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10·19 여순사건의 진실: 제주 진압 거부, 국가보안법·숙군의 파장, 명예회복 현황 (Yeosu–Suncheon Rebellion)


여순사건: 왜 일어났고, 어떤 상처를 남겼나?


1. 여순사건이란 무엇인가요?

여순사건(麗順事件)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이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시작된 사건입니다. 

이들의 봉기는 순천을 비롯한 전남·북, 경남 일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과 경찰을 동원해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일대의 입산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이어진 이 기간 동안, 수많은 민간인이 반란군과 진압군 양측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2. 비극의 씨앗: 사건은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여순사건은 단 하나의 원인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의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모순이 응축되어 폭발한 사건입니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핵심적인 배경이 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했습니다.


제주 4·3사건과 진압 명령 

여순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이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가 제주도에서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 작전을 펼쳤습니다. 

특히 정부는 제주도의 '중산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에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를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14연대 내 많은 군인들은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며 이 명령에 강하게 반발했고, 이는 곧 무력 봉기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갓 출범한 군대와 경찰의 갈등 

당시 국방경비대(국군)의 내부 불안정성은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였습니다. 

정부 수립을 전후해 병력을 급격히 늘리는 과정에서, 미군정은 철저한 신원 조회 대신 형식적인 충성 '선서(宣誓)'에 의존했습니다. 

이 허술한 절차는 경찰의 탄압을 피하려던 좌익 활동가들이 신분을 숨기고 군에 대거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들을 대거 재고용한 경찰 조직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군인들 역시 '친일 경찰'이라는 인식을 가지며 경찰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는 군경 간에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로 험악한 관계였습니다.


당시 군대와 경찰의 특징

• 군대 (국방경비대): 정부 수립 전후로 급격히 병력이 늘어나면서 좌익 활동가들이 신분 보호를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음. 미군정의 허술한 신원 조회로 좌익 세력의 침투가 용이했음.

• 경찰: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들이 많아 군인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음.


이처럼 군 내부의 이념적 혼란과 경찰에 대한 깊은 불신은 '제주도 동포를 학살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심리적 기반으로 작용했고, 결국 제14연대는 총구를 돌리는 비극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3. 총성이 울리다: 14연대의 반란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 출동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순간, 제14연대에서는 남로당 계열의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반란의 총성을 울렸습니다. 

지창수는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을 향해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고 외치며 봉기를 선동했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우리를 공격하러 온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병사들까지 합세하며 반란은 순식간에 연대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반란의 성격을 두고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시각이 존재합니다.


관점
핵심 내용
우발적 봉기설 (학계 다수설)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없이, 군 내부 숙군 작업과 제주도 출동 명령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일부 하사관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돌발적 사건이라는 주장입니다. 남로당 중앙당과 심지어 북한조차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야 사건 발생을 알았을 정도였다는 기록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입니다.
북한 지시설 (소수설)
북한 김일성과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군내 조직원(김지회 중위 등)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는 주장입니다.


반란군은 10월 20일 새벽 여수를 완전히 장악한 뒤, 기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이동했습니다. 

순천에 주둔하던 14연대 병력까지 합류하면서 세력을 키운 반란군은 구례, 광양, 곡성, 보성 등 전남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점령지를 넓혀갔습니다.


반란군의 핵심 주장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강경 진압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4. 국가의 대응: 진압 작전과 그 속의 비극

1948년 10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우익 청년단체까지 총동원된 진압군은 육해공 합동작전을 펼치며 반란군을 압박했고, 10월 27일에는 여수와 순천 등 주요 점령지를 모두 탈환했습니다.


불에 타 폐허가 된 여수시.


하지만 진압 과정에서 더 큰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국가권력의 근간이어야 할 법은 광기에 잠식당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당시 경찰이 검거한 좌익 인사를 사법 절차에 따라 처리하려 했던 광주지방검찰청 박찬길 차석검사가 오히려 반군 협조자로 몰려 경찰에게 즉결 처형당한 사건은, 국가 스스로 법치를 파괴했음을 보여주는 참혹한 예시입니다.


특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는 무분별한 민간인 희생을 부추겼다는 것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공식적인 조사 결과입니다.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를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 - 1948년 11월 4일, 이승만 대통령 담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압군은 '반란군 부역자 색출'을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재판 없이 학살했습니다. 

제5연대 1대대장 김종원은 일본도(日本刀)를 차고 다니며 부역 혐의자들의 목을 직접 베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고, 당시 미군 보고서는 그를 '짐승같은 인간(beast-like human)'으로 기록했습니다.

경찰이나 우익 인사가 손가락으로 지목만 하면 '부역자'로 몰려 즉결 처형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사람들은 이를 공포에 떨며 '손가락 총'이라 불렀습니다.


희생 주체
희생된 민간인 수 (추정)
비고
반란군 및 좌익 세력
약 150명 ~ 458명
주로 경찰, 우익 인사 및 그 가족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진압군 (군, 경찰) 및 우익 단체
약 2,500명 ~ 수천 명 이상
'부역자'로 의심받은 수많은 민간인이 재판 없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체 민간인 희생자의 75% 이상을 차지합니다.


비록 총성은 멎었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이 비극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정체성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습니다.


진압군에게 체포된 반란군


5. 사건 이후: 대한민국에 남겨진 것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발생한 최대의 위기였으며, 이후 한국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1. 강력한 반공 국가의 등장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반공'을 국가의 최우선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이후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이념 대립을 심화시키고,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는 강력한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2. '국가보안법'의 제정 

사건 진압 직후인 1948년 12월, 정부는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좌익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3. 대대적인 군인 숙청 

여순사건은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세력의 심각성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군은 대대적인 '숙군(肅軍)' 작업에 착수하여 좌익 혐의가 있는 군인 약 5%를 색출해 처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 소령도 남로당 군사 총책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사형 선고 직전까지 갔으나,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구명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순사건은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빨갱이'라는 낙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오랫동안 그 진실이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묻혔던 역사는 최근 다시 빛을 향한 더딘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6. 진실을 향한 노력: 오늘의 여순사건

70년 넘게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잊혔던 여순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2021년) 사건 발생 73년 만인 2021년,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로써 국가 차원에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법적 근거가 마침내 마련되었습니다.

•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과 무죄 판결 법원에서는 유족들이 청구한 재심을 통해 희생자들에게 잇따라 무죄를 선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재심을 청구할 유족조차 없는 희생자를 위해 검찰이 직접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는 첫 사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는 과거 국가 폭력의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기관이 스스로 나섰다는 점에서,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로 나아가려는 우리 사회의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법원 재심 판결, 「여수‧순천 10‧19 사건 특별법」, 당대 신문/미군 기록 등을 토대로 서술했습니다. 
일부 원인‧사망 규모‧지휘 체계 등은 연구자 간 견해차가 있어 (논쟁)으로 표기합니다. 
피해/가해 기술은 역사적 사실 기록을 위한 것이며, 특정 집단의 현재 구성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2차 가해적 표현을 지양합니다.


The Yeosu–Suncheon Incident began on Oct 19, 1948, when Korea’s 14th Regiment in Yeosu refused orders to suppress the Jeju uprising
Mutiny spread across South Jeolla; martial law followed and cities were retaken within weeks, but many civilians died at the hands of both sides. 
Debate endures over whether it was improvised or leftist-directed. 
It entrenched an anti-communist state, the National Security Act, and purges. 
Since 2021, a special law and retrials have pursued truth and re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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