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여름, 시코쿠의 오세 마을(愛媛県大瀬村)
녹음이 짙은 숲, 흐르는 강물, 그리고 낡은 목조 가옥들이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고요함이다.
한 소년이 강가에 홀로 앉아 있다.
이름은 겐자부로(健三郎, 10세).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 시골 마을에서,
그는 전쟁과 죽음에 대한 어른들의 막연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다.
겐자부로의 아버지는 이미 전쟁터에 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패전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겐자부로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는 곧 닥쳐올 비극을 예감하는 듯, 숲 속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수많은 발걸음 중 하나가 될 뿐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나만의 빛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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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 초상 | Kenzaburō Ōe portrait"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U.S. Embassy Tokyo upload). 위키미디어 공용 |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마을은 패전 소식과 함께 혼란에 빠진다.
겐자부로는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텅 빈 눈으로 밥을 짓는 모습을 보며 깊은 절망을 느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일본이라는 나라의 패배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깨닫는다.
어머니는 묵묵히 밥을 뜬다.
식탁에는 침묵만이 흐른다.
겐자부로는 밥을 먹다 말고 묻는다.
"엄마, 아버지는 왜 죽은 거야?"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답한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어. 나라를 위해서라고."
겐자부로는 눈물을 흘린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버지는 그냥 죽은 거야."
어머니는 겐자부로의 말에 울음을 터뜨린다.
두 모자는 텅 빈 집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운다.
이후 겐자부로는 도쿄로 상경하여 도쿄대학교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며 사르트르, 카뮈 등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한다.
그는 전후 일본 사회의 허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문학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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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대학교 야스다 강당 | Yasuda Auditorium, University of Tokyo" CC BY-SA 3.0(Wikimedia Commons/NShunsuke & Laichuan Yinfu). 위키미디어 공용 |
겐자부로는 한참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 토론 중인 강의실을 박차고 나온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그의 친구이자 후에 영화감독이 되는 이타미 주조(伊丹十三)가 그를 뒤따라온다.
"왜 그렇게 화를 내?" 이타미가 묻는다.
"이런 식의 토론이 무슨 의미가 있지? 우리는 지금 허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진짜 문제는 여기, 바로 우리 발밑에 있는데!"
겐자부로는 외친다.
이타미는 담배를 물고 웃는다.
"겐, 너는 너무 심각해.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이 사회의 허위의식을 깨부수고 싶어."
겐자부로의 눈은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는 1958년 단편 <사육(飼育)>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이 작품은 전쟁의 잔혹함과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행보는 언제나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63년, 오에 가의 작은 방
겐자부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아들 히카리(光)가 뇌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이다.
의사는 겐자부로에게 아들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겐자부로는 충격에 휩싸인다.
그는 아들을 포기하려 하지만, 이내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부성애를 느끼며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이 과정은 그의 작품 <개인적인 체험(個人的な体験), 1964>에 고스란히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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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체험』 영문판 타이틀 | Title page, A Personal Matter" CC0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겐자부로는 멍하니 병원 복도에 앉아 있다.
아내(유카리)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는다.
"여보, 괜찮아. 우리가 함께 헤쳐나가자."
겐자부로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나는... 겁이 나. 내가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내는 조용히 겐자부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해낼 수 있을 거야. 우리 함께 이 아이를 키우는 거야."
겐자부로는 아내의 손을 꽉 잡는다.
그때,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비춘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그의 문학적 투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겐자부로는 아들 히카리와의 삶을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는다.
장애를 가진 아들과의 교감, 소통, 그리고 장애를 넘어선 공존의 이야기는 그의 문학을 더욱 깊이 있고 풍부하게 만든다.
히카리는 이후 작곡가로 성장해 음반을 발표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간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의 격동기
겐자부로는 문학 활동과 더불어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핵무기에 반대하며 반전 평화운동에 동참한다.
특히 <히로시마 노트(ヒロシマ・ノート), 1965>를 통해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삶을 조명하며 반핵 운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는 언제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극우 세력의 비난과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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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 원폭 돔 | Hiroshima Peace Memorial (Genbaku Dome)" CC BY-SA 4.0(Wikimedia Commons/Connected Open Heritage). 위키미디어 공용 |
겐자부로는 편집자와 마주 앉아 있다.
편집자는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선생님, 극우 세력의 협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신변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겐자부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이야. 히로시마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해."
편집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겐자부로를 바라본다.
"선생님, 문학에만 집중하셔도 충분히 존경받으실 겁니다."
"아니. 나는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그것이 나의 사명이야."
겐자부로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시기 겐자부로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와도 대립각을 세운다.
극우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미시마와 반전 평화주의자인 겐자부로는 문학적,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거장의 충돌은 일본 문단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1994년, 스웨덴 스톡홀름
겐자부로는 일본 작가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전 세계의 찬사가 쏟아진다.
그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삶과 신화가 응축되어 오늘의 인간 조건을 당혹스럽게 비추는 상상 세계"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상 소식은 일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전후 일본의 자화상을 끊임없이 비판해온 그에게 주어진 상이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각별했다.
그해 그는 일본 정부의 문화훈장 수훈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며, 평화헌법(헌법 9조) 옹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겐자부로는 단상에 올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아들 히카리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나의 문학은 아들 히카리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히카리는 나의 빛이자 나의 어둠이었습니다."
장내에는 감동의 물결이 흐른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은 또 다른 논란의 시작이었다.
일부 극우 세력은 그를 '반일' 작가로 비난하며 수상 자격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일본 정부의 문화훈장을 거부하면서 또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겐자부로는 기자회견장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옹호하는 작가입니다. 군국주의를 반성하지 않는 정부의 훈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발언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1995년, 도쿄
겐자부로의 가족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들 히카리는 음악적 재능을 보이며 작곡가로 성장한다.
히카리의 음악은 겐자부로의 문학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다.
겐자부로는 아내와 함께 히카리를 돌보며 조용한 일상을 보낸다.
이 시기 겐자부로의 가족은 또 다른 비극을 겪는다.
1997년, 그의 처남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가 사망한다(추정 자살).
이타미는 야쿠자 관련 작품 이후 협박에 시달렸고,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지만 사회적 충격은 컸다.
겐자부로는 이타미의 죽음에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겐자부로는 이타미의 영정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의 옆에는 아내와 아들이 함께하고 있다.
겐자부로는 속으로 되뇌인다.
"이타미, 너는 왜 그렇게 서둘러 갔느냐. 나는 아직 너와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는 이타미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번 삶의 의미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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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타미 주조, 1992 | Jūzō Itami, 1992"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2010년대, 도쿄
겐자부로는 노년기에 접어든다.
그는 여전히 글을 쓰지만, 예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한다.
그는 종종 고향 오세 마을을 찾아가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겐자부로의 삶은 빛과 그림자, 성공과 실패, 찬사와 비난이 교차하는 복잡한 여정이었다.
겐자부로는 어린 시절 앉아 있던 강가에 앉아 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몽타주가 이어진다.
어린 겐자부로, 청년 겐자부로, 그리고 늙은 겐자부로가 교차한다.
"나는 평생을 어둠의 숲 속을 헤매었다.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의 손을 잡고, 아내의 손을 잡고, 나의 길을 걸었다."
노년의 겐자부로는 책상에 앉아 펜을 든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는 마지막 글을 쓴다.
글의 내용은 그의 삶의 총체적 고백이자, 후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우리는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존재들이다. 나는 나의 글을 통해 그 빛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의 빛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023년, 오에 겐자부로 사망
책상 위에는 그가 쓴 마지막 원고가 놓여 있다.
창밖에는 햇살이 비친다.
"나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의 글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글을 통해 사람들은 나의 고뇌와 투쟁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겐자부로의 젊은 시절 모습이 숲 속 오솔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뒤를 아들 히카리가 따르고, 아내 유카리가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모습은 희미한 빛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나의 숲 속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나는 영원히 빛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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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 1962 | Kenzaburō Ōe, 1962" 위키미디어 공용 |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꾸준히 사회 참여를 이어갔다.
그의 반전 평화주의적 태도와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일본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그의 용기 있는 발언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장애를 가진 아들과의 교감은 장애인 인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겐자부로의 문학은 전후 일본 문학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삶은 한 작가의 치열한 문학적 투쟁과 한 인간의 고뇌가 얽혀 있는 한 편의 영화와 같다.
그의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논란과 비판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삶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신뢰 자료를 대조해 참고했습니다.
아쿠타가와상 연보(1958), 『개인적인 체험』(1964)·『히로시마 노트』(1965) 출간 연도, 1994년 노벨문학상 및 문화훈장 거부 사실, 이타미 주조(1997) 사망 경위 논쟁, 2023년 작가 사망.
개인사 세부(모친 성명, 유년기의 일부 연대·심리)는 회고·전기마다 서술이 달라
본문에서는 특정 실명·단정 기술을 피하고 맥락 설명으로 처리했습니다.
사실 오류나 더 나은 사료 제보를 환영합니다.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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