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벨라 바르가스: 프리다 칼로와의 격정 스캔들, 15년 공백을 깨고 돌아온 란체라의 전설 (Chavela Vargas)


차벨라 바르가스: 술과 눈물, 그리고 불멸의 노래


버려진 소녀, 정체성을 찾아서

차벨라 바르가스의 본명은 ‘이사벨 바르가스 리사노(Isabel Vargas Lizano)’였다. 

그녀는 1919년 코스타리카(Costa Rica,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공화국)의 산간 마을 산 호아킨 드 플로레스(San Joaquín de Flores)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따뜻한 태양 아래 있었지만, 가족의 사랑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차벨라는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았고, 이로 인해 부모에게 외면당했다. 
(썰) 그녀의 부모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를 외삼촌에게 맡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게다가 그녀가 여성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거부하고 남성적인 복장과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이자, 보수적인 중산층 집안이었던 가족들은 그녀를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 
이 어린 시절의 외면은 차벨라의 내면에 깊은 상처와 함께 극도의 독립심을 새겨 넣었다. 
그녀는 가족이 주지 못한 사랑과 인정을 자신의 노래에서 찾으려 했다.
10대 중후반 무렵, 차벨라는 가족의 억압을 벗어나 멕시코로 향했다. 
그녀가 선택한 곳은 문화와 예술의 용광로였던 멕시코(Mexico, 북미와 중미 사이에 위치한 공화국)의 수도 멕시코시티(Mexico City)였다.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차벨라는 거리를 전전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그녀는 거리에서 민요를 부르고, 허름한 술집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녀의 정체성은 이 거리의 삶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졌다.


차벨라 바르가스

란체라의 여왕, 금기와 스캔들

1950년대 멕시코는 란체라(Ranchera, 멕시코의 전통 민속 음악)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란체라는 주로 술, 고독, 이별, 그리고 마초적인 사랑을 다루었으며, 남성 가수들의 전유물이었다.

차벨라는 이 금기를 깼다. 
그녀는 멕시코의 전통 의상인 판초(Poncho, 머리를 낼 구멍만 있는 겉옷)를 걸치고, 바지를 입었으며, 권총을 지니고 다녔다. 
그녀의 강렬한 중저음과 호소력 짙은 창법은 술에 취한 남성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듯했다. 
차벨라 바르가스 노래는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절규로 가득했다. 
현지에서는 이 긴 판초를 ‘호로(jorongo)’라고도 불렀다.
"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멕시코 여성 가수들과 달랐다. 나는 술을 마시고, 사랑하는 여인을 노래하는 마초(Macho) 가수였다."
그녀는 마이크도 없이 단순한 기타 반주에 맞춰 무대 중앙에서 관객을 압도했다. 
그녀의 혁신적인 무대 매너와 성소수자(LGBTQ+)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당당함은 멕시코 사회에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열광적인 팬덤을 형성했다. 
레코드 데뷔는 1961년 음반(예: ‘Noche de Bohemia’)로 기록되며, 무대 경력은 그 이전부터 축적됐다.


멕시코 전통 포초/호로(poncho/jorongo) 도해
퍼블릭 도메인(미국).
위키미디어 공용


차벨라 바르가스의 사생활 중 가장 유명하고 격정적인 스캔들은 바로 화가 프리다 칼로와의 관계였다.
1940년대, 차벨라는 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남편이자 유명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멕시코 벽화 운동의 거장)의 집인 ‘푸른 집(Casa Azul, 멕시코시티의 유명한 관광지)’에 머물렀다. 
프리다는 차벨라의 강렬한 에너지와 자유로운 영혼에 즉시 매료되었다. 
차벨라는 훗날 회고에서 칼로와의 사랑을 인정했고, 영화 ‘Frida’(2002)에서 ‘La Llorona’를 부르며 자신의 서사를 대중에 각인시켰다. 
두 여성은 디에고 리베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이고 열정적인 관계를 맺었다. 
차벨라는 프리다의 마지막 연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지만, 이들의 관계는 프리다의 건강 악화와 차벨라의 방랑벽으로 인해 잠시의 불꽃처럼 끝났다. 
차벨라는 이 경험을 통해 '영원히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1950년대 차벨라의 명성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녀의 여성 편력은 할리우드까지 뻗어나갔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에바 가드너(Ava Gardner, 미국의 전설적인 여배우)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스캔들로 다시 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차벨라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강력한 무기로 사용했다.


차벨라와 프리다

알코올의 그림자, 15년의 공백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차벨라 바르가스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했던 술은 이제 그녀의 인생을 갉아먹는 독이 되었다.

차벨라는 극심한 알코올 중독(Alcoholism)에 빠졌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술을 찾았고, 공연을 펑크 내는 일도 잦아졌다. 
그녀의 예술가적 광기는 자기 파괴로 이어졌고, 술 없이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악순환에 갇혔다.
"나는 술을 마시기 위해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술을 마셨다. 내게 술은 생명이자 파괴였다."
1979년경, 차벨라 바르가스는 대중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은 술과 함께 잊혀졌고, 그녀의 전설은 멕시코의 낡은 바(Bar) 구석에 묻혔다. 
이 15년에 달하는 '잃어버린 시간(Lost Years)'은 차벨라의 가장 어둡고 고독한 시기였다. 
그녀는 멕시코의 외딴 시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공백기는 대체로 1970년대 후반부터 1991년 무대 복귀까지로 정리된다.

이 공백 기간 동안, 멕시코 대중음악계는 차벨라를 기억하는 동시에 비판하기도 했다. 
그녀의 파괴적인 사생활은 여성 가수로서 모범적이지 못하다는 보수적인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남성 중심의 란체라를 여성의 목소리로 정면 돌파했다는 문화적 업적은 후대 아티스트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전설의 부활, 불멸의 아이콘

1990년대 초, 차벨라 바르가스는 70대의 나이로 극적인 부활을 알렸다. 
그녀는 알코올을 끊고,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독과 슬픔으로 더욱 깊어지고 절규처럼 변해 있었다.

차벨라 바르가스의 재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스페인의 거장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등의 감독)였다. 
알모도바르는 차벨라의 깊한 고독과 애절함이 담긴 목소리에 매료되어, 자신의 영화 <꽃의 비밀(The Flower of My Secret, 1995)>에 그녀의 노래를 사용했다. 
이후 <라이브 플레쉬(Live Flesh)>, <내 어머니의 모든 것(All About My Mother)> 등 알모도바르의 주요 작품에 차벨라의 음악이 삽입되면서, 그녀는 스페인과 유럽 전역에 '멕시코 란체라의 전설'로 다시 소개되었다. 
1991년 코요아칸의 소극장 ‘엘 하비토(El Hábito)’ 공연이 공식적인 복귀의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엘 하비토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복귀


차벨라는 70대와 80대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무대에 섰고, 2003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 공연으로 국제적 위상을 재확인했다. 
그녀의 흰 머리와 주름진 얼굴은 고난을 이겨낸 인생의 깊이를 상징했다.

2002년, 83세의 나이에 차벨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공식적인 선언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녀는 '술, 여자, 그리고 고독'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숨기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킨 불멸의 아이콘이 되었다. 

차벨라 바르가스는 2012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멕시코 모렐로스주의 쿠에르나바카에서 눈을 감았고, 멕시코 전역에서 장구한 추모가 이어졌다. 
그녀는 마초 문화가 지배하던 란체라를 성별과 관습의 장벽을 부수고 전 세계적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인생의 모든 고난과 사랑의 아픔을 담아내는 유일한 그릇이었다. 
그녀는 프리다 칼로와 함께 멕시코 예술의 가장 자유롭고 파격적인 영혼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술과 눈물,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삶은 고독한 예술가들의 영원한 위로가 되었다. 
차벨라 바르가스의 인생은 정착을 거부하고 자신의 진실만을 쫓았던 방랑자의 노래였으며, 그 불꽃은 꺼지지 않고 영원한 전설로 남아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대표 레퍼토리 ‘La Llorona’, ‘Paloma Negra’, ‘Macorina’와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José Alfredo Jiménez) 노래의 해석은 그녀의 유산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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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vela Vargas (1919–2012), born in Costa Rica, remade Mexico’s ranchera with jorongo, trousers, a stark contralto, and open queer identity. 
After moving to Mexico in her late teens, she turned barrooms into stages; lore links her to Frida Kahlo and Ava Gardner. 
Alcohol led to a long withdrawal (late ’70s–1991). Revived in the 1990s via Pedro Almodóvar, she reclaimed “La Llorona” and more, sang at Carnegie Hall in 2003, and died an icon in Cuernav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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