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My Story》,
《Norma Jean: The Life of Marilyn Monroe》, 《Life Magazine Archives》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26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병원.
하얀 시트 위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노마 진 모턴슨(후일의 마릴린 먼로)이었다.
어머니 글래디스(필름 현상소 직원)는 혼자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고, 그녀는 이미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다.
글래디스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곧 노마 진을 안정적으로 기를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노마 진의 유년기는 따뜻한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탁가정을 전전했고, 보육원 철창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눈에 세상은 낯설고 차가운 공간이었다.
“나는 원하지 않는 아이였어요.”
훗날 그녀가 회고록에서 밝힌 말은 이 시절의 고통을 대변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남들과 다른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불안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소녀의 웃음을 기억했다.
짙은 갈색 머리에 커다란 눈, 그리고 왠지 모르게 시선을 사로잡는 매혹.
그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미 사람들의 눈은 다른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생존”이었다.
16세가 되던 해, 위탁가정에서 나가야 할 상황에 놓였다.
법적으로 보호가 끊기면 다시 보육원에 들어가야 했고,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혼이었다.
1942년 6월, 그녀는 이웃집 청년 제임스 도허티(당시 21세)와 결혼했다.
그는 평범한 청년이었으나 곧 상선 해군(Merchant Marine)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사랑의 맹세라기보다 소녀가 보육원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탈출구였다.
“결혼은 안정이라기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이었어요.” 먼로가 훗날 남긴 말이다.
결혼 직후 미국은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했고,
수많은 남성들이 전선으로 떠났다.
노마 진의 남편 도허티 역시 바다로 나갔다.
홀로 남은 그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전쟁 경제의 일부분이 되었다.
군수공장의 하루는 고되고 지루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작업복 차림으로 기계 앞에 서서, 그녀는 비행기의 부품을 조립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운명의 장면이 펼쳐졌다.
군 홍보를 위해 파견된 한 사진사가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던 중, 노마 진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환한 미소와 눈빛은 단순한 노동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진사는 중얼거렸다.
“이 소녀는 카메라 앞에서 빛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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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ma Jeane Dougherty at Radioplane Factory, 1944(게재 1945). U.S. Army / YANK, the Army Weekly. Photo by David Conov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그 사진은 곧 모델 에이전시로 전달되었다.
제안이 왔다.
“모델을 해보는 게 어떻겠소?”
노마 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전쟁으로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과 가난은
그녀를 새로운 선택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용의 변화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다른 사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노마 진은 점차 사라지고,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이 세상에 태어났다.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은 모델 활동을 시작하며 서서히 세상에 퍼져나갔다.
처음엔 잡지 표지와 달력에 얼굴을 올리는 무명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해군 장병들은 그녀의 사진을 침상 머리맡에 붙여두었고,
노동자들은 지갑 속에 그녀의 웃음을 간직했다.
카메라 앞에서 먼로는 긴장을 내려놓고 본능처럼 빛났다.
1946년, 그녀는 영화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20세기의 거대한 공장 같았던 헐리우드가 그녀를 삼켜버린 순간이었다.
그녀는 작은 단역으로 스크린에 등장했다.
관객이 이름을 알기에는 너무 짧은 장면이었지만, 누군가는 그 금발의 소녀를 기억했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냉혹했다.
“너는 너무 평범해. 더 특별해야 해.”
제작자들의 요구는 끝도 없었다.
그녀는 발음을 교정했고, 머리를 더 밝게 염색했고,
몸매를 강조하는 의상으로 스스로를 재창조했다.
노마 진은 완전히 지워지고 마릴린 먼로만이 남았다.
1950년대 초, 그녀는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애스팔트 정글》(1950)과 《올 어바웃 이브》(1950)에서 짧게 등장했지만,
관객의 시선은 그 금발 소녀에게 꽂혔다.
몇 분의 출연이었으나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녀의 모습은 기억 속에 남았다.
곧이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 《7년만의 외출》(1955) 같은 작품들이
그녀를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뉴욕 거리의 환풍구 위에서 흰색 원피스가 부풀어 오르는 장면은 대중문화 역사에 새겨졌다.
“오, 마릴린!”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가 동시에 터졌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달랐다.
그녀는 종종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무대 위에서 웃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장 외로운 순간일지도 몰라요.”
섹스 심벌이라는 타이틀은 영광과 저주를 동시에 안겼다.
모든 시선이 그녀를 원했지만, 정작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는 촬영장에 늦게 나타나곤 했다.
감독들은 화를 냈지만, 그녀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며 화장실에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속삭임이 늘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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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디마지오, 1941. New York World-Telegram & Sun / Library of Congress. Public Domain. |
그녀의 연애사는 더 큰 화제가 되었다.
첫 번째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그 뒤 그녀는 전설적인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결혼 생활은 폭풍 같았다.
디마지오는 그녀의 섹스 심벌 이미지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결혼은 9개월 만에 파탄났다.
이후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지성과 아름다움의 결합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밀러조차 그녀의 불안과 우울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녀는 또다시 버려졌다고 느꼈다.
그녀의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플레이보이》 창간호에 실린 누드 사진이었다.
사실 그 사진은 먼로가 무명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찍었던 것이었다.
잡지가 창간되며 사진이 실리자 세상은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담담히 말했다.
“그게 내가 돈이 없을 때 찍은 사진이에요. 그때는 빵값이 필요했죠.”
그 솔직함은 사람들의 분노를 무장해제시켰고, 오히려 그녀의 인기를 더 끌어올렸다.
마릴린 먼로의 이름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영화관 스크린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면 관객은 숨을 죽였고,
잡지 표지에 그녀의 미소가 실리면 한 달 판매량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빛의 뒤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그녀는 종종 사라졌다.
세트 한쪽에서 눈물을 훔치거나, 촬영에 몇 시간씩 늦게 도착하기도 했다.
감독과 배우들은 짜증을 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면증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수면제와 알코올을 섞어 먹기 시작했다.
그 습관은 점점 깊어졌고, 삶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사랑을 갈망했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야구 선수)와의 결혼은 질투와 오해로 끝났고,
아서 밀러(극작가)와의 결혼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원했지만, 정작 그녀가 원하는 따뜻한 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무렵, 그녀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관계는 세간의 뜨거운 소문이 되었다.
1962년 5월 19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케네디의 생일 축하 공연에서
먼로는 전설적인 노래를 불렀다.
“Happy Birthday, Mr. President…”
그녀의 숨결이 묻어나는 관능적 목소리는 미국 전역을 흔들었다.
관중은 환호했고, 케네디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축하 공연이 아니라,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그녀와 케네디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지금까지도 무수하다.
백악관의 비밀, 로버트 케네디와의 연결, 정치적 음모론까지 얽혀 있다.
어느 것도 명확히 입증된 것은 없지만, 그녀의 이름은 이미 미국 권력의 심장부와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촬영장에서의 불안정한 태도 때문에 영화사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썸씽스 갓 투 기브》 촬영 당시 그녀는 잦은 결근과 건강 문제로 제작진을 괴롭혔다.
언론은 “마릴린은 무너지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1962년 8월 5일 새벽,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침대 곁에는 수면제 병이 흩어져 있었고, 전화기는 손에 쥔 채였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자살 가능성으로 발표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다.
케네디 형제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제거되었다는 주장,
혹은 CIA와 마피아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조 디마지오는 장례식 준비를 도맡았다.
그는 세상의 눈길을 피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를 가장 사랑했지만 지켜주지 못했다.”
이후 그는 매주 그녀의 무덤에 꽃을 바쳤다.
20년 가까이 한 번도 빠짐없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신문은 그녀의 사진으로 도배되었고, 전 세계 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부짖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죽음으로써 불멸의 아이콘이 되었다.
앤디 워홀은 그녀의 초상을 팝아트로 재탄생시켰고,
먼로는 예술과 대중문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았다.
마릴린 먼로의 육체는 1962년 여름에 사라졌지만, 그녀의 이름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떠난 순간부터 더 큰 전설이 되었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은 그녀의 모습을 따라 했다.
금발 웨이브 헤어, 곡선미를 강조하는 드레스, 진한 아이라이너와 붉은 입술.
이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하나의 “먼로 코드”가 되었다.
길거리의 여성들까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웃으며 그녀를 흉내냈다.
예술가들은 그녀를 새로운 뮤즈로 삼았다.
앤디 워홀(팝아트의 대표 작가)은 1962년 《Marilyn Diptych》라는 작품을 통해
먼로의 얼굴을 반복해 인쇄했다.
화려한 색채와 반복된 이미지 속에서, 그녀는 동시에 살아 있고 죽은 듯 보였다.
워홀은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의 아이콘을 먼로라는 이름으로 집약시킨 것이다.
학자들은 그녀를 “20세기의 비너스”라 불렀다.
그러나 동시에 “피해자”라고도 했다.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었고,
그 이미지에 스스로 갇혀 고통 받았다.
후대의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먼로를 양면적으로 해석했다.
“억압된 여성”이자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무기로 삼은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로.
영화계에서 그녀는 새로운 캐릭터 유형을 창조했다.
그전까지 금발 여배우는 종종 희극적인 장식물로만 소비되었다.
그러나 먼로는 ‘섹시하지만 어딘가 순진하고, 동시에 상처 입은 여성’이라는 복합적인 인물을 구축했다.
이후 수많은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이 전형을 계승했다.
대중문화 속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소환되었다.
팝송의 가사에, 광고의 모델로, 심지어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모티브로.
뉴욕 타임스퀘어의 네온사인에도 그녀의 미소가 빛났고,
관광객들은 여전히 그녀의 스타가 박힌 할리우드 거리를 찾았다.
“만약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질문은 끝없이 회자된다.
노화한 먼로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는 36세의 나이에 멈춰버렸고, 그 나이 그대로 영원히 기억된다.
죽음은 그녀를 비극적으로 완성시켰고, 아이콘으로 고정시켰다.
마릴린 먼로의 영향력은 단지 영화와 패션을 넘어선다.
그녀는 20세기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가장 강렬한 신화 중 하나다.
굶주린 아이에서 세계적 스타로, 그리고 비극적 죽음 후 불멸의 아이콘으로.
그 궤적은 인간의 취약함과 영광, 사랑과 고독,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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