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2대 유리왕 이야기: 부여에서 돌아온 태자, 국내성 천도와 황조가의 탄생 (King Yuri)


고구려 2대 유리왕: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울부짖은 군주의 드라마

아버지의 유산: 태양의 그림자


1. 낯선 고향, 부여의 왕자

기원전 38년경, 동부여(東扶餘)의 궁궐 외곽.

한 사내아이가 어머니 예씨(禮氏, 주몽의 첫 번째 부인)의 손을 잡고 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리(瑠璃). 

훗날 고구려(高句麗)의 2대 국왕이 되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천명(天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 영웅,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이었다. 

주몽이 부여에서 고구려를 세우기 위해 떠났을 때, 유리는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


유리의 유년기는 고구려라는 나라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부여의 왕족들 사이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의 존재는 아버지 주몽이 남긴 상징이자, 부여와 고구려를 잇는 불완전한 끈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부족 국가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군주의 유무에 따라 존속이 결정되던 시기였다. 

주몽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화적 권위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건국했으나, 유리가 부여에 남아있는 동안 고구려 조정은 주몽의 공신 세력(개국공신)과 새롭게 편입된 세력 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있었다. 

유리는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살아있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고구려 내부 권력 구도에는 위협적인 외부자이기도 했다.


2. 깨어진 화살촉과 운명적 서신

유리는 또래 아이들에게 늘 놀림을 당했다. 

아버지가 없어 무술을 배우지 못한다는 모멸감은 어린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느 날, 울면서 돌아온 아들에게 예씨 부인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주몽이 떠나기 전 남긴 '부러진 칼 조각(혹은 화살촉, 논쟁이 있음)'이 들어있었다.


“네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다. '일곱 모서리의 돌과 소나무 아래 칼'을 찾으면, 그가 너를 인정하고 왕의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몽의 유산’이었다. 

유리는 수년간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흔적을 좇아 부여의 곳곳을 헤맸다. 

마침내 그는 주몽이 기둥으로 쓰던 소나무 밑동에서 일곱 모서리의 주춧돌을 발견하고, 그 틈에 숨겨진 칼을 찾아냈다. 

부러진 칼날을 자신이 가진 조각과 합치니 완벽한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이 일화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 기록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며, 후대 왕실이 유리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강조했던 신화적 서사로 해석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유리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후대에 윤색한 정치적 상징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기원전 19년, 유리는 합쳐진 칼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고구려로 향했다. 

험난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마침내 도읍지인 졸본(卒本)에 도착했을 때, 주몽은 놀라면서도 깊이 기뻐했다. 

아버지 주몽에게 있어 유리는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왕조의 정통성과 혈통을 증명하는 완벽한 징표였기 때문이다. 

유리는 즉시 태자(太子)로 봉해졌고, 얼마 후 주몽은 승하했다. 

유리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짊어진 채 고구려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동명왕릉 능문 제당에 그려진 유리명왕 벽화

왕좌의 핏빛 드라마: 정통성 확립과 내전


1. 불완전한 상속과 송양왕과의 정치적 갈등

유리왕은 즉위했지만, 그의 왕좌는 뿌리가 깊지 않았다. 

주몽을 따르던 세력 외에도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토착 세력의 힘이 막강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은 비류국(沸流國)의 국왕이었던 송양(松讓)이었다. 

송양은 주몽에게 복속하기는 했으나, 유리가 부여 출신이라는 점과 주몽의 측근들이 유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왕권을 흔들었다.


송양은 유리의 즉위를 인정하는 대신, 그가 자신을 견제하지 못하도록 졸본에 남아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유리는 통치 초기에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바로 도읍지 천도(遷都)이다.


기원전 3년, 유리왕은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그리고 산성(山城)인 위나암성(尉那巖城, 현재 중국 지안 일대)으로 옮겼다. 

천도 결정은 단순히 지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졸본은 주몽의 공신들과 송양의 토착 세력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곳이었다. 

유리는 자신의 세력 기반이 약했으므로, 새로운 수도에서 왕권을 재정립하고 공신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에 위치하여 수운(水運)이 발달했고, 배후의 위나암성은 방어에 최적화되어 있어 고구려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거점이었다. 

이 천도는 유리가 정치적 난국을 정면 돌파하고 왕권 강화 의지를 천하에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유리명왕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성

2. 잔혹한 숙청: 왕실의 피바람과 해명태자(解明太子)의 비극

유리왕의 사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논쟁적인 사건은 아들인 해명태자(解明太子)의 죽음이다. 

해명은 유리의 맏아들(혹은 둘째 아들, 기록에 따라 다름)로 용맹하고 뛰어난 무력을 가졌으나, 그 성품이 너무나 강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웃 나라인 부여에서 일어났다. 

부여의 대소왕(帶素王)이 고구려를 약하게 보고 조롱의 뜻을 담아 보낸 활을, 해명은 그 자리에서 부러뜨려 사신에게 돌려보냈다. (전승/논쟁)

해명의 행동은 굴종적인 외교는 곧 나라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유리왕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건국 초기의 고구려가 대외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며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부여와 한나라(漢) 등 강대국을 자극하지 않는 실리 외교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었다. 

이러한 부자 간의 정치적 시각차와 혈기 어린 패기가 빚은 갈등은 결국 비극을 낳았다.


유리왕은 해명이 부여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유발하고, 자신의 왕권(王權)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이미 부여에서 왕자를 데려와 왕위에 오른 그에게, 아들의 경솔함은 자신의 정통성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정치적 도박이었다. 

결국 유리왕은 해명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비정한 명령을 내린다.


해명태자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기원전 9년). 

그의 나이 21세. (논쟁)

용맹하고 강성했던 왕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유리왕에게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유리왕의 가장 큰 과실이자 비판점으로 지목한다. 

해명의 행동이 경솔했을지라도, 그를 제거한 것은 왕실의 무력을 스스로 거세하고 왕권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은 잔혹한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평가다. 

이는 주몽에게서 받은 '왕권의 정통성'을 피로써 지키려 했던 유리왕의 강박적인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황조가와 전쟁의 소용돌이


1. 황조가(黃鳥歌)의 탄생: 사랑, 질투, 그리고 외로움

유리왕의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황조가(黃鳥歌)'의 배경이 된 사건은 한 인간의 지독한 외로움을 담고 있다.


유리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부족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규합했다. 

당시 고구려 왕실은 일부다처제를 통해 여러 부족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는 두 명의 왕비를 맞이했는데, 한 명은 고구려 토착민의 딸인 화희(禾姬)였고, 다른 한 명은 한나라 계열의 여성인 치희(雉姬)였다. 

화희는 고구려 내부 부족을, 치희는 대외 관계(한나라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두 여성은 왕의 총애를 두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화희는 고구려 토착 세력의 자부심을, 치희는 이국적인 배경의 이점을 내세우며 맹렬하게 다투었다.


어느 날, 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 두 여인은 크게 다퉜고, 결국 치희가 화희의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고향인 한나라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유리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치희를 쫓아갔으나,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길, 나무 위에서 정답게 날아가는 꾀꼬리(黃鳥) 한 쌍을 보았다. 

그는 깊은 고뇌에 빠져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바로 황조가이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翩翩黃鳥)

암수 서로 정답구나(雌雄相依)

외로울사 이 내 몸은(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誰與歸)


이 노래는 왕위에 있는 군주(君主)로서의 위엄을 벗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人間) 유리의 처절한 외로움과 고뇌를 담고 있다. 

고대 시가 중에서도 개인의 슬픔과 감정을 가장 깊이 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한국 문학의 서정시(抒情詩)의 효시로 간주된다. 

또한, '꾀꼬리'라는 새의 울음소리를 형용한 순우리말의 어원적 잔재가 고대 시가에 기록된 매우 희귀한 사례이기도 하다.


유리왕은 치희를 잃은 후에도 여러 왕비를 두었지만, 황조가에 담긴 인간적인 결핍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왕의 지위와 수많은 아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명의 여인을 잃은 외로운 남자였다.


2. 대외 전쟁: 선비족과의 사투와 한나라의 견제

유리왕의 치세는 평화롭지 않았다. 

고구려는 척박한 땅에서 시작했기에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했다.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는 선비족(鮮卑族)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 지역의 넓은 초원과 목축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확장(농경지 및 교역로 확보)에 최대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과 자원 경쟁은 유리왕에게 만성적인 국경 방위 부담을 안겼다.


① 선비족과의 전투 (기원전 10년경)

유리왕은 선비족을 정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선비족은 고구려 국경을 약탈하여 식량을 강탈하고 백성을 납치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의 전략은 고구려의 안정적인 농업 생산 기반을 흔드는 것이 목표였다. 

유리왕은 대규모 병력 대신 소규모 정예 기마 부대를 운용하여 선비족의 약탈 부대를 섬멸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전투는 고구려 군대의 기동성을 높이고, 훗날 광활한 만주를 지배하는 고구려 기병의 전통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논쟁)


② 한나라의 간섭 (기원후 1년경)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한나라 입장에서는 위협적인 '오랑캐' 세력이었다. 

한나라는 고구려에 끊임없이 사신(使臣)을 보내 조공(朝貢)을 요구하며 종주권을 주장했다. 

유리왕은 해명태자를 제거할 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냉철한 실리 외교를 택했다. 

그는 나라의 국력이 아직 한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임을 알았다. 

그는 때로는 한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여 충돌을 피했고, 국력이 회복되면 다시 강경한 태도로 전환했다.


이러한 줄타기 외교는 당시 고구려가 처한 국제 정세를 명확히 인지하고, 외교적 안정을 통해 내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주몽 시대의 모험적인 개척 정신과는 다른,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평가와 인간적인 고뇌: 그림자를 벗어던진 군주


1. 말년의 업적: 인재 등용과 안보 강화

유리왕의 치세 말년(재위 30년경), 고구려는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다. 

그는 해명태자의 비극을 겪은 후, 후계자 선정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해명태자의 죽음 이후, 유리왕은 자신의 손자뻘인 무휼(無恤)을 일찍이 태자로 봉하고 후계 구도를 안정화했다. 

무휼은 훗날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끄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된다. 

유리왕은 무휼을 통해 해명이 이루고자 했던 강성한 고구려의 꿈을 간접적으로 실현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통치 행위는 아들의 야망을 버렸던 스스로의 결정을 후대에서 보상받으려 했던 아버지의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유리왕은 천도 후 왕권을 강화하며 5부(五部) 체제를 정비한 것은 왕실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논쟁)

이는 주몽 시대의 부족 연맹체적 성격을 탈피하고 국가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과정이었다. 

왕실 중심으로 행정 체계를 통합하여, 고구려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중심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을 놓았다.


2. 역사적 평가: 수성자의 고독

유리왕은 3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구려를 통치했다(기원전 19년 ~ 기원후 18년).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수성(守成, 지키고 이룸) 그 자체였다.


아버지 주몽과 아들 무휼이 대외적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강대국과 맞섰던 것에 비해, 유리왕의 치세는 안정과 내실 다지기에 집중했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부여 출신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졸본의 토착 세력(송양)과 주몽의 공신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는 한나라와 선비족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통해 국가의 멸망을 막고, 다음 세대가 힘을 비축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수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고구려 천년 역사의 든든한 초석을 놓은 것이다.


3.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왕관의 무게

유리왕의 삶은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펼쳐진 한 인간의 고독한 투쟁이었다.

주몽은 신화였다. 

그는 실패를 모르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유리는 달랐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불완전한 칼날을 들고, 낯선 땅에 홀로 서야 했던 불안정한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아버지의 기대와 왕실의 의무 사이에서 방황했다. 

왕권 안정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켰고, 사랑하는 여인을 붙잡지 못했다.


꾀꼬리를 보며 '뉘와 함께 돌아갈꼬'라고 노래했던 그의 외로움은, 왕관의 무게가 평범한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짓누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슬픔이다.


유리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불가능을 이룬 창업자의 화려함인가, 아니면 그 유산을 현실의 고통 속에서 피와 눈물로 지켜낸 수성자의 고독한 책임감인가?


유리는 자신의 아픔과 희생을 통해 고구려라는 거대한 국가의 뼈대를 완성했다. 

그의 생애는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으나, 지극히 인간적이었기에 더욱 가슴 아프고, 그래서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의 황조가처럼, 권력과 영광의 정점에서도 인간은 결국 관계와 사랑을 갈망하는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본 글은 주류 연구·정사(삼국사기 등)와 1·2차 사료를 우선해 서술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전승·이견이 큰 대목은 본문에서 [논쟁]/[전승]/[추정]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대사 등 극적 요소는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최소 범위의 각색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제도 용어는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오류 제보와 사료 제안을 환영합니다.


Yuri, 2nd king of Goguryeo, raised in Buyeo, returns with the “broken sword” legend to succeed Jumong (r. 19 BCE–18 CE). 

To curb old elites and Songyang, he relocates the capital to Gungnae (3 BCE), consolidates rule, and pursues pragmatic diplomacy with Han while skirmishing with northern tribes. 

The tragic death of Prince Haemyeong is disputed. “Hwangjoga” reveals his solitude. 

By appointing Muhyul (later Daemusin), he secures succession and a stable, state-building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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