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바꾼 공학: 나대용과 거북선, ‘덮개의 철학’ (Na Dae-yong)


 새벽 물안개가 나주(羅州·Naju)의 들판을 훑고 선소(船所·국가 조선소) 마룻바닥까지 스며들었다.

나대용(羅大用·Na Dae-yong)은 젖은 용골(배의중심축)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며 목재의 결이 얼마나 물을 먹었는지 가늠했다.

그가 가장 싫어한 건 소문난 거창한 말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건 반복된 손놀림 끝에 얻는 균형감이었다.

 “조선 수군 장인 체암 나대용 영정” / “Modern memorial portrait of Na Dae-yong”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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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본관은 금성(錦城·Naju lineage)이고,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이다.

부친은 나항(羅亢)으로, 학문과 벼슬길에 관한 기대를 아들에게 걸었다고 전한다(전승).

젊은 나대용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고, 물길과 바람의 습성을 따라 노를 맞추는 법을 배웠다(전승).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가장 먼저 기억하는 건 ‘배를 아는 기술자’라는 사실이다.


1583년(선조 16년) 그는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관직을 시작했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Yi Sun-sin)의 막하에 들어가자, 그의 관심은 노와 포, 갑판과 지붕을 하나로 묶는 구조 문제로 곧장 수렴했다.

덮어서 살리고, 막아서 쏘게 하는 배.

그가 머릿속에 그린 해답은 판옥선(板屋船·panokseon)의 신뢰성 위에 얹는 ‘덮개’였다.


“고전 화풍의 판옥선 도상” / “Old painting of a Panokseon (PD-Art)”
Wikimedia Commons, P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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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덮개의 모양을 사람들은 거북의 등딱지에 빗대 ‘거북선(龜船귀선·turtle ship)’이라 불렀다(어원).

거북이라는 별명은 단단함과 낮은 실루엣을 떠올리게 했고, 당시 조선 수군의 약점이던 백병전의 순간을 통째로 없애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배의 앞머리에는 용두가 달렸다.

연막과 황(黃·유황) 섞은 연기를 뿜어 적의 시야와 심리를 흐트러뜨리려는 장치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실제 기능과 빈도는 (논쟁)이다.


실험은 실패에서 시작됐다.

처음 만든 모형은 회전반경이 컸고, 노공 간격이 맞지 않아 측면이 휘청거렸다.

그는 노 사이를 손가락 두 마디만큼 좁히고, 포받침의 쿠션목을 더 깎아 넣어 반동을 흡수하게 했다.

“배는 말이 없지만, 떨림으로 답한다.” 그는 일꾼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전승).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배는 바다로 나갔다.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遊軍將)으로 적 대선(大船) 두 척을 격파했고, 사천해전에서는 분전 끝에 총탄을 맞았다.

한산도 앞바다에서는 학익진(鶴翼陣·crane-wing) 속에서 거북선이 ‘방패이자 망치’로 움직였고, 명량과 노량에서도 그는 기술·보급·수리의 허리를 잡았다.

“영웅은 이름으로 남지만, 배는 내일 싸울 힘으로 남아야 한다.” 그의 생각은 늘 거기에 가 있었다.


“한산도 앞바다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 / “Documentary painting of the Battle of Hansan Island”
War Memorial of Korea Open Archives, KOGL Typ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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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소강되자 그는 관직을 돌았다.

강진현감, 금구·능성·고성의 현감으로 백성 사이를 다니며 선창과 포구를 손봤다.

그는 창선(槍船·창을 빽빽이 꽂아 승선 저지를 극대화한 군선)을 고안했고, 해추선(海鰍船·쾌속전투선)으로 판옥선의 느린 응답을 보완했다.

1611년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제수되었으나 전상(戰傷 전투중입은 상해)이 도져 부임하지 못했고, 1612년 1월 29일 생을 마쳤다.


생활로 돌아가 보자.

그는 새벽형 인간이었다고들 말한다(전승).

목재는 비에 숨 쉬고 해에 수축한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사람이었고, 포좌의 흔들림을 싫어해 동일 규격 부품을 넉넉히 비축했다.

잔칫상과 과시는 질색이었고, 일을 덜 해도 보고서는 길게 쓰는 관습을 싫어했다(전승).


인간관계는 단단했다.

이순신과는 ‘설계와 운용’의 신뢰로 묶였고, 선소의 장인들과는 결함을 숨기지 않는 약속으로 묶였다.

그는 조선소의 일꾼들을 이름으로 불렀고, 수군의 병과를 “리듬”으로 보았다.

노수의 호흡이 무너지면 포수의 조준도, 키잡이의 회전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은 조용했다.

부친 나항의 영향으로 글재주가 좋아 문인이 되려 했다는 말이 전하고, 집안에는 선대 공신의 계보가 회자되었다고 한다(전승).

배우자·자녀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물어, 생활상은 더더욱 사무·현장 중심의 자료로 남았다.

그래서 그의 집안 이야기는 경계가 필요하다. 기록 바깥의 상상은 반드시 (전승)으로 남긴다.


“나대용 장군 생가 전경(초가 복원)” / “Birthplace of Na Dae-yong in Munpyeong-myeon, Naju”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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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야 할 업적은 분명하다.

그는 판옥선이라는 ‘검증된 뼈대’ 위에 덮개를 얹어 백병전의 국면을 삭제하는 발상을 구현했다.

포혈의 배치, 노공과 포좌의 간섭 최소화, 회전반경과 무게중심 조절 같은 실전 공학을 현장에서 다듬었다.

또한 예비 부품의 규격화를 추진해 ‘수리=전력’이라는 개념을 박아 넣었다.


(논쟁)도 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는가, 아니면 목재 위에 못과 철촉을 박은 갑판 덮개였는가 하는 문제는 100년 넘게 논쟁 중이다.

용두의 연막 분출이 어느 전투에서 어느 빈도로 쓰였는지, 명량에 실전 투입되었는지, 거북선의 총 수량이 얼마였는지도 서로 다른 기록이 충돌한다.

또 설계 공로를 이순신에게만 혹은 나대용에게만 과도하게 귀속시키는 해석 역시 경계해야 한다.


“1795년 목판화에 그려진 조선의 거북선” / “1795 woodblock depiction of a turtle ship”
Wikimedia Commons, CC BY-SA(복수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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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도 많았다.

아이처럼 물방개를 잡아 물살을 관찰했고, 그 움직임에서 배의 힌트를 얻었다는 구전이 나주에 남아 있다(전승).

임란 직전 마을 방죽에서 모형을 띄워 회전을 시험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전승).

이런 전승은 현지 기억을 풍성하게 하지만, 설계 도면이 완벽히 남지 않은 만큼 소설적 각색과 사실의 경계를 분명히 둬야 한다.


그의 장면은 영화처럼 또렷하다.

사천의 포구에서 거북선이 정면으로 파고들 때, 그는 배 밑창에서 떨림으로 전황을 읽었다.

포받침의 떨림이 줄고, 회전이 한 박자 빨라졌을 때, 그는 노수의 호흡이 맞아들어감을 알아차렸다.

그는 칭호보다 리듬을 믿는 장인이었다.


그의 약점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기록의 편향이었다.

전쟁의 서사는 제독의 이름으로 남고, 설계자의 이름은 문단 중간에 놓인다.

그는 이를 억울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칭호는 종이에 남고, 배는 물에 남는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명구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전승).


그러나 공은 공이다.

그는 전장과 선소 사이의 왕복에서 ‘빨리 고치고 다시 싸우는 법’을 체계화했다.

창선·해추선 같은 파생 설계는 적응과 보완의 산물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덮어 살리는’ 덮개의 철학은 이후 조선 수군의 안전 개념을 바꿔 놓았다.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나대용함’ 항해” / “ROKS Na Dae-yong (SS-069) underway”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미 해군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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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는 길다.

그의 고향 나주에는 생가와 사당(昭忠祠)이 남아 해마다 추모가 이어진다.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 한 척은 그의 이름을 달았다.

드라마와 영화는 거북선의 이미지를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재구성했고, 전시관의 모형은 설명과 자부심 사이에서 흔들린다.


“여수 선착장 앞 거북선 복원선 전경” / “Turtle ship replica at Yeosu harbor”
Wikimedia Commons, CC0(PD) 공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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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슬로건에 안심하지만, 학계의 논의는 더 정교하다.

못과 철촉, 부분 철판과 목재의 조합, 배수량이 허용하는 범위의 방호, 항속과 회전의 상충을 계산하는 실전공학이 핵심이다.

그러니 신화보다 공학을 보자.

그럴 때 기술자의 존엄이 선명해진다.


가정의 자리로 돌아오면 그는 평범했다.

술을 과하게 즐기지 않았고, 잔치보다 작업대를 선호했다는 증언이 이어진다(전승).

동료에게 엄했고, 초심자에게는 반복을 가르쳤다.

그 반복이 전투 다음 날에도 떠 있는 배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나대용의 비극은 그가 ‘너무 실용적’이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너무 실용적이어서’ 신화가 먹는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는 데 있다.

하지만 역사는 안다.

사람을 살리고, 바다를 우리 편으로 돌린 덮기의 기술자를.


그의 일대기를 마감하는 말은 짧다.

1612년 그는 떠났고, 남은 것은 규격화된 부품 치수와 선소의 리듬 기억이다.

그의 손놀림은 문장보다 오래 간다.

바람과 물과 나무의 언어를 아는 사람의 손놀림이 그러하듯이.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남기자.

포구의 연기가 걷히고, 거북선의 못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아침.

그는 손에 박힌 송진을 긁어내며 뒤를 돌아 선소를 보았다.

배는 혼자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오래 믿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Na Dae-yong (1562–1612) was the practical mind behind Joseon’s turtle ship—a covered, low-silhouette warship that shielded rowers and focused fire. 
Serving under Admiral Yi Sun-sin, he refined panokseon hulls, tuned oar spacing and gunports, and standardized spare parts so damaged ships returned quickly to battle at Sacheon, Hansando and beyond. 
Averse to pomp, he prized rhythm and repair. 
Though ironclad plating and dragon head smoke remain debated, his “cover to save lives” ethos end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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