
이 진형은 취약한 측면을 서로 보호하고, 잉글랜드 함대가 접근할 경우 강력한 단거리 포화를 집중시킬 수 있는 전술적으로 매우 효과적인 방어진이었다.
잉글랜드 함대는 며칠에 걸쳐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작고 빠른 잉글랜드 함선들은 바람을 타고 스페인 함대의 측면을 파고들어 장거리 컬버린포를 쏘아댔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스페인 함선의 두꺼운 참나무 선체는 포탄을 대부분 튕겨냈고, 반월진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위용을 자랑하며 해협을 따라 전진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펠리페 2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불필요한 교전을 피하고 오직 파르마 공작과의 합류 지점인 칼레를 향해 묵묵히 함대를 이끌었다.
드레이크를 비롯한 잉글랜드의 노련한 해적 출신 지휘관들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 스페인의 방어진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4. 칼레의 불과 그라블란의 바람 (1588년 7월 27-29일)
4.1. 칼레의 함정
마침내 아르마다는 프랑스 칼레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파르마 공작의 군대가 아니었다.
"상륙 준비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절망적인 소식만이 전해졌다.
수만 명의 스페인 병사들은 좁은 배 안에서 초조하게 파르마를 기다리며 불안한 밤을 맞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잉글랜드 해군이 파놓은 완벽한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4.2. 지옥의 불길, 화선(火船) 공격
7월 27일 자정.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칼레 앞바다.
잉글랜드 진영에서 8척의 작은 배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배들에는 타르, 유황, 화약 등 인화물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배에 불을 붙인 뒤, 밀물과 바람을 태워 스페인 함대를 향해 돌진시켰다.
순간, 어둠을 찢고 8개의 거대한 불덩이가 아르마다를 향해 다가왔다.
공포에 질린 스페인 함장들은 혼비백산했다.
서로 부딪히고 엉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질서 없이 닻줄을 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단 몇 시간 만에, 잉글랜드의 포격에도 끄떡없던 철벽의 반월진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스페인 함대는 뿔뿔이 흩어진 채 공포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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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作 |
4.3. 그라블란의 격돌과 '프로테스탄트의 바람'
다음 날 아침, 그라블란 근해에서 밤새 흩어진 스페인 함대는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잉글랜드 함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잉글랜드 함선들은 혼란에 빠진 스페인 함선들에 바짝 다가가 우월한 사격 속도를 자랑하는 컬버린포를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수많은 스페인 함선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바로 그때, 전투와 동시에 강한 남서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훗날 잉글랜드인들이 신의 가호를 증명하는 이름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바람(Protestant Wind)'이라 부르게 될 이 바람은, 신의 개입이라는 종교적 프로파간다의 핵심 소재가 되어 스페인 함대를 네덜란드 연안의 위험한 모래톱으로 밀어붙였다.
함대는 좌초 직전의 절체절명 위기에 놓였다.
기적적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스페인 함대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파르마 공작과의 합류는 불가능해졌고, 지칠 대로 지친 함대는 차가운 북해로 밀려나 험난한 귀향길에 올라야만 했다.
5. 비극의 귀향과 신화의 탄생 (1588년 8월-1604년)
5.1. 죽음의 항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북쪽을 돌아 귀환하는 아르마다의 여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병사들은 잉글랜드의 포탄이 아닌 굶주림과 괴혈병, 그리고 북대서양의 끔찍한 폭풍우와 싸워야 했다.
썩은 비스킷과 오염된 물로 연명하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수십 척의 배가 아일랜드의 암초 해안에서 난파되었고, 간신히 해안에 상륙한 생존자들마저 적대적인 세력에게 학살당했다.
리스본을 떠났던 130척의 함선 중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은 절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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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마다의 항해 루트 |
5.2. 런던의 '승전' 퍼레이드와 감춰진 진실
같은 시각, 런던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관하는 화려한 승전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었다.
여왕은 "신께서 잉글랜드를 보우하사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포하며 자신의 권위를 한껏 드높였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신화는 잉글랜드가 자국의 영웅들에게 저지른 추악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한 기만이었다.
전투에 참여했던 잉글랜드 수병들은 급료조차 받지 못한 채, 스페인군의 포탄이 아닌 티푸스, 이질, 그리고 굶주림으로 수천 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전투에서 사망한 잉글랜드 수병보다, 전투가 끝난 뒤 질병과 방치로 죽은 수병이 훨씬 많았다.
이 비참한 희생자들은 잉글랜드의 역사책에도, 문학에도, 영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승리의 신화 뒤에 철저히 잊혔다.
5.3.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가짜 뉴스'
결정적으로, 아르마다의 '패배'는 잉글랜드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그 후로도 1604년까지 16년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마침내 양국이 맺은 런던 조약에서, 스페인은 '잉글랜드의 네덜란드 내정 간섭 중단'과 '해적질 중단'이라는 자신들의 핵심 전략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는 스페인이 아일랜드에서 손을 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는 양측의 양보가 담긴 협상이었지,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영국의 역사가 루시 워슬리의 말처럼, '무적함대의 격퇴'는 잉글랜드가 400년간 자국민과 전 세계를 상대로 펼친 가장 성공적인 프로파간다이자 '가짜 뉴스'였다.
약소국 잉글랜드가 거대한 가톨릭 제국 스페인을 신의 가호로 물리쳤다는 이 신화는 훗날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6. 역사가 남긴 교훈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명백한 교훈을 남긴다.
첫째, 자만과 현실 안주가 얼마나 위험한가.
스페인은 보병을 이용한 백병전이라는 낡은 전술을 고집했지만, 잉글랜드는 장거리 함포 사격이라는 새로운 해전의 패러다임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과거의 영광에 기댄 채 변화를 거부하는 순간,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 프로파간다의 힘은 사실 그 자체를 압도할 수 있다.
아르마다 원정은 사실 그 자체보다 '어떻게 기억되는가'가 역사를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우리는 승자의 기록 뒤에 감춰진 패자의 목소리와 희생된 이들의 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종종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자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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