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도읍에 핀 비련의 꽃: 온조, 위대한 백제를 세우다
제1막: 북방의 그림자, 남방으로의 선택
아버지의 나라, 두 이복형제의 그림자
서기 기원전 1세기, 만주 벌판의 새롭게 우뚝 솟은 국가, 고구려.
이곳에는 초대왕인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의 강렬한 기상과 함께, 그를 도와 고구려의 기반을 다진 소서노(召西奴)와 그녀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있었다.
온조는 비류와 달리 침착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지녔다.
그는 항상 거친 들판을 뛰어다니는 형 비류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어머니 소서노의 곁을 지켰다.
소서노는 주몽이 부여에서 망명해 왔을 때부터 전 재산과 지혜를 바쳐 그를 도왔던 여걸(女傑)이었다.
그녀는 두 아들들에게 아버지 주몽의 강인함과 자신의 현명함을 물려주고자 했다.
“온조와 비류의 부계는 기록마다 다르다. 《삼국사기》는 그들을 소서노와 ‘우태(優台)’ 사이에서 난 아들로 적고, 주몽의 아들이라는 후대 전승도 함께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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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조왕 위키미디어 |
고구려의 왕궁은 주몽의 영민한 후계 구상 아래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정 속에는 두터운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주몽이 부여에서 두고 왔던 아들, 유리(孺離)의 존재 때문이었다.
운명을 바꾼 유리(孺離)의 등장
어느 해 여름, 궁궐 전체를 뒤흔드는 소문이 나돌았다.
부여에서 주몽의 본처 소생 아들,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로 찾아왔다는 소식이었다.
온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날이 올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유리는 주몽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명분 그 자체였다.
유리가 도착하자마자 주몽은 그에게 태자(太子)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이는 소서노 일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위기를 의미했다.
소서노는 왕후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비류와 온조는 하루아침에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졌다.
그날 밤, 소서노는 두 아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너희의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왕위는 이제 유리의 것이다.
너희는 고구려 건국에 뼈를 묻은 공신들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이곳에 남는 것은 위험하다.
유리는 너희를 경계할 것이고, 너희의 공적은 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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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성왕 주몽의릉 앞의 돌수호자 위키미디어 |
비류는 분노했다.
"어머니, 어찌 우리의 피와 땀으로 세운 나라를 버린단 말입니까?
차라리 무력으로라도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온조는 고요히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싸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정통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에게는 아버지의 피(부여의 왕족)와 어머니의 재력(졸본의 토착 세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곧 새로운 나라를 세울 위대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십제(十濟)의 대장정
온조의 설득과 소서노의 결단으로, 그들은 고구려를 떠나기로 했다.
소서노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충신들을 모았다.
이들은 주로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소서노를 따르던 무리들로, 열 명의 신하와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었다.
(전승) 이는 훗날 온조가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칭한 이유가 되었다.
'십(十)'은 열 명의 신하를, '제(濟)'는 '건넌다', '구제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다만 ‘십’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하며, 상징수 혹은 연맹의 표지로 보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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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서노 나무위키 |
그들은 북방의 추위를 뒤로하고 남쪽을 향해 길고 험난한 대장정(大長征)을 시작했다.
온조와 비류는 서로 다른 기질로 무리를 이끌었다.
비류는 성격이 급했으나 용감하여, 험한 산길과 거친 강을 건널 때마다 선두에 서서 무리의 사기를 높였다.
반면 온조는 식량과 물자를 철저히 관리하고, 새로운 땅을 만날 때마다 토착민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어머니 소서노는 무리의 정신적 기둥이자, 때로는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군사(軍師) 역할을 했다.
수많은 날들을 걸어 마침내 그들은 한반도의 중심부, 한강(漢江) 유역에 도달했다.
이곳은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멀지 않아 새로운 도읍을 정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제2막: 위례성(慰禮城)의 대립과 건국
땅을 고르는 두 형제의 논쟁
한강 유역에 도착하자마자, 비류와 온조는 새로운 도읍을 정하는 문제로 첨예한 대립에 부딪혔다.
이는 단순히 땅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두 형제가 꿈꾸는 나라의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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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와 온조의 이동경로 (추정)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
비류는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땅을 선호했다.
그는 바다 가까이에 있는 미추홀(彌鄒忽, 현 인천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온조야, 보거라! 저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기상을! 이곳이야말로 하늘과 땅이 열린 곳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고구려를 떠나왔는데, 어찌 내륙 깊은 곳에 갇혀 지낼 수 있겠느냐? 넓은 바다를 통해 천하를 얻어야 한다!"
온조는 비류의 호기로운 주장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이미 하남(河南) 지역의 비옥한 평야와 솟아 오른 산맥을 훑고 있었다.
"형님, 바다는 넓으나 소금물(鹹水)이요, 땅은 질척거려 살기 어렵습니다.
또한 방어에도 불리합니다.
이 강남(江南)의 땅을 보십시오.
토질이 기름지고, 북쪽으로는 한강이 천연의 해자(垓字)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쪽과 서쪽은 험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며, 농사를 지어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에 충분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를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류는 어머니와 온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로 떠났다.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열 명의 신하, 그리고 남아있는 백성들을 이끌고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현 서울 송파/하남 일대로 추정)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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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 위례성 추정 오피니언 뉴스 |
온조의 건국과 비류의 몰락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단단한 성곽을 쌓았다.
성을 쌓는 동안에도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고, 직접 농사를 지어 토질을 점검했다.
(어원) '위례(慰禮)'라는 이름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겠다는 온조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기원전 18년, 온조는 마침내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십제(十濟)라 선포했다.
그는 굳건한 성곽을 기반으로 주변의 작은 부족들을 흡수하며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건국 첫해, 온조는 하늘과 강에 제를 올렸다.
그는 곡식 종자와 쇠농기구를 나누어 주고 봄갈이에 몸소 참여했다.
왕이 쟁기를 잡았다는 소문은 이웃 소국들까지 퍼졌다.
한편, 미추홀로 떠났던 비류의 무리는 곧 절망에 빠졌다.
비류가 선택했던 땅은 온조의 예상대로 소금기가 가득했고,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굶주림에 허덕였다.
게다가 습한 기후로 인해 병자가 속출했다.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온조가 있는 하남 위례성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적 악조건과 식수 곤란에 관한 많은 썰이 전해진다.
비극적인 형제의 통합 전쟁
비류는 미추홀에서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백성들이 하나둘씩 온조의 나라로 도망치자, 비류는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혔다.
그는 결국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위례성을 향해 진격했다.
온조는 형님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했으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온조는 비류를 향해 외쳤다.
"형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개인의 욕심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안녕이 최우선입니다! 부디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비류는 이미 이성의 끈을 놓은 상태였다.
두 형제 간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전승) 전투는 온조의 전략적 우위와 백성들의 지지 속에 온조의 승리로 끝났다.
비류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비류 자신은 자신의 실패와 형제에게 칼을 겨눈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온조는 비류의 시신을 수습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승리했으나 고독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비류의 무리를 모두 받아들였다.
이제 십제는 단순한 열 명의 신하가 아닌, '백(百) 가문'의 백성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온조는 비류의 유민들을 통합하며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승전의 환호 뒤, 온조는 성문을 닫고 밤새 통곡했다.
‘형을 이긴 왕’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칼보다 무거웠다.
제3막: 마한(馬韓)의 위협과 고독한 방어
북쪽과 남쪽의 이중 압박
백제를 건국한 온조 앞에 놓인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북쪽에는 끊임없이 위협하는 말갈(靺鞨)의 침입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한반도 서남부에 광활한 세력을 가진 마한(馬韓)이라는 거대한 벽이 버티고 있었다.
백제는 마한의 일부 제후국으로 인정받는 불완전한 독립국 상태였다.
당대 북방 위협을 가리키는 명칭은 기록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온조대에는 주로 예맥계 세력과 고구려의 동향이 압박이었고, 남쪽으로는 마한 연맹의 그늘이 길었다.
온조는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특히 마한에 대한 외교는 그의 가장 큰 숙제였다.
온조는 끊임없이 마한에 공물을 바치고, 때로는 충성을 맹세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는 스스로 힘을 기를 때까지 겸손한 제후의 자세를 유지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또 다른 부여 계통의 유민 집단이 남하했다.
온조는 이들을 기꺼이 수용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그의 전략은 실리(實利)와 인내(忍耐)였다.
한사군과의 통행·교역도 중시했다.
온조는 철과 소금을 바꾸기 위해 국경 장시(場市)를 열고, 분쟁은 사신 교환으로 눌렀다.
마한 왕의 비극적인 자살
세월이 흘러 온조의 통치 20년이 되자, 백제는 인구와 군사력이 마한의 일부 제후국을 압도할 만큼 성장했다.
노쇠한 마한왕은 이 급성장하는 백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기원후 9년, 온조는 마한왕에게 사신을 보내 회유와 위협을 동시에 가했다.
(전승) 마한왕은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백제가 자신을 병합하리라는 예감에 괴로워했다.
온조는 마한왕이 '노인(老人)'이 되어 더 이상 세상을 다스릴 기력이 없다는 소문을 퍼뜨려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마침내, 온조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마한의 중심부를 향해 진격했다.
마한의 백성들은 이미 백제의 질서와 부강함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저항하지 않았다.
마한왕은 온조의 군대에 포위되자,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한왕의 유언은 비장했다.
"나는 내 땅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백제왕은 내 백성들을 잘 다스려주기를 바란다."
온조는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는 마한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고, 백제의 영역을 한반도 중부와 서남부까지 확장했다.
온조는 마한의 핵심 세력을 굴복시키고 한강 이남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다수 소국은 저항과 회유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백제 권역에 편입되었다.
제4막: 굳건한 나라와 영원한 유산
도읍 이전과 북방의 위협
마한을 통합한 후에도 온조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비록 남쪽은 안정되었으나, 북쪽의 말갈(靺鞨)은 끊임없이 국경을 침범하며 백제를 괴롭혔다.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은 방어에는 좋았으나, 성장한 나라의 수도로서 영토의 중심에 있지 못했다.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와 하남·하북 이원설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엇갈린다.
온조는 한강 유역 요충지들을 오가며 방어와 경제를 겸한 거점을 탐색했고, 결과적으로 한성 일대를 장기 수도로 정비했다.
(논쟁) 온조는 북방의 위협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수도를 보다 안전하고 전략적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읍을 하북(河北) 위례성(현 북한의 대성산성 지역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음)으로 옮겼으나, 이 장소는 지리적으로 다시 말갈과 고구려의 압박을 받는 위치였다.
이 구체적 비정(比定)은 설이 많아 단정하기 어렵다.
결국 온조는 다시 한강 이남으로 돌아와 한성(漢城) 지역(하남 위례성 부근)에 새롭게 도읍을 정비하고, 이곳을 백제의 영구적인 수도로 삼았다.
이 빈번한 도읍 이전은 초기 백제가 겪었던 고구려와 북방 세력의 압박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온조는 단순한 개척자가 아니라, 현실적인 외교와 군사 전략을 바탕으로 나라를 유지했던 냉철한 통치자였다.
온조는 ‘성곽·저수·길’을 나라의 뼈대로 보았다.
성을 고치고 둑을 막아 들녘을 넓히고, 강을 따라 길을 냈다.
세금은 가볍게 거두고 흉년에는 면세를 명했다.
온조왕의 통치와 후대의 평가
온조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백제의 국력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그는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그는 친히 국경을 순시하며 방어 체계를 정비했고, 북쪽의 말갈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여 백제의 국경을 공고히 했다.
그의 북방 대응은 예맥·고구려 동향을 살피며 방어선과 관문을 촘촘히 보강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통치는 '검소함'과 '실리'로 요약된다.
그는 아버지 주몽에게 물려받은 왕족의 피와, 어머니 소서노에게 배운 현명한 통치술을 결합하여 백제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부여계 북방 예식과 한강 남쪽의 해상 문화를 아울러, 백제만의 예복과 의례가 태어났다.
새 도읍의 제천에는 북소리가 울리고, 강물 위로 횃불길이 이어졌다.
기원후 28년, 온조왕은 재위 4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백제 백성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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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학원 역사문화 공원 온조왕 동상 나무위키 |
온조왕은 고구려라는 위대한 태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새로운 나라 백제를 건설했다.
그의 삶은 비류와의 비극적인 형제애와, 주변 강국들 속에서 고독하게 생존을 모색했던 한 지도자의 투쟁이었다.
그는 단순히 왕실의 명분만 내세우지 않고, 현실적인 지리적 이점(하남 위례성)과 군사적 실리를 취하여 백제가 700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위례성이라는 새로운 도읍에 부여의 북방 유산과 마한의 남방 영토를 통합시킴으로써, 백제를 고대 동아시아의 중요한 국가 중 하나로 올려놓았다.
온조왕은 비록 북방의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났으나, 남쪽 땅에서 더욱 위대한 나라의 시조가 된 영원한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온조왕과 백제 건국을 사료(《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와 주요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연대·지명·사건은 유력설을 따르되 이설이 공존하며, 인물의 대사·심리는 문학적 상상을 포함합니다.
폭력·차별을 미화하지 않으며, 오류·누락은 제보해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표기는 한글 우선(필요 시 한자·영문 병기)이며, 향후 참고문헌·수정 이력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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