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의 일대기: 세 대륙을 품은 남자
제1장: 탕헤르의 젊은 법학자, 꿈을 꾸다
1. 운명의 시작
1304년 2월 24일,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라와티 앗탄지 빈 바투타(Abu Abdullah Muhammad bin Abdullah al-Lawati al-Tanji bin Battuta, 아시아에서는 샴스 알 딘으로도 불림)는 마린 왕조(Marinid Dynasty)의 항구 도시 탕헤르(Tangier, 現 모로코 북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Berber, 북아프리카의 토착 민족)의 일파인 라와타(Lawata) 부족 출신으로, 가문 대대로 울라마(Ulama, 법학자)를 배출한 명망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소년 바투타는 북아프리카에서 주류였던 수니파 말리키(Maliki, 이슬람 율법학파 중 하나) 학파의 율법 교육을 충실히 받았다.
율법학자로서 안정된 삶이 예비되어 있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이미 율법 책 대신 지평선 너머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1325년 6월 21일, 바투타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난다.
그의 공식적인 목적은 메카(Mecca, 이슬람 최대의 성지)를 향한 하즈(Hajj, 성지 순례)였다.
“나는 힘을 북돋아 줄 길동무도 없이 홀로 여행을 하였다.”
바투타는 훗날 자신의 여행기에서, 떠남의 순간이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했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셨던 터라, 그들과의 이별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전승)
그럼에도 영광스러운 성소(聖所)들을 찾아가고 싶은 오랜 충동에 압도되어 그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집을 나섰다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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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바투타 |
2. 북아프리카를 가로지르며
바투타는 북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며 첫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여행은 베두인족(Bedouin, 아랍 유목민)의 습격 위험 때문에 주로 대상단(隊商團, Caravans)과 함께 움직여야만 안전했다.
그는 틀렘센(Tlemcen, 現 알제리 도시), 베자이아(Béjaïa, 現 알제리 항구 도시)를 거쳐 튀니스(Tunis, 現 튀니지의 수도)에 도착해 두 달을 머물렀다.
튀니스로 가는 길목, 베자이아에서 바투타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함을 목격한다.
함께 여행하던 튀니지의 상인이 비자야(Béjaïa)에서 사망했는데, 그가 남긴 3,000 디나르(Dinar, 이슬람권의 금화 또는 은화)에 달하는 황금 유산이 문제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총독이 그 유산을 싸그리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바투타는 눈앞에서 벌어진 권력 남용을 보며, 율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튀니스에서 순례객 무리에 합류한 그는 스팍스(Sfax, 튀니지 항구 도시)에서 이 여정 중 처음으로 결혼식을 구경하기도 했다. (전승)
“그곳의 여성들은 혼수용품의 대부분을 구리 기물로 마련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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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서적에 그려진 순례자와 대상 일행 |
3. 나일강과 성소의 길
1326년 이른 봄, 고향에서 3,500km를 이동한 바투타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맘루크 술탄국(Mamluk Sultanate)의 주요 항구)에 도착했다.
그는 이집트의 거대 도시 카이로(Cairo)로 이동해 몇 달을 머물렀다.
카이로의 마리스탄(Maristan, 병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췄으며, 하루 수입이 1,000 디나르에 달할 정도로 풍족했다.
카이로의 거리는 khawāniq(수도원, 종교 기관)이라 불리는 시설들로 가득했는데, 아미르(Amir, 군사 지도자)들은 이 건축 경쟁을 벌였다.
카이로에서 바투타는 홍해 항구 아이자브(Aydhab, 홍해 서해안의 항구, 반란으로 폐쇄됨)로 향했으나, 항구가 폐쇄되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신 그는 시리아(Syria)를 통해 메카로 가는 새로운 경로를 택했다.
이때 성자 샤이크 아부 하산 알 샤디히(Shaikh Abu al-Hasan al-Shadhili, 시리아의 성자)의 조언을 받아 헤브론(Hebron), 예루살렘(Jerusalem, 이슬람 제3의 성지), 베들레헴(Bethlehem) 등 여러 성지를 안전하게 방문할 수 있었다.
바투타가 방문했을 당시 예루살렘은 아이유브(Aiyub) 왕조의 살라 알-딘(Salah al-Din, 이슬람 영웅 살라딘)이 탈환한 뒤 성벽의 일부가 파괴된 상태였는데, 이는 훗날 알-말릭 알-자히르(al-Malik al-Zahir, 맘루크 술탄국 술탄)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4. 다마스쿠스의 논란과 첫 하즈
바투타는 다마스쿠스(Damascus, 시리아의 수도)에서 라마단(Ramadan, 이슬람 금식월) 기간을 보냈다.
그는 그곳의 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가르칠 수 있는 학위(Teaching Diplomas)를 받았다.
다마스쿠스는 그가 만난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월하다고 극찬했는데, 특히 시장과 대사원(Great Mosque of Damascus)의 웅장함을 자세히 묘사했다.
하지만 바투타의 다마스쿠스 방문 기록 중에는 후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당대 한발리파(Hanbalite)의 유명한 법학자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yah, 1263-1328, 한발리파 법학자)에 대한 목격담이다.
“마침 내가 다마스쿠스에 있을 때다 (wa kuntu idh dhāka bi-dimashq). 나는 금요예배 시 그를 만났다. 그는 사원의 강단(mimbar)에서 사람들을 효유하고 계도하고 있었다.”
바투타는 이븐 타이미야가 설교 도중, 알라(신)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자신이 강단 계단 하나를 내려오는 행위에 비유했다고 기록했다.
이븐 타이미야의 행동은 신인동형론(ananthropomorphism, tashbīh, 신이 인간과 같은 속성과 형질을 가짐을 주장)으로 간주되어 많은 신학자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 논쟁이 격화되자 청중들이 이의를 제기한 말리키파 법학자에게 몰매를 놓고, 결국 이븐 타이미야는 술탄의 명으로 성보(城保)에 감금되었다가 옥사했다고 바투타는 전한다.
바투타는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역사학자들의 교차 검증 결과, 이븐 타이미야는 바투타가 다마스쿠스에 도착하기 두 달 전인 1326년 7월에 이미 체포된 상태였으며, 이 설교 사건 자체는 20년 전인 1305년 또는 1306년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븐 바투타는 이븐 타이미야를 직접 볼 수도, 그의 그 유명한 설교를 직접 들을 수도 없었다.”
이 대목은 바투타가 자신의 여행담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실제로는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서 직접 본 것처럼 '창작'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논쟁).
이는 그의 여행기의 신뢰성에 의문을 들게 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다마스쿠스를 떠난 바투타는 대상 행렬을 따라 메디나(Medina, 무함마드의 영묘가 있는 성지)에 도착해 나흘을 머문 뒤, 마침내 메카에 도착하여 첫 하즈를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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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카 까지의 여정 |
제2장: 동방의 부와 서방의 편견
1. 이라크와 페르시아의 여정 (1326년)
1326년 11월 17일, 바투타는 메카를 떠나 이라크(Iraq)로 향하는 대상단에 합류한다.
그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제4대 정통 칼리파)의 영묘가 있는 나자프(Najaf, 시아파의 성지)를 방문했다.
여기서 바투타는 큰 결정을 내린다.
곧바로 바그다드(Baghdad, 당시 일 칸국(Ilkhanate)의 지배하)로 돌아가는 대상단을 떠나 페르시아(Persia, 現 이란)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티그리스강(Tigris River)을 따라 이동하며 와시트(Wasit)를 지나 자그로스산맥을 넘어 에스파한(Isfahan, 페르시아의 중심 도시 중 하나)에 도착했다.
그는 에스파한 사람들이 용모가 준수하고 용감하며 음식에 관해서는 모두가 너그러울 뿐 아니라 경쟁심이 대단하다고 기록했다.
“가령 한 사람이 친구를 청해서는 '나와 함께 가서 난과 우유를 좀 맛보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가보면 갖가지 요란스러운 음식을 내놓고 대접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과시합니다.”
하지만 이스파한은 이슬람 분파들의 싸움으로 인해 폐허가 된 곳이 많아 황량해 보였다.
반면, 시라즈(Shiraz)는 몽골 침략의 파괴를 면한 아름다운 도시로 다마스쿠스에 비견될 정도였다.
1327년 6월, 바그다드에 도착한 바투타는 1258년 훌라구(Hulagu, 몽골의 칸)의 침입으로 파손된 잔해가 여전히 남아있는 쇠락한 도시를 보았다.
“옛날에는 바그다드 거리거리마다 음식을 나눠주곤 했건만, 이제 여행자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원이 단 한 곳 밖에 없다니.”(전승)
2. 지리적 표절과 논란 (전환점)
바투타는 바그다드에서 일 칸국(몽골 제국 4대 칸국 중 하나)의 마지막 통치자 아부 사이드(Abu Sa'id)가 북쪽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았고, 그의 국왕 대상단에 합류하여 타브리즈(Tabriz, 몽골 제국과 경쟁하던 교통의 중심지)까지 여행했다.
바투타의 여행기에는 이라크와 페르시아의 도시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있지만, 이 부분 역시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자들은 그가 티그리스강 주변 도시들에 대한 묘사의 대부분을 150년 전 안달루시아(Al-Andalus,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통치 지역)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Ibn Jubayr)의 여행기(Rihla)에서 그대로 베꼈거나 (표절) 인용했다고 지적한다.
“학자 존 매턱(John Mattock)에 따르면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전체의 약 1/7은 이븐 주바이르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다 (논쟁).”
이븐 바투타(또는 그의 편집자 이븐 주자이)는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자신의 기록을 더욱 풍부하게 보이기 위해 선학(先學)의 글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비록 당대 이슬람권에서는 뛰어난 문체를 계승하기 위한 문필 관습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당대의 상황이 아닌 12세기의 오래된 정보를 담게 만드는 과실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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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다드 여정 |
3. 인도양과 스와힐리 해안 (1329년-1331년)
바투타는 메카에서 두 번째 하즈(Hajj)를 완료한 후, 홍해 항구 지다(Jeddah)에서 배를 타고 남동풍을 거슬러 예멘(Yemen,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으로 향했다.
예멘의 최대 도시 사나(Sana'a)에 도착한 바투타는 그곳 건물들이 독특하게 생긴 벽돌과 석회로 지어졌고, 길바닥 전체가 돌로 포장되어 비가 와도 물이 차지 않고 빠져나가는 점을 칭찬했다.
그는 아덴(Aden, 예멘의 항구)을 방문하여 도시의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수목, 농작물, 물이 없어 황량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덴 사람들의 호승심이 지나쳐 양 한 마리 경매에 400 디나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경매에서 진 하인이 주인에게 맞아 쫓겨났다는 일화를 언급했다.
바투타는 아덴에서 소말리아(Somalia)로 항해하여 제일라(Zeila, 소말리아 항구, 뿔 지역의 접경)를 경유했는데, 이곳을 하도 더럽고 황량하고 악취가 나서 도시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바로 떠났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느낀 문화 충격이었다.
하지만 소말리아의 중심지 모가디슈(Mogadishu, 바르바라라고 불림)에 도착했을 때 그의 인상은 매우 달랐다.
“모가디슈 사람들은 어찌나 많이 먹는지 한 사람이 먹는 양이 보통 우리네 몇몇 사람이 먹는 양에 맞먹습니다. 그러다보니 몸집이 크고 비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술탄 무자히드 누르 알 딘 알리(Mujahid Nur al Din Ali, 라술리드 왕조의 왕)가 차려준 밥상에 대한 구구절절한 묘사를 남기며, 밥 위에 얹은 닭고기, 생선, 채소 혼성 반찬인 쿠샨(Qushan), 덜 익은 바나나와 발효된 젖 등을 칭찬했다.
바투타는 계속 남하하여 스와힐리 해안(Swahili Coast, 아랍 세계에서는 '흑인들의 땅' 빌라드 알 잔지(Bilad al-Zanj)라고 불림)에 도착했다.
몸바사(Mombasa, 現 케냐 항구)를 지나 킬와(Kilwa, 現 탄자니아 킬와 키시와니)에 들렀는데,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지어진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극찬했다.
당시 킬와는 금 거래의 중심지였으며, 술탄 알 하산 이븐 술레이만(al Hasan Ibn Sulaiman)은 겸손하고 관대했다고 호의적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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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와힐리 해안 여정 |
제3장: 황금 도시의 타락과 몰락
1.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 (1332년)
메카에서 세 번째 하즈를 완료할 무렵, 바투타는 새로운 모험을 꿈꿨다.
그는 델리 술탄 왕조(Khalji Dynasty, 인도 북부 무슬림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빈 투그루크(Muhammad bin Tughluq)의 궁정에서 일자리를 찾기로 결심하고 아나톨리아(Anatolia, 現 튀르키예)로 향하는 대상단에 합류한다.
아나톨리아에서 바투타는 킵차크 칸국(Kipchak Khanate, 몽골 제국 4대 칸국 중 하나)의 수도 사라이(Saray)로 가서 우즈베크 칸(Öz Beg Khan, 킵차크 칸국의 칸)을 알현했다.
이때 우즈베크 칸의 아내이자 동로마 제국(Byzantine Empire)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Andronicos III)의 딸인 바얄룬 팔레올로기나(Bayalun Palaiologina) 공주가 출산을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자, 바투타는 그녀를 수행하며 이슬람 세계의 영역을 벗어난 첫 여행인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를 방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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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3세 |
1332년(또는 133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바투타는 황제 알현에 성공했다.
그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를 보고 싶었으나, 비기독교인이라 십자가에 예를 표할 수 없어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볼거리도 많고 사람들도 지적이다"라고 기록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황제와 직접 대면도 했다고 한다.”
(논쟁)바투타는 이 도시에서 퇴위한 선황 자르지스(Jarjis)를 만났다고 했으나, 바투타 방문 시점에 선황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났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2. 델리, 황금 도시의 사치와 부패
킵차크 칸국과 중앙아시아(부하라, 사마르칸트)를 거쳐 힌두쿠시 산맥(Hindu Kush,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경계의 산맥)을 넘은 바투타는 마침내 델리 술탄국(Delhi Sultanate)의 수도 델리(Delhi, 인도 북부)에 도착하여 술탄 무함마드 투그루크를 알현했다.
무함마드 투그루크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학자들과 법관(Qadi, 카디)들을 후원했으며, 몽골 침입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조를 통치하고 있었다.
바투타는 델리에 도착하자마자 2,000은 디나르의 환영 선물과 함께 호화로운 가구를 갖춘 집을 배정받았다.
술탄은 그를 보기도 전에 이미 채용을 결정했는데, 연봉 5,000은 디나르를 지급하기로 했다. (당시 힌두교 평균 가족의 월 생활비가 약 5 디나르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봉급이었다).
그는 델리에서 판관(Qadi)으로 일하게 되었다. (바투타는 페르시아어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명의 보조관이 붙었고, 문서 서명은 바투타가 맡는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이 황금 도시는 그의 인생을 위태롭게 만든 시험대였다.
델리에서의 삶은 극도의 사치와 방탕으로 점철되었다.
바투타는 술탄 및 고위 관리들과 함께 화려한 사냥 원정에 동참했는데, 여기에는 코끼리(elephants), 텐트(tents), 그리고 엄청난 수의 하인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은 결국 이븐 바투타를 빚더미에 빠지게 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술탄에게 돈을 요구했고, 술탄은 관대하게도 그에게 빚을 갚을 돈과 함께 쿠트브 알-딘 무바라크 묘소(Qutb al-Din Mubarak mausoleum, 델리 근처의 복합 건물군) 관리라는 추가 직책을 맡겼다.
이 묘소 관리는 460명의 인부가 필요했다.
이븐 바투타는 법학자로서의 청렴함보다는 당대 궁정 문화의 사치스러움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재정 관리의 과실을 저질렀다.
그의 높은 지위와 수입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탐욕이 그의 삶을 짓눌렀다.
그의 직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335년부터 7년간 북인도를 강타한 끔찍한 기근(famine) 때문에, 농민 마을의 작물세(taxes on crops)로 봉급을 받던 바투타는 자신의 마을에서 빚을 걷기 어려워졌다.
“수천 수만 명이 궁핍함으로 죽었습니다.”
바투타는 재판관으로서 포도주를 마신 자에게 채찍 80대를 때리는 등 강력한 율법 집행을 하는 한편, 일부 빈민에게는 자선을 베풀기도 했다.
3. 스캔들과 인간적 갈등
바투타는 변덕스러운 술탄 밑에서 6년을 지내며 여러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시기에는 그의 가족과 사생활에 대한 기록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모로코 여성에게서 아들을 얻었고, 델리에서는 아내에게서 딸을 얻었다.
술탄의 궁정은 불안정했다.
한 호라산(Khorasan, 중앙아시아 지역) 법학자 '아미르 압둘라'는 술탄의 호의를 얻어 창고에 들어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금을 가져가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는 옷에 13개의 주머니를 달고 금 11kg을 가져왔다고 한다.
또 다른 신하가 병들자 술탄은 신하를 저울 한쪽에 올리고 다른 쪽에 금을 쌓아 무게가 수평이 될 때까지 금을 주었다.
이처럼 술탄은 광적으로 관대했지만, 동시에 잔인하고 변덕스러웠다.
바투타의 친구였던 카르나타카(Karnataka, 인도 남부 지역) 출신 법학자 '자말룻 딘 알 마그리비'는 술탄에게 막대한 황금을 하사받고도 구두쇠 기질 때문에 그 돈을 이부자리 아래에 깔고 자다가 허리에 병이 생겨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는 본디 구두쇠에 겁이 많아 항상 금을 자기 이부자리 아래에 깔고 잤는데, 매일같이 금속덩어리를 허리 아래에 깔고자니 허리에 큰 병이 생겨서 죽어버렸다.”
바투타는 이 사건을 보고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부른 비극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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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리까지의 여정 |
4. 벼랑 끝 탈출과 새로운 여정
술탄의 변덕이 심해지자 바투타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세 번째 하즈를 수행하겠다고 청원했으나, 대신 원나라(Yuan Dynasty, 몽골 제국)에 외교 사절로 가라는 제안을 받았다.
바투타는 이를 델리에서 벗어날 천운이라 여기고 수락했다.
그의 여정은 곧바로 재난에 직면했다.
델리를 떠난 일행은 해안을 따라 가던 중 도적의 습격을 받아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바투타는 가까스로 동료들과 재회해 캄바트(Khambat, 現 구자라트 주)로 피신했다.
이후 코지코드(Kozhikode, 인도 남부 무역항)에서 배를 타려 했으나, 폭풍으로 배 한 척이 침몰하고 다른 배는 그를 태우지 않고 수마트라로 떠나버렸다.
델리로 돌아가 실패를 보고하는 것이 두려웠던 바투타는 인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에서 보호를 받다가 몰디브(Maldives, 인도양 섬나라)로 향한다.
몰디브의 통치자 오마르 1세(Omar I)는 이븐 바투타의 법학자 경력을 높이 사 그를 환대하며 카디(Qadi)직에 반쯤 억류시킨다.
이 시기는 바투타의 사생활이 가장 문란했던 시기였다.
“그는 몰디브에서 머무르는 동안 현지처가 4명에다가 여러 명의 여성 시종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바투타는 몰디브에서 먹는 생선이 정력에 좋다는 믿음(전승) 때문에 매일같이 한 번씩 현지처들을 찾아 밤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몰디브는 결혼과 이혼이 자유로운 문화였기 때문에, 외국인 선상 사람들과 여성들이 결혼했다가 떠나면 이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바투타 역시 여러 여성과 결혼했으나, 떠나기 전에 이혼했다.
몰디브 여성들은 히잡(Hijab, 얼굴 가리개)을 쓰지 않고 배꼽부터 무릎까지만 가린 채 상반신을 노출하고 다녔다.
독실한 무슬림이던 바투타에게 이는 분명한 문화 충격이었을 것이나, 그는 이 몰디브인들이 매우 신앙심이 깊고 정직하다는 등 칭찬 위주의 서술을 남겼다.
이는 자신에게 잘해주고 풍족하게 대접했던 지역에 대해서는 개인 감정에 따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그의 편향적인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몰디브를 떠난 바투타는 해적의 습격을 피하며 스리랑카와 인도 남부를 거쳐, 다시 중국 상인의 정크선(Junk ship, 중국식 대형 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5. 중국, 피상적인 기록의 끝 (1345년)
1345년, 바투타는 오늘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Sumatra)섬 북부의 사무데라 파사이 술탄국(Samudera Pasai Sultanate, 이슬람 국가)을 방문했다.
이곳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 술탄의 정크선을 얻어 타고 말라카(Malacca), 베트남, 필리핀(바실란 추정)을 거쳐 원나라(Yuan Dynasty)가 지배하던 광저우(廣州, 취안저우 추정)에 도착했다.
바투타는 중국의 장인들이 비단과 도자기를 만들고, 사람들이 지폐를 사용하여 거래하는 것을 기록했다.
항저우(杭州)를 방문한 그는 "그때까지 보았던 도시 중에 가장 큰 도시"였으며 시 후(西湖, Hangzhou의 호수)에 둘러싸인 매력적인 도시라고 극찬했다.
그는 항저우에서 잘 만들어진 목선(木船)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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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저우의 시 후 |
이후 그는 대운하(Grand Canal)를 이용하여 북쪽의 베이징(北京)까지 가서 원 혜종(元 惠宗)을 알현했다고 기록했다.
바투타는 베이징에서 만리장성(Great Wall)을 보고 이슬람 경전에 나오는 둘 콰르나인(Dhu al-Qarnayn)이 곡과 마곡(Gog and Magog)을 막기 위해 쌓은 벽과 같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 여행에 대한 그의 서술은 극히 피상적이고 부정확하며 부실하다는 비판이 강하다.
“유라시아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범위였음에도 『여행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도 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그가 남중국 항구(광저우, 취안저우)보다 더 멀리 가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논쟁).
그가 묘사한 황제의 장례식이나 내분 등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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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까지의 여정 |
제4장: 귀향과 최후의 대장정
1. 흑사병과 부모의 상실
1346년 광저우를 떠난 바투타는 귀향길에 올랐다.
그는 인도양을 건너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바스라(Basra, 이라크 남부)에 도착하여 일 칸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348년, 그는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으나, 15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또한 그가 도착한 근동 지역은 흑사병(Black Death)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에 창궐하여 죽음이 만연해 있었다.
그는 뱃길을 통해 사르데냐(Sardinia)를 거쳐 1350년 고향 탕헤르로 돌아갔다.
집을 떠난 지 24년 만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어머니가 몇 개월 전에 사망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투타는 24년 만의 귀향에서 부모님 모두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2. 지브롤터와 미지의 땅 말리
바투타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1350년 카스티야(Castilla)와 레온(León) 왕국 군주였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Alfonso XI)가 지브롤터(Gibraltar) 해협을 넘어 탕헤르를 공격하자, 그는 다른 무슬림들과 함께 항구를 지키기 위해 결집했다.
알폰소 11세가 흑사병으로 사망하자, 바투타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영토인 알안달루스(Al-Andalus) 지역을 방문하여 그라나다(Granada, 당시 나스르 왕조의 영토)의 알람브라 궁전(Alhambra Palace)을 둘러보았다.
그는 다시 모로코의 수도 페스(Fez)로 돌아왔지만, 흑사병으로 황폐해진 도시를 보고 이슬람 세계의 제일 외곽 지역인 사하라 사막 이남을 방문해 보기로 결심한다.
1351년 가을, 사하라 횡단(Sahara Transversion) 대상단에 합류한 바투타는 시질마사(Sijilmasa, 모로코 남부, 사하라 북단 오아시스)에서 넉 달을 머물며 낙타를 샀다.
그는 타가자(Taghaza, 암염 집산지)에서는 모든 건물이 암염판을 이용하여 지어진 독특한 광경을 보았고, 타가자의 물맛이 짜고 흑사병이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3. 말리 제국에서의 문화 충격과 편견
바투타는 아우랄라타(Aoualata, 사하라 종단 무역의 남쪽 종착점)를 거쳐 나이저강(Niger River)을 따라 여행하여 말리 제국(Mali Empire)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왕을 뜻하는 "만사(Mansa)"로 불리던 술레이만(Suleiman) 왕을 알현했다.
말리 제국은 '금과 자원이 넘쳐나는 신실한 이슬람 국가'라는 바투타의 환상과는 달랐다.
말리의 종교 문화는 이슬람과 아프리카 토착 종교가 융합되어 있었고, 바투타의 눈에는 이교도가 판치는 사회처럼 보였다.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였다.
“말리의 여자들은 히잡 등 머리카락을 가리는 의상을 입지 않았고,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거리낌없이 대화할 수 있었으며,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등 자주성을 가졌다.”
바투타는 이를 '야만적이고 문명화가 덜 된' 모습으로 평가하며, 자신이 기대하던 말리 제국의 환상이 철저히 박살났다고 서술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성평등적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술레이만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바투타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지로 뒤덮인 꼬질꼬질한 일개 병사 두 명과 눈을 맞추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바투타에게 큰 충격이었다.”
바투타는 왕이 전통적으로 여행객에게 대접하는 빵 세 조각, 구운 소고기, 발효된 크림을 대접했을 때, 돈과 황금 선물을 기대했던 나머지 실망하여 비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말리는 외부 영향을 피하고 금을 외교 관계에서 유용하게 쓰기 위해 외국인에게 금광의 위치를 알리는 것을 금지하는 고립 정치를 하고 있었다.
바투타가 기대했던 화려한 금 선물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논란)말리에서 바투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식인을 하는 부족을 언급하며, 술탄이 이들을 환대하고 시종 한 명을 하사했으나, 그들은 시종을 잡아먹고 얼굴과 손에 피를 바른 채 술탄을 찾아와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들은 통상 그렇게 그들에게 파견되는 사람을 처치한다고 한다 (전승).”
이 대목은 바투타가 문화적 충격을 과장하고 서아프리카 문명을 야만적으로 묘사하는 편향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은 당대 서아프리카에 대한 귀중한 1차 사료가 된다는 학술적 가치도 지닌다.
바투타는 팀북투(Timbuktu, 당시에는 작은 마을)와 가오(Gao, 상업 중심지)를 거쳐, 모로코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Abu Inan Faris)의 전갈을 받고 1354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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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과 후기 여정 |
4. 여행기의 완성, 그리고 후대의 평가
1354년 귀환한 이븐 바투타는 마린 왕조의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의 명을 받고 시인이자 문장가인 이븐 주자이(Ibn Juzayy)를 편집자로 삼아 자신의 여행담을 구술했다.
이븐 주자이의 편집 과정을 거쳐 《여러 도시의 경이로움과 여행의 신비로움을 열망하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원제(原題)의 여행기, 즉 《리흘라(Rihla, 여행기)》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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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바투타의 여행 보고서의 일부 사본, 1836년 카이로 |
바투타가 여행 도중에 기록한 일기나 기록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며, 이븐 주자이는 바투타의 30년 간의 기억에 크게 의존하여 작업했다.
따라서 주자이는 기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븐 주바이르 등 선행 학자들의 지리서와 여행기를 참고했다 (논쟁).
이 과정에서 여행 일정의 오류 (카이로-다마스쿠스 축지법 여정, 아나톨리아의 불가능한 우회)와 사실 왜곡 (이븐 타이미야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바투타가 "축지법과 순간이동능력의 보유자" (전승)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는 당시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 카디(Qadi): 이슬람 법을 집행하는 법관.
• 디나르(Dinar)와 디르함(Dirham): 이슬람권에서 사용되던 화폐 단위.
•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종교 학문 교육 기관.
• 하즈(Hajj): 이슬람의 성지 순례 의무.
후대의 평가와 영향
이븐 바투타는 1368년 또는 1369년경 마린 왕조의 마라케시(Marrakech)에서 법관으로 생활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대에도 그의 여행담은 불신을 샀다.
안달루시아의 법학자 알발라피키(Abu al-Barakat al-Balafiqi)는 바투타를 “완전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으며, 당대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역시 그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상 파리스 이븐 와드라르(Faris ibn Wadrar)는 이븐 할둔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 왕조들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대가 직접 그대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투타는 근대 이전 역사에서 다른 어떤 탐험가보다 더 많은 거리 (약 12만 km, 마르코 폴로의 약 5배)를 여행했으며, 이는 근대 이전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여행한 기록이다.
후대 인도의 정치가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바투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여행기는 중세 인문지리학 자료의 보고(寶庫)로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며, 14세기 상호 연결된 아프로-아시아 세계의 사회, 정치, 종교, 문화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귀중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두바이(Dubai)의 '이븐 바투타 몰(Mall)'이나 탕헤르의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 등은 그의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에필로그: 세 대륙의 교훈
이븐 바투타의 삶은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가득 찬 14세기에, 오직 하즈에 대한 종교적 신념과 미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동력 삼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빈 한 인간의 대서사시였다.
그는 델리에서 황금에 눈이 멀어 타락하고 부채에 시달렸으며, 말리에서는 자신의 문화적 편견으로 현지 사회를 야만적으로 판단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자신의 여행담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때로는 창작과 과장을 서슴지 않았던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그가 가진 '편향성' 자체에 있었다.
그가 느꼈던 문화 충격, 실망, 분노, 그리고 환대받았을 때의 기쁨을 가감 없이 기록했기에, 우리는 14세기 이슬람 세계와 그 주변 세계의 다면적인 현실, 즉 글로벌한 장소감과 로컬한 장소감의 균형 있는 상호작용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븐 바투타의 여정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세상은 크고 인간은 작다.
한 사람의 경험과 지식은 아무리 방대해도 세상의 전부를 담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 속에는 필연적으로 오류와 편견이 섞여 있었다.
둘째, 여행은 우리 안의 편견을 깨뜨리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시험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는 말리에서 여성들의 자율성을 야만적으로 보았지만, 그가 몰디브에서 누렸던 자유로운 결혼 풍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종교적 관점과는 모순되는 개인적 만족을 주었다.
바투타의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실패하며,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기록함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글은 이븐 바투타의 『리흘라』와 현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역사 서사입니다.
연대·지명·직함 등 핵심 사실은 가능한 한 검증된 자료를 따랐지만, 해석이 갈리는 부분과 추정·전승에 가까운 내용은 본문에 (전승)/(논쟁) 등의 표기로 구분해 두었습니다.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니라 교양·스토리텔링용 재구성에 가깝기 때문에, 중요한 역사적 판단이나 인물 평가에 활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1차 사료와 최신 연구를 함께 참고해 주시길 권합니다.
This narrative retells the life of Ibn Battuta, a 14th-century Moroccan jurist who left Tangier for the Hajj and spent nearly 30 years crossing Africa, the Middle East, Central and South Asia, China and Mali.
It blends documented episodes, debates over his reliability, and modern critiques of his biases to show how his Rihla became both a flawed memoir and a priceless record of the Afro-Eurasia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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