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안개가 뢰베슈타인 성(Loevestein·마을 고린헴(Gorinchem) 근처 요새 감옥)의 해자를 얇게 덮었다.
여인의 발걸음이 보초의 시선 사이를 잰다.
그녀는 마리아 판 라이거스베르흐(Maria van Reigersberch·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아내/행정가 집안 출신(전승))였다.
오늘도 커다란 책 상자(book chest·서적 수송용 상자)가 방으로 들어온다.
상자는 늘 무거웠고, 병사들은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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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판 라이거스베르흐의 흉상 초상(50세)” / “Portrait bust of Maria van Reigersberch (age 50)” Rijksmuseum · Public Domain. Rijksmuseum.nl |
상자를 들여놓고 문이 닫히면, 그녀는 남편 휘흐 데 흐로트(네덜란드어: Huig de Groot·라틴식: Hugo Grotius·법학자/정치인)와 눈빛을 맞췄다.
둘은 말수 대신 순서를 확인했다.
종이 묶음, 옷가지, 공구, 얇은 담요.
상자 바닥을 덮고, 그 위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여유를 만든다.
한 번의 실수는 종신형이 아니라 단두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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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흐 데 흐로트(그로티우스) 1631년 초상” / “Portrait of Hugo Grotius, 1631 (Mierevelt)”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이 계획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리아는 오래전부터 책과 속지를 들이고 내보내며 병사들을 습관에 길들였다.
한 번은 일부러 더 무겁게, 또 한 번은 가벼운 날을 섞었다(전승).
상자의 무게 변동은 ‘항상 그랬다’는 기억으로 희석됐다.
경계의 날이 무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그녀의 전술이었다.
왜 이런 계획이 필요했는가.
1618년, 도르트 총회(Synod of Dort·1618–19 개혁교회 총회)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의 권력은 레몬스트란트(Remonstrants·아르미니우스 계열)와 콘트라레몬스트란트(Contra-Remonstrants 칼뱅주의 신학파)의 분열 속으로 미끄러졌다.
총독 오라녜의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는 실권자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국가대판사)를 숙청했고, 그로티우스는 국가 질서 교란 혐의로 종신형을 받아 이 성으로 이송됐다.
법학자의 논쟁은 감옥의 현실로 바뀌었다.
마리아는 법정의 설득 대신 생활의 작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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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르트 총회 회의 장면” / “The Synod of Dordrecht” Rijksmuseum · Public Domain. Rijksmuseum.nl |
그녀는 간청해 수감 동거를 허락받았다(논쟁).
방은 좁았고, 감시는 촘촘했다.
그러나 책은 허용되었다.
그로티우스는 읽고, 마리아는 목록을 만들고 송장을 썼다.
그 과정에서 상자와 통로, 시간표가 그녀의 손안에 들어왔다.
그녀의 곁에는 엘셀리나(엘셰) 반 후웨닝엔(Elsje van Houweningen·시녀/조력자)이 있었다.
둘은 보초의 교대, 수로의 수위, 고린헴으로 가는 배편을 외웠다.
언제 창틀이 결로로 젖는지까지 기록했고, 병사 중 누가 책을 싫어하는지를 파악했다(전승).
계획은 사소한 것의 집합이었다.
사소한 것들이 모이면 탈출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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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티우스가 상자에 들어가는 순간” / “Grotius stepping into the chest (1754 engraving)”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1621년 3월 22일, 상자 속에 사람이 들어갔다.
마리아는 남편의 침상 모양을 꾸며 두었다(전승).
모자를 눌러쓰고 책을 읽는 인간 실루엣이 문가에서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 장치였다(논쟁).
병사들은 익숙한 상자를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
상자는 수로를 건너 고린헴의 지인 집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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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티우스가 숨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책 상자” / “Book chest associated with Grotius’ escape” Wikimedia Commons ·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
그날 밤, 마리아는 혼자 남았다.
감시는 곧장 그녀에게 몰렸다.
“남편은 어디 있느냐.”
그녀는 묻는 말에 서류와 표정으로 대답했다.
“책을 보냈을 뿐이다.”
그녀는 구금·신문을 견디고 석방되었다(전승/논쟁).
곧 그녀도 감시망을 빠져나가 안트베르펜(Antwerpen), 파리(Paris)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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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1년 3월 22일 책 상자 탈출” / “Escape in the book chest (22 March 1621)” Wikimedia Commons(이미지) · Rijksmuseum 원본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부부는 파리에서 다시 살림을 폈다.
그로티우스는 집필을 재개했고, 마리아는 출판인·후원자·대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훗날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1625)』을 내놓았다.
책의 머리말이 세상을 설득하는 동안, 마리아는 생활비·인쇄비·원고 교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녀의 편지는 계약과 일정, 종이에 묻은 잉크의 상태까지 적는다(전승).
그녀의 사생활은 실용적이었다.
가족 장부를 썼고, 아이들의 교육을 챙겼다(전승).
집 안의 언어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가 섞였고, 손님들 앞에선 라틴어 인삿말이 오갔다.
그녀는 기념품보다 서류철을 모았다.
이민자의 삶이 곧 기록의 기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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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느강가 네슬 탑과 네베르 호텔, 좌안 풍경 · (영) View of Tour de Nesle & Hôtel de Nevers on the Left Bank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법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탈출의 설계자는 마리아였다.
그녀는 폭력 대신 습관·장부·시간표를 무기로 썼다.
도끼 대신 서류, 칼 대신 상자.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물론 논쟁도 남았다.
상자 무게를 일부러 조절해 병사들을 속였는지, 그녀가 남편의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는지, 시녀의 동선이 어느 방을 거쳤는지, 세부는 기록마다 다르다(논쟁).
그러나 결과는 단단하다.
상자는 성문을 통과했고, 법학자는 살아 나왔다.
그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마리아는 남편의 귀국 시도와 스웨덴 공무(대사직) 시절에도 재정·건강·동선을 관리했다(전승).
그가 북쪽으로 떠나자, 그녀는 파리와 네덜란드의 편지망을 유지했다.
남편이 로스토크(Rostock·1645)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유품과 원고를 정리하고 델프트(Delft 네덜란의 도시)로 장례를 도왔다(전승).
그리고 자신의 노년을 정리했다.
탈출의 날 이후로, 그녀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사라지지 않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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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프트 시장광장의 그로티우스 동상” / “Statue of Hugo Grotius, Delft” Wikimedia Commons · CC BY/CC BY-SA(파일별 표기). 위키미디어 공용 |
후대의 그림과 연극은 종종 상자만을 확대한다.
상자는 극적이고 물질적이어서 기억에 남기 쉽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사람이다.
상자를 습관으로 만들고, 검문을 형식으로 바꾸고, 공포를 일과표로 이긴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마리아였다.
그녀의 공을 적으면 이렇다.
첫째, 정치의 폭력이 지배하던 순간에 비폭력의 설계로 한 생을 구했다.
둘째, 망명지에서 지식 노동의 인프라, 편지·계약·출판을 꾸렸고, 책이 세상에 도달하는 마지막 구간을 책임졌다.
셋째, 여성의 일이 기록에서 지워지는 관성을 거슬러, 편지와 장부로 자기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누군가의 아내라는 말 뒤에 소개되기 쉽고, 그 말은 종종 일을 가린다.
역사는 남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탈출극의 이름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살아남는 기술은 둘의 이름으로 완성됐다.
마리아가 없었다면, 상자는 여전히 상자였을 것이다.
마리아가 있었기에, 상자는 길이 되었다.
그 길을 지나 책이 세상에 도착했다.
| “뢰베슈타인 성 전경” / “Exterior view of Loevestein Castle”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NL. 위키미디어 공용 |
늦은 밤, 파리의 하숙방에서 그녀는 다시 서류철을 묶는다.
상자와 서류, 묶는 동작은 같다.
묶음의 반대말은 흩어짐이 아니라 출발이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한 번 더 끈을 조이고, 봉인을 찍는다.
아침이면 또 다른 문앞을 통과해야 하니까.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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