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말, 서울 용산 원효로 시립 ‘자제원’ 무연고 병동
카메라가 낡은 흑백 사진 위를 느릿하게 훑는다.
젊고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여성.
옆에는 말쑥한 서양식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다.
그들의 뒷모습은 기차역을 향한다.
사진을 들고 있는 주름진 손.
초점 잃은 눈이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쓸쓸한 겨울의 한낮, 창가에 앉은 노파의 등 뒤로 햇살이 스며든다.
노파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나혜석(羅蕙錫), 이름 석 자는 이렇게 외로운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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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청년기)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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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일기 (1910년 초, 수원 화성)
나는 나혜석(羅蕙錫, 수원 화성 출신).
이 넓은 세상에 여자의 자리는 왜 이리 좁은가.
아버지 나기정(羅基貞) 의 사랑을 받았지만, 가끔씩은 그 사랑이 나를 가두는 철창처럼 느껴진다.
오라버니(나경석)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날, 나는 결심했다.
나도 저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고.
붓을 쥐고 화폭에 세상을 담는 사람.
그게 바로 내가 되고 싶었다.
1913년, 나는 꿈에 그리던 女子美術學校(도쿄 여자미술학교, 현 조시비 미대 전신) 의 문을 두드렸다.
검은 교복을 입고 거리를 걷는 나. 세상 모든 것이 새롭게 빛났다.
동양화를 배우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서양화과를 택했다.
유화 물감의 강렬한 냄새, 붓질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색채. 내 영혼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이른바 신여성이 되었다.
조선의 봉건적인 옷을 벗고,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 “도쿄 ‘조시비’—여성 미술교육의 거점(현 캠퍼스 대표 사진).” 커먼즈 업로드. 위키미디어 공용 |
그곳에서 나는 최승구(게이오 대학 유학생)를 만났다.
그는 내가 존경했던 오라버니의 친구였다.
시를 쓰고, 그림을 사랑하는 섬세한 남자.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이해했고,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 첫사랑은 그렇게 시들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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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일기 (1910년 초, 도쿄)
나는 이광수(李光洙, 문인, 계몽운동가).
도쿄(일본의 수도)의 한 낡은 하숙방, 나는 춘원(春園)이라는 호를 쓰며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계몽(啓蒙, 미개한 민중을 깨우치는 일)만이 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 믿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나는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지식으로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다.
얼마 전, 나혜석(나경석의 누이동생)이라는 여학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다는 여자.
최승구(나경석의 친구)와의 사랑이 집안의 반대로 깨졌다는 소문도 들었다.
여자라는 족쇄를 스스로 끊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녀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행보는 내가 추구하는 신여성상의 표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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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졸업 전시회 (1918-1921년, 도쿄)
화폭에 담긴, 파격적이고 과감한 색채. 누드화가 전시장에 걸려있다.
(※ 1918년 ‘졸업전에서 누드 전시’ 단정은 확인 필요. 유학 전후의 누드 작업과 파장은 분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그림에 꽂힌다. 감탄과 경악이 뒤섞인 수군거림.
나혜석은 당당하게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캔버스 위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내는 화가,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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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일기 (1920년대 초, 경성)
나는 돌아왔다. 이 땅, 조선으로.
하지만 경성(서울의 옛 이름)은 여전히 나를 낯설어했다.
사람들은 나를 신기한 구경거리 보듯 했고, 나의 그림은 그저 '이상한 그림'으로 취급당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1921년 3월 18일, 경성(서울)의 한 낡은 서점에서 최초의 개인전(한국 여성 화가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나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잡지 〈신여자〉, 동인지 〈폐허〉 등에 글과 그림을 싣기 시작했다.
나는 김우영(金雨英, 변호사)과 결혼했다.
그는 내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똑똑하고, 신사적인 남자였다.
나는 결혼 조건으로 세 가지(일부 기록은 네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평생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둘째, 시어머니를 모시지 말 것. 셋째,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남편을 사랑할 것."
사람들은 경악했다.
특히 ‘자유연애결혼(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선택하여 하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당대 사회에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사회의 틀을 깨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김우영은 훌륭한 남편이었지만, 그 역시 시대의 아들이었다.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나의 자유를 인정하려 했다.
나는 '현모양처(賢母良妻, 어진 어머니와 착한 아내)'라는 허상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붓을 들고 세상으로 나갔다.
여성의 인권 신장, 남녀평등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을 다녔다.
"여자도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 여자 취급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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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자화상(c.1928). 스스로를 주체로 세운 신여성 화가의 시선.” PD(공공영역). 위키미디어 공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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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일기 (1920년대 초, 경성)
나혜석(나경석의 누이동생)이 김우영(변호사)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유연애결혼.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는 소문은 경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나는 내심 그녀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녀는 나혜석(羅蕙錫)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 마리 날개 달린 새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달랐다.
나는 계몽을 믿었지만, 그 방식은 그녀와 달랐다.
나는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서양의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이 조선의 발전이라고 믿었다.
나의 소설 「무정(無情)」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는 문인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미묘한 경쟁심과 동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글은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과격했다.
나는 그녀의 방식이 조선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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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919년, 경성)
나혜석은 동료 여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한다.
그녀는 군중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다.
이글거리는 눈빛, 터질 듯한 목소리. 거리에 울려 퍼지는 함성은 자유를 향한 염원이었다.
그녀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교도소)에 투옥된다.
차가운 감옥 속에서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감옥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여성 해방에 대한 열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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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독립운동가 수감의 공간(현 역사관).”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나혜석의 일기 (1927년, 파리)
파리(프랑스의 수도), 예술의 도시.
남편(김우영)의 외교관 업무를 따라왔다.
나는 이곳에서 꿈에 그리던 자유를 만끽했다.
몽마르트르(파리의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언덕)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했다.
나는 이곳에서 여성도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여자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는 사실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 자신을 찾은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최린(崔麟,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조선의 운명을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나를 이해하고, 나의 열정을 존중해주는 남자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끌렸다.
파리의 밤거리, 우리는 함께 걸으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나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사랑의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불꽃이었다.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사그라질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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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파리의 나혜석. 몽마르트르에서 확장된 미감과 자유.” PD-Japan-oldphoto. 위키미디어 공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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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일기 (1929년, 경성)
파리(프랑스의 수도)에서 나혜석(羅蕙錫)과 최린(崔麟)의 염문설이 퍼졌다.
경성은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나혜석을 '요부(妖婦)'라며 손가락질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자유를 갈망했지만, 조선의 봉건적인 가치관은 그녀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꽃처럼 타오르다 재가 될 운명이었다.
나는 그녀와 달랐다.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조선의 운명을 위해서는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일의 길(일제에 협력하는 행위)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비난받았지만, 내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내 가문과 내 신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보며 부러워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녀처럼 살다가는 파멸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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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1942)—계몽의 아이콘에서 친일 논란의 상징으로.” PD. 위키미디어 공용 |
나혜석의 이혼 (1930년, 경성)
남편 김우영은 결국 이혼을 통보했다.
나혜석은 절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혼 고백서'를 발표(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했다.
"정조는 남자에게도 똑같이 있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사회는 다시 한번 경악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최린은 그녀를 외면했다.
홀로 남겨진 나혜석은 위자료(이혼 시 상대에게 지급하는 돈) 청구 소송까지 제기(1934년)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의 냉대는 그녀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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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기의 정면 샷 일본 구법 PD. 위키미디어 공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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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일기 (1940년대 말, 서울 시립양로원)
나는 혼자다.
아이들(나혜석의 자녀)은 나를 버렸다.
사회는 나를 잊었다.
병들고, 가난에 찌든 나는 시립양로원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내 그림은 모두 사라졌다.
내 이름은 '불륜녀', '망나니'라는 오명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외쳤던 '여성 해방'은, 그저 소란스러운 신여성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속인 적이 없다.
나는 내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여인들이 아직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너무나도 앞서나갔다.
하지만 언젠가, 나의 이야기가 다시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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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일기 (1940년대, 경성)
나혜석(羅蕙錫)의 소식을 들었다.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나는 내 삶을 지키기 위해 친일(日帝에 협력하는 행위)의 길을 걸었고,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잃었다.
누가 더 나은 삶을 살았는가.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깊은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그녀의 글을 기억한다.
그녀가 외쳤던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말.
그 말은 시대의 이념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인 진리였다.
나는 그녀를 비웃었지만, 그녀의 말은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그녀의 글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녀의 불꽃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 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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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죽음 (1948년)
눈 내리는 겨울, 차가운 방에서 나혜석은 눈을 감는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붓이 쥐어져 있다.
그녀의 쓸쓸한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잊혀진다.
그녀의 유해는 화장되어 바람에 날린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자유로운 영혼처럼.
현대, 미술관
화려한 조명 아래, 나혜석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이 그녀의 그림 앞에서 감탄한다.
젊은 여성들이 그녀의 그림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며 이야기한다.
"이 언니, 진짜 힙하다." "우리 시대의 페미니스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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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무용수들’(1927). 야수파적 색채와 리듬.”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나는 나혜석(羅蕙錫). 나는 한 시대에 갇혔지만, 나의 영혼은 시대를 넘어섰다.
나의 그림은, 나의 글은, 나의 삶은, 이 땅의 모든 여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죽었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너희들의 영혼 속에, 너희들의 자유 속에 살아있다."
나혜석의 삶과 예술은 후대 여성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사회의 억압에 저항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선구적인 여성운동가로 재평가되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 여성운동계에서 그녀의 삶과 사상은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한국 근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특히 파리 유학 후의 야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그림은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 시, 논설 등 다양한 글을 통해 여성 해방 사상을 전파했다.
특히 「경희」와 「이혼고백서」는 한국 초기 페미니즘 문학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여성의 인격과 권리를 주장했다.
봉건적인 현모양처론을 비판하고, 이혼 시 재산 분할, 가사 노동의 가치 등 시대를 앞선 주장을 펼쳤다.
최린과의 불륜 스캔들, 자녀 양육 포기 등 그녀의 사생활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특히 자식들에게 행한 학대와 방임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일각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녀의 삶은 여러 소설, 연극,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그녀의 삶과 예술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의 삶은, 비극적인 운명이었지만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불꽃이었다.
이 글은 나혜석·이광수의 1인칭 일기 형식을 활용한 창작적 재구성입니다.
연도·사건(유학·3·1운동 투옥·1921 개인전·1931 이혼·동년 ‘조선미전’ 특선·1934 「이혼 고백서」·1948 사망 등) 은 확인 가능한 사료를 토대로 했으며,
내면 독백·대사·장면 전환은 문학적 장치입니다.
논쟁적 사안(파리에서의 염문, 결혼 ‘조건’의 세부, 구금 기간, 말년의 구체 정황, 사생활 평가)은
사료와 연구에 이견이 있어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오류 제보가 있을 경우 확인 후 신속히 정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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