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 삼별초 항쟁: 개경 환도 거부와 진도·제주 결전 (Bae Jung-son)

 

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골과 화평을 택하며 수도를 개경으로 돌리고 

삼별초(고려 무신정권 친위대) 해산을 명했다.

그 순간 강화의 성벽은 외적을 막는 방패가 아니라, 우리를 체포하려는 포위선이 되었다.

배중손(裵仲孫 ? ~ 1271년)은 “여기 남으면 끝”이라 판단했고, 성을 비워 바다로 나갔다.

우리는 승화후 왕온을 옹립해 명분을 세우고, 강화에서 진도·제주로 거점을 옮기며 

해협과 조류를 이용한 기습전 "섬과 바다를 무대로 한 움직이는 전쟁"을 시작했다.

강화 고려궁지 출입부와 유구 / Goryeo Palace Site (Ganghwa) entrance and remains
Wikimedia Commons, “Goryeogung Palace 20181013 01.jpg”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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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왕’을 세웠다.

승화후 왕온(왕족·承化侯)을 옹립해 정통의 간판을 꺼내 들었다.

해군력과 섬 거점을 축으로 버티는 전략이었고, 

국왕 원종과 원(몽골)의 연합에 맞선 독자 정부의 선언이었다.

옹립식은 번잡하지 않았다.

기도문이 짧았고, 깃발이 빨랐다.

섬의 날씨가 그렇듯, 결심도 바람을 탔다.


진도 용장성 인근 정충사의 배중손 동상
디지털 인문학 센터

배중손의 사생활에 대해 남은 기록은 거의 없다.

어디 출신인지, 언제 결혼했고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논쟁).

동료들은 “말수가 적고, 밤에 회의를 선호했다”는 식의 주변 증언만을 남겼다(전승).

그가 거칠게 다듬은 수염을 잡아끈으로 묶고, 

병사들과 젖은 말안장 가죽을 말리며 전술을 논했다는 장면도 구전으로 전해진다(전승).

확실한 건 두 가지였다.

바다에 익숙했고, 결정을 빠르게 내렸다.


거점은 곧바로 진도로 옮겨졌다.

진도의 용장성(전라도 진도·지형을 활용한 산성)은 삼별초의 바다 전술과 잘 맞았다.

해류가 빠른 해협, 안개가 내려앉는 해구, 얕고 깊음이 반복되는 갯벌이 배중손의 아군처럼 움직였다.

그는 횃불을 3개 묶어 방패처럼 흔드는 신호를 만들었고, 

물러설 때 남겨놓을 그물과 말뚝의 위치까지 도면 없이 기억했다(전승).

“밤물결 두 번이면 매복, 세 번이면 철수.”

그의 약속은 간단했다.


진도에서의 첫 겨울은 배중손에게도 가혹했다.

민가 곡식이 바닥나자, 그는 장정들에게 경작지를 나누어 경호대와 농번을 섞는 일정을 만들었다.

“싸움은 짧고, 식량은 길어야 한다.”

처음으로 삼별초의 막사에 곡괭이와 호미가 들어왔고, 새벽 순찰표 옆에 물때표가 붙었다.

바다를 읽던 조직이 땅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 판단은 살아남기 위한 생활의 기술이었다.


1271년 봄, 여·몽 연합군이 용장성으로 밀고 들어왔다.

고려의 김방경(무장)과 몽골 장수 홍다구가 합세했고, 섬을 포위하는 전함의 숫자가 물결처럼 늘어났다.

성벽 위의 삼별초 경계는 낮엔 화살, 밤엔 조류였다.

배중손은 성문을 비워 적을 끌어들인 뒤 좁은 협로에서 역습하는 전술을 택했다.

기세는 좋았지만, 포위망은 천천히 조여 왔다.

성 안에서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날 새벽, 그는 장막을 걷고 왕온에게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성벽은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 해가 지기 전에 남문을 비워야 합니다.”

왕온의 얼굴은 피곤했고, 어린 아들 왕환이 곁에서 졸고 있었다.

왕을 세운 사람이 전장을 지키고, 전장을 지키는 사람의 왕은 성을 벗어날 준비를 했다.

엉킨 명분과 현실이, 좁은 객실의 촛불 하나에 다 담겼다.


용장성이 무너지는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연합군의 화살이 하늘을 가렸고, 북소리가 갯벌을 흔들었다.

배중손은 북문으로 돌려치기를 시도했고, 길잡이에게 갯골 사이의 가장 얕은 수심을 물었다.

그가 검을 반쯤 뽑아 들었을 때, 남문에서 혼란의 함성이 올라왔다.

패주가 시작되면 모두 끝난다.

그는 군마를 돌려 남문 쪽으로 급히 내려갔다.


진도 함락의 구체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논쟁).

다수의 기술은 이 무렵 배중손이 전사했다고 전한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지막 발을 디뎠는지, 어떤 병사와 함께였는지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전승).

한 전언은 “남문 옆 참호에서 끝까지 활을 쏘았다”고 하고, 

다른 전언은 “포위망을 깨려다 갯골에 말이 빠졌다”고 적는다(전승).

사실관계는 갈리지만, 결과는 같다.

이때 삼별초의 지도력이 절반 잘려 나갔다.


진도 용장성 전경 / Yongjang Fortress (Jindo) panorama
Wikimedia Commons, “진도 용장성.jpg” (KOGL 제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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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온과 그의 아들 왕환은 성을 벗어나 피신하다가 홍다구에게 붙잡혀 피살되었다.

삼별초 정권의 ‘정통’ 간판이 파손되는 순간이었다.

도장 하나가 찢기면 서류는 무력해진다.

잘라 든 깃발이 바람을 잃고, 바람을 잃은 병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왕을 잃은 군대는 한 번 더 재편되어야 했다.

그 역할은 김통정(장군)이 이었다.


김통정은 잔존 삼별초를 이끌고 탐라(제주)로 들어갔다.

거점은 항파두리성(애월읍 일대·내성·외성 구조).

그는 해도 대신 말을 이용해 탐라의 물길과 바람을 기록하게 했다.

말의 채찍에 매단 노끈에 매듭을 지어 바람세기를 표기하고, 석벽의 이끼선으로 수분을 가늠했다(전승).

생활과 방어를 결합한 만들기였다.

배중손이 설계했던 ‘섬-해협-성’의 삼각형은, 제주에서 마지막 모양을 갖추었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안내 표석과 입구 풍경 / Entrance marker of the Anti-Mongol Historic Site at Hangpadu-ri
Wikimedia Commons, “Hangmong Historic Site entrance Jeju.jpg”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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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의 2년은 숨과 고립의 반복이었다.

경비선을 늘리면 식량이 줄고, 식량을 늘리면 경비가 헐거워졌다.

김통정은 회유 사신의 말길을 끊었고, 원종의 귀순 권고를 거절했다.

그때마다 밤의 횃불은 더 많이 필요했다.

다만 누구도 말하지 않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아이들이, 섬에서 자라고 있었다.


배중손의 가족사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진도 시절 그가 병사들의 가족을 섬으로 옮기게 한 뒤, 부녀자와 아이들을 따로 먹여야 했다는 기록의 조각들이 전해진다(전승).

군량은 군량이고, 식구는 식구였다.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남자들이, 

밤이면 아이 발목에 모래를 씻겨 주었다는 얘기는 쓸쓸하고도 정확하게 현실적이다(전승).

‘항쟁’의 사생활은 이런 사소한 일들 위에 있었다.


1273년 봄, 여·몽 연합군이 다시 제주를 조였다.

함대의 북이 세 번 울렸고, 성벽 바깥으로 호출 깃발이 펄럭였다.

항파두리성(제주 애월읍)의 석벽은 낮고 넓었으며, 성 안의 숨은 깊고 얕았다.

결정적인 날, 김통정은 성문을 닫고 산쪽 길을 열었다.

남은 병사들은 내성과 외성 사이에서 버티다가 흩어졌다.

얼마 뒤, 그는 산중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이 곧 삼별초 항쟁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항파두리성 내부 성곽·토루 잔존 / Inner earthwork remains at Hangpadu-ri Fortress
Wikimedia Commons, “Hangmong Historic Site inside Jeju.jpg”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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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손이 남긴 사적 기록은 없지만, 주변 문서와 상대의 보고서가 그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바다를 이용해 육군을 이기려 했던 장수’, ‘왕의 간판을 세워 명분을 지키려 한 실무자’, ‘퇴각로와 농번기를 같이 고민한 지휘자’.

그의 일상은 적의 침공 날짜와 물때표 사이에서 갈라졌다.

바람이 바뀌면 회의가 앞당겨지고, 조수표의 숫자가 높으면 배의 짐이 줄었다.

전쟁은 이처럼 생활의 재배치로 체감된다.

배중손은 그 재배치의 현장에 오래 있었다.


그를 두고 “원에 직접 봉신(종속 세력)을 청해 전라도 직할을 요구했다”는 기록도 간간이 등장한다(논쟁).

여러 문헌이 뒤섞여 전승된 탓에, 그의 전략적 구상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가 ‘지도를 바꾸어 버티는 법’을 알았다는 점이다.

바람과 조수, 섬과 성, 왕과 병사의 배치를 바꾸어 적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법.

그 법은 잠깐 성공했고, 결국에는 패배로 끝났다.

패배가 곧 실패를 뜻하진 않는다.

그가 붙든 가치는, 오래 남는다.


배중손 기록의 빈칸을 억지로 채울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기록되지 않은 시간들. 피난민에게 건넨 마른 생선 한 장, 

병사 아내의 병문안을 위해 회의 시간을 바꾼 밤, 

아이들의 숨바꼭질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패총 옆에 경계선을 옮긴 하루. 

이런 장면들이 항쟁의 안쪽을 지탱했을 것이다(전승).

전쟁은 늘 큰 깃발로 기록되지만, 그 깃발은 작은 생활들에 깃대를 세운다.

배중손의 항쟁도 그랬다.

승리로 끝나지 않았지만, 버티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남겼다.

섬과 성, 그리고 생활의 연대라는 방법을.


제주 항파두리성 ‘항몽순의비’ 비석 전경 / Monument to the Anti-Mongol Martyrs at Hangpadu-ri Fortress, Jeju
Wikimedia Commons, “Historic Site of Anti-Mongolian Struggle monument.jpg”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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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진도 용장성의 흔적과 제주 항파두리의 성터에는 바람이 많다.

관광객이 삼별초 표지석 옆을 지나고, 아이가 성벽의 낮은 돌을 건너뛴다.

그 길의 밑바닥에는 이름 없는 날들이 겹겹이 깔려 있다.

병사의 일정표, 아이의 낮잠 시간, 바다의 물때, 왕의 전령.

그 날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애를 만든다.

배중손의 이름이 남은 이유는, 그가 그 날들을 총지휘했기 때문이다.

지도에 없는 바람을 읽고, 한 번 더 묶을 매듭을 찾던 사람의 이름으로.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Bae Jung-son (d. 1271), a Sambyeolcho commander, rose when the Goryeo court made peace with the Mongols in 1270, returned the capital to Gaegyeong, and ordered the Sambyeolcho disbanded. 
Seeing Ganghwa’s walls as a trap, he enthroned Prince Ong as a figurehead and shifted to mobile sea warfare—Ganghwa → Jindo (Yongjang Fortress) → Jeju (Hangpadu-ri). 
Bae died during Jindo’s fall (accounts differ); Kim Tong-jeong fought on until Jeju fell in 1273. 
Little is known of Bae’s private life beyond oral h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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