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의 돌격: 게티즈버그, 운명을 건 3일 간의 전쟁
북으로 향하는 굶주린 늑대들 (1863년 7월 1일)
절박한 북상
1863년 여름, 남부 연합군(Confederate States Army)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로버트 E. 리(Robert E. Lee, 남부 연합군 총사령관) 장군은 연이은 승리로 자신이 무적임을 증명했다.
특히 최근 찬셀러스빌 전투(Battle of Chancellorsville)에서 북부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을 궤멸시킨 것은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연합군의 핵심 지휘관)이라는 위대한 장군을 잃는 쓰라린 대가도 함께 가져왔다.
리 장군은 북부 침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버지니아 주(Virginia)의 농토를 짓밟고 있던 북군을 쫓아내고, 북부 펜실베이니아 주(Pennsylvania)의 기름진 땅에서 군수품과 식량을 징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만약 북부 도시를 함락시키거나, 북군에게 치명타를 입힌다면, 유럽 열강(영국과 프랑스)이 남부를 독립국으로 승인할 명분이 생길 터였다.
이는 남부의 마지막 도박이었다.
북군은 혼란에 빠졌다.
리 장군이 북쪽으로 진격하자,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북부 대통령)은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장군을 해임하고, 대신 조지 미드(George Meade, 북부 포토맥군 신임 사령관) 장군을 급히 임명했다.
미드는 이 중요한 순간에 지휘권을 맡게 된 것에 큰 부담을 느꼈지만, 워싱턴 D.C.와 필라델피아를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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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E. 리 위키미디어 Commons |
우연한 충돌
남부 연합군의 보병 부대는 펜실베니아의 게티즈버그(Gettysburg)라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리 장군의 병사들은 행군에 지쳐있었고, 특히 신발이 부족했다.
게티즈버그에는 큰 신발 공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병사들의 발을 이끌었다. (썰)
다만 실제로는 사방팔방으로 뻗은 도로망이 교차하고 남쪽의 고지대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술·보급상 자연히 병력이 모인 측면이 컸다.
1863년 7월 1일 아침, 헨리 히스(Henry Heth, 남군 사단장)가 이끄는 남군 부대가 서쪽에서 게티즈버그를 향해 진격했다.
그때, 마을 근처 맥퍼슨 능선(McPherson Ridge)에서 뜻밖의 상대를 만났다.
북군의 존 뷰퍼드(John Buford, 북군 기병대장)가 지휘하는 기병대였다.
뷰퍼드는 단순한 기병 정찰대가 아니었다.
그는 리 장군이 이 지역으로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저 능선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패배한다." 뷰퍼드는 직감했다.
그의 기병대는 말에서 내려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들은 보병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 대사는 후대 회고에 근거한 재현적 표현이지만, 뷰퍼드가 ‘고지를 선점해 시간을 번다’는 핵심 판단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절규의 7월 1일
전투는 뷰퍼드 기병대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발을 찾으러 온 줄 알았던 남군이었지만, 곧 북군 보병대가 속속 도착하면서 전장은 커져갔다.
특히 북군의 1군단(I Corps)과 남군의 힐(A.P. Hill) 군단 간의 교전은 치열했다.
오후가 되자, 남군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졌다.
북군은 맥퍼슨 능선과 신학교 능선(Seminary Ridge)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북군 1군단장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 북군 최정예 군단장)는 전장의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다 저격당해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북군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북군은 피를 흘리며 게티즈버그 마을을 관통해 퇴각했다.
남군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패주하던 북군이 멈춘 곳은 마을 남쪽의 언덕들이었다.
이곳이 바로 세메터리 언덕(Cemetery Hill, 북군이 묘지처럼 생긴 능선을 따라 형성한 방어선)과 컬프스 언덕(Culp's Hill)이었다.
이 언덕들은 마치 뒤집어진 'J'자 모양으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완벽한 지형이었다.
남군 지휘관들은 이날 저녁 공격을 감행해 북군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리 장군은 지친 병사들의 재정비를 명령했다.
이는 리 장군이 게티즈버그에서 저지른 첫 번째 실수로 후대에 기록된다.
다만 7월 1일 저녁 ‘바로 쳤어야 했다’는 평가는, 어수선한 지형 파악과 부대 결집 미비·피로도를 고려하면 꼭 단정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북군은 언덕을 붙잡고, 7월 2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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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프스 힐의 남부연합군 피켓 위키미디어 Commons |
피로 물든 언덕과 밀밭 (1863년 7월 2일)
리의 오판과 롱스트리트의 침묵
7월 2일 아침, 리 장군은 북군의 측면을 동시에 공격해 중앙으로 밀어붙이는 계획을 세웠다.
남군 최정예 군단장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리 장군의 가장 신뢰받는 참모)는 정면 공격 대신 북군의 측면을 돌아 우회 공격하는 것을 주장했으나, 리 장군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리 장군은 북군이 아직 방어선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고 오판했고, 이 오만함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 지형 정찰 지연과 지휘 교신 혼선까지 겹치며 결심과 발동 시점이 늦어졌고, ‘누가 얼마나 책임이 큰가’는 사료에 따라 해석이 갈린다.
이날 전투의 가장 격렬한 전장은 북군 방어선의 좌측이었다.
이 좌익 방어선은 미드 장군이 롱스트리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지정한 핵심 지역이었다.
댄 시클스의 치명적 오판
북군 3군단장 댄 시클스(Dan Sickles, 전직 정치인 출신)는 미드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방어선을 전방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리틀 라운드 탑(Little Round Top, 게티즈버그에서 가장 중요한 고지) 같은 중요 지점을 비워둔 채, 전진 배치된 피치 오차드(Peach Orchard, 복숭아 과수원)와 밀밭(Wheatfield)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는 북군의 방어선에 거대한 구멍을 낸 치명적인 실수였다.
다만 ‘명령 위반’의 범위와 전진 배치의 불가피성은 지금도 논쟁이지만, 결과적으로 좌익 방어가 크게 노출된 대가를 치렀다는 점은 분명하다.
롱스트리트 군단은 오후 늦게 시클스의 전진 배치된 진영을 맹렬히 공격했다.
밀밭과 악마의 굴(Devil's Den, 바위 지대)은 그야말로 도살장이 되었다.
북군 3군단은 전멸 직전까지 몰렸고, 시클스 자신도 다리를 잃었다. 밀밭은 '피의 웅덩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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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l. Warren on Round Top”(워런 장군, 리틀 라운드 탑) 퍼블릭 도메인. The Library of Congress |
리틀 라운드 탑의 총검 돌격
남군의 공격이 북군의 좌익을 찢고 있을 때, 가장 중요한 전투는 리틀 라운드 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고지를 빼앗기면 북군의 모든 방어선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북군 5군단 예하의 조슈아 체임벌린(Joshua Chamberlain, 북군 대령이자 전직 대학교수)이 이끄는 20 메인 연대(20th Maine Regiment)는 리틀 라운드 탑의 가장 취약한 지점, 즉 산 정상에서 가장 험준한 바위 지점을 방어하고 있었다.
남군은 산을 기어오르며 필사적으로 공격했지만, 체임벌린의 부대는 탄약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체임벌린은 역사적인 명령을 내렸다.
"총검 돌격(Bayonet Charge)!"
탄약이 없는 총에 총검을 끼운 300여 명의 북군 병사들이 미친 듯이 산 아래로 내달렸다.
이 갑작스러운 역공에 남군은 완전히 당황했고,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무너졌다.
이 총검 돌격은 북군 좌익의 붕괴를 막아낸 영웅적인 행동이었으며, 게티즈버그 승리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였다.
7월 2일 밤이 되자, 북군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요 고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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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 돌격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운명을 건 1마일의 행진 (1863년 7월 3일)
마지막 도박
7월 2일의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리 장군은 여전히 승리를 확신했다.
그는 좌우 측면 공격이 모두 실패했지만, 북군이 측면 방어에 모든 힘을 쏟았을 것이므로, 중앙 방어선은 필연적으로 약해졌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롱스트리트 장군은 다시 한번 반대했다.
그는 리 장군에게 "저들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저들은 강력한 포병대와 보병대를 중앙에 집중시킬 것입니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리 장군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중앙의 '결전의 각(The Angle)'이라고 불리는 지점을 향해 전군을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공격의 선봉에는 조지 피켓(George Pickett, 남군 사단장)의 버지니아 병사들을 주축으로 한 12,000명의 남군이 섰다.
포병 대전
오후 1시, 게티즈버그 전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포병 대전의 무대가 되었다.
150문의 남군 포병이 북군의 방어선인 세메터리 능선(Cemetery Ridge)을 향해 맹렬하게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은 약 2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폭음은 수십 마일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북군 사령관들은 포격이 끝난 후 남군이 돌격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포격을 잠시 중단해 남군에게 포탄이 부족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당시 북군 포병 지휘관 헨리 헌트(Henry Hunt)가 사격 통제와 탄약 절약·기만 운용을 지휘해, 남군 포격 종료 직후 재집중 사격을 재개할 여지를 만든 점이 결정적이었다.
남군 지휘부는 북군의 포병대가 궤멸되었다고 오판했다.
드디어 오후 3시, 포격이 멈추자, 롱스트리트는 눈물을 머금고 피켓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피켓의 돌격: 하이 워터 마크
12,000명의 남군 병사들은 약 1마일(1.6km)에 달하는 개활지(Open Field)를 가로질러 북군의 중앙 방어선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들의 모습은 장엄했지만, 동시에 처절했다.
행진은 ‘완벽한 일렬 종대’가 아니라, 여러 여단이 전열(line of battle)로 횡대를 유지한 채 전진하는 형식이었고, 일부 구간에서는 지형·포격을 피하려다 간격이 흐트러졌다.
북군은 매복해 있던 포병대를 재가동하고 보병들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남군 병사들은 북군의 포격과 소총 사격의 십자포화 속에 무더기로 쓰러져 나갔다.
마치 대서양의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듯, 그들의 진격은 북군 방어선(결전의 각) 바로 앞에서 멈췄다.
몇몇 남군 병사들은 방어선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아미스테드(Lewis Armistead) 장군은 북군의 최전선까지 돌파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곳에서 쓰러졌다.
이 지점이 바로 '하이 워터 마크(High Water Mark, 연합군 진격의 최고 격전 지점)'로 불리며, 남부 연합의 운명이 정점에 도달했다가 꺾인 곳으로 상징된다.
피켓의 돌격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완전히 궤멸되었다.
12,000명 중 절반 이상이 사상했다.
리 장군은 후퇴하는 피켓에게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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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의 돌격—필리포토(필리포) “게티즈버그 사이클로라마”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
삼일간의 피와 영원한 유산
남군의 퇴각과 전쟁의 전환점
7월 4일 아침, 게티즈버그 전장에는 엄청난 희생만이 남아 있었다.
리 장군은 북군의 반격이 두려웠으나, 미드 장군은 지친 군대를 추스르는 데 급급해 추격하지 못했다.
리 장군은 ‘짐 크로우 산맥’이 아니라 사우스 마운틴(South Mountain) 능선을 넘어 포토맥 강 일대로 퇴각해 버지니아로 돌아갔고, 미드의 미추격을 ‘결정적 섬멸 기회 상실’로 볼지 ‘병력 보존과 회복을 우선한 신중함’으로 볼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미드가 리를 완전히 섬멸하지 못한 것은 링컨 대통령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전투의 결과는 명백했다.
남부 연합군은 게티즈버그에서 사흘 동안 약 28,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북군도 2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총 5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는 미국 역사상 단일 전투에서 가장 컸다.
남부는 이 치명적인 손실을 다시는 만회할 수 없었다.
게티즈버그는 남부의 마지막 북부 침공 시도이자, 남북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Turning Point)이었다.
참고로 ‘단일 하루’ 최다 사상자는 앤티텀(Antietam) 전투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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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Gettysburg”(Kurz & Allison 크로모)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
후대의 평가와 링컨의 연설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지 몇 달 후인 1863년 11월, 링컨 대통령은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한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인 게티즈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을 했다.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짧지만 강력한 문구로 이 전쟁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게티즈버그는 단순히 남과 북이 싸운 곳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곳임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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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첼더(John B. Bachelder) 대형 전장도(세부)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
리 장군의 명성에 대해서는 후대에도 논란이 많다.
게티즈버그에서 그의 과도한 자신감과 피켓의 돌격 강행 결정은 그의 경력 중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힌다.
반면, 리틀 라운드 탑을 지켜낸 조슈아 체임벌린은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의 총검 돌격 이야기는 이후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게티즈버그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의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린, 미국이 다시 태어난 거룩한 땅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본 글은 주류 연구/공식 도록/1차·2차 사료를 우선으로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불확실·가설적 요소는 본문 안에서 [논쟁]/[전승]/[추정]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대화 등 극적 장면은 최소 창작으로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혈연 등 이견이 큰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오탈자·사실 오류 제보와 추가 사료 추천을 환영합니다.
In July 1863 at Gettysburg, Buford’s stand bought time as Reynolds fell and Union forces held Cemetery and Culp’s Hills.
On July 2, Longstreet’s assaults smashed Sickles’s advanced line; Chamberlain’s bayonet charge saved Little Round Top.
On July 3, after a vast artillery duel, Pickett’s Charge broke at The Angle. Lee retreated via South Mountain.
~51,000 casualties marked a turning point; Lincoln’s Address reframed the war’s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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