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진경산수 총정리: 인왕제색도·금강전도·계상정거도 핵심 (Jeong Seon)


1751년 초여름 비가 그친 오후, 인왕산(서울 서쪽 산)의 바위에 안개가 걸렸다.

정선(鄭敾·1676–1759·호 겸재·조선 후기 화가)은 청운동(한양 북악산 자락·출생지 전승) 골짜기에서 종이를 편다.

붓끝이 젖은 바위 결을 따라갔다.

그는 비 개인 산의 색을 뜻하는 ‘제색(霽色·어원)’을 제목에 넣기로 마음먹는다.


장대비의 물기가 바위에 남아 윤이 도는 순간은 길지 않다.

먹을 한 번에 과하게 올리면 산의 질감이 죽는다.

그는 바람이 바뀌기 전에 등줄기를 펴고, 안개가 걷히기 전까지 산의 골을 잡는다.

그날의 그림이 훗날 국보 제216호가 되는 「인왕제색도(1751)」다.

'이건희 컬렉션' 으로도 굉장히 유명하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비 갠 직후 인왕산 / Jeong Seon, “After Rain at Mt. Inwang” (1751)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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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오른쪽 아래의 기와집 1동은 이병연의 집으로 보거나(논쟁), 

정선 자신이 살던 ‘인곡정사’로 보기도 한다(논쟁). 

확정 사료는 없으므로, ‘1751년 비 갠 직후 인왕산을 현장 감각으로 포착한 진경산수’라는 큰 맥락이 핵심이다.


정선 ‘인곡정사’ / Jeong Seon, “Ingokjeongs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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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남의 산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중국의 절승을 모사하는 관행 대신, 한양과 금강을 스케치북에 먼저 담았다.

진짜 경치를 그린다는 뜻의 ‘진경(眞景·어원) 산수’라는 말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쓴 교과서는 산천 자체였다.


진경산수란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에 겸재 정선에 의해 정립된 새로운 화풍으로, 

우리나라의 실제 경치를 직접 보고 그린 산수화다. 

기존의 관념적인 중국식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의 실재하는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독창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1676년,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전승).

서화에 재능을 보였으나, 양반 문인 여가로서의 ‘문인화’ 길은 멀었다.

이웃의 추천으로 도화서(조선 왕실 화원 조직) 출입 기회가 생겼고, 관청·사가의 주문을 받으며 생계를 꾸렸다(전승).


그의 일과는 거칠고 단순했다.

먼저 걷고, 보고, 배치를 정하고, 현장에서 가는 붓으로 골격을 쳤다.

돌아와서 종이에 대작으로 옮겼다.

현장에서의 ‘메모’와 방 안에서의 ‘구성’이 맞물려 한 장의 산이 되었다.


1730년대, 그는 금강산(강원·함경 경계의 명산)을 여러 차례 올랐다(전승).

계곡·봉우리·사찰을 분할 채집하듯 그렸다.

1734년엔 그 조각들을 한 화면으로 엮어 「금강전도」를 완성했다.

봉우리들은 과장 없이 단단했고, 물길은 산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정선 ‘금강전도’, 금강산 전경 / Jeong Seon, “Geumgang jeondo (General view of Mt. Geumgang)”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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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는 한강 북쪽의 봉우리들이 그의 모델이었다.

북악, 인왕, 북한, 도봉.

도성의 서쪽에서 보면 산맥이 겹겹이 선다.

그는 겹친 선들을 각기 다른 농담으로 분리했다.


정선의 붓은 ‘기억’과 ‘관찰’의 중간에 있었다.

현장 메모를 토대로, 집에서 산의 숨을 다시 정리했다.

이 방식은 ‘실경+구성’이라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논쟁).

그러나 그가 강조한 것은 “먼지와 나무를 같은 붓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기본 규칙이었다.


정선 ‘광진’, 한강 나루 / Jeong Seon, “Gwangjin (Han River 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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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활은 검박했다.

아침엔 사람들을 만나 주문을 받았고, 낮에는 산을 걸었다.

저녁엔 종이를 넓게 펴고 하루의 선을 정리했다.

술자리를 길게 끌지 않았고, 소문을 남기지 않았다(전승).


그의 벗들은 같은 시대의 화가·문인들이었다.

심사정(沈師正·1707–1769·호 현재), 윤두서(尹斗緖·1668–1715·호 공재)와 함께 ‘삼재(三齋·전승)’로 묶이곤 했다.

누군가는 그의 먹색이 너무 엄격하다고 농담했고, 누군가는 “이제야 조선의 산이 화폭에 올랐다”고 평했다.

그는 웃고 넘겼다.


화원으로서 그는 주문에 응해야 했다.

사찰의 의식도, 사가의 병풍도, 왕실 행사도 그의 손을 필요로 했다.

주문과 자신의 산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루를 나누었다.


정선 ‘개화사’ 사찰 풍경 / Jeong Seon, “Gaehwasa (now Yaks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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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엔 남의 그림, 오후엔 자신의 산.

그는 ‘내가 본 산과 강’의 목록을 적었다.

한강변 나루, 수락산의 바위, 관악산의 능선, 금강산 내금강의 만폭동.

목록은 곧 작품의 연표가 되었다.


그의 기법은 대담하지 않았다.

먹의 농담을 층층이 올리고, 준법(주름 표현)을 바꿔 바위의 결을 달리했다.

폭포의 흰 물줄기는 종이를 남기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이 절제의 문법이 화면에 ‘공기’를 만들었다.


「인왕제색도」의 ‘제색’은 우연의 시간이 만든다.

비가 지나간 바위가 마르기 전에만 보이는 명암.

정선은 이 시간의 창을 노렸다.

그는 1751년, 일흔다섯의 나이에 산을 가까이서 다시 그렸다.


그는 늘 ‘어제 본 산’과 ‘지금 그리는 산’을 겨뤘다.

기억은 나이를 먹고, 종이는 젊었다.

이 둘의 간격을 줄이는 일이 그의 생애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산 밑에 살았다.


한양 도성 북서의 옥인동·청운동 골짜기에서 그는 노년을 보냈다.

비가 오면 창문을 열고, 그치면 문밖으로 나갔다.

가능하면 높은 데 오르지 않았다.

산은 가까이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선 ‘소요정’, 양천 일대 / Jeong Seon, “Soyojeong” (Yangcheon are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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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산수는 정치도, 경제도 아닌 구체적인 장소였다.

왕릉길의 소나무, 사직단 언덕의 단풍, 서촌 골목의 지붕들.

그는 이름붙일 수 있는 장소를 화폭에 새겼다.

이 습관은 조선 후기 사람들의 ‘고향감’을 강화했다.


칭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이 지나치게 ‘사실’에 갇혀 시적 여백이 줄었다는 지적이 있었다(논쟁).

또 어떤 이는 그 역시 중국 화법의 구성을 빌렸다고 말했다(논쟁).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산을 더 걸었다.


그가 그린 금강은 정치 지도를 바꾸지 않았지만, 심리 지도를 바꿨다.

“우리 산이 주인공인 그림”이 늘었다.

후대의 김홍도·정약용 시대에 ‘조선의 장소’를 기록하려는 경향이 이어졌다.

진경은 양식이 아니라 습관이 되었다.


정선 ‘풍악내산총람도’, 금강산 주요 지점 도판 / Jeong Seon, “Pungak Naesan Chongram Do” (annotated overview)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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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상에는 작은 의식이 있었다.

종이를 펼치기 전, 그날의 물을 먼저 떠왔다(전승).

물의 온도와 먹의 번짐을 확인한 뒤 첫 선을 긋는다.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다시 보는 과정이었다.


그는 말년에 관직을 벗고 칠순 이후를 골짜기에서 보냈다(전승).

한양의 서쪽 하늘이 맑은 날이면 인왕의 윤곽이 잘 보였다.

그는 몇몇 병풍과 족자를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759년, 그의 나이 여든넷이었다.


인왕산 성곽과 한양 도심 원경 / Fortress Wall on Inwangsan, Seoul (photo)
Wikimedia Commons, CC BY-SA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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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은 두 장의 상징적 지도다.

하나는 「금강전도(1734)」, 다른 하나는 「인왕제색도(1751)」.

두 작품은 1984년 같은 날 국보로 지정되었다.

한 장은 한국의 산맥을, 다른 한 장은 한양의 산을 대표한다.


천원권 뒷면의 풍경은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1746)」다.

퇴계 이황(1501–1570)이 머물던 도산서당(경북 안동)을 상상 복원해 그린 장면으로, 

『퇴우이선생진적첩(보물 제585호)』에 실린 작품이다.

2007년 개편된 1,000원권 뒷면 도안에 채택되며 대중적 아이콘이 되었다.

한때 ‘위작’ 논란이 있었지만 2008년 문화재위원회 과학감정 결과 ‘진품’으로 결론났다.

작품명 뜻은 ‘시냇가(溪上)에 고요히 머묾(靜居)’이다.


대한민국 1,000원권(2007), 뒷면 ‘계상정거도’ 도상 / KRW 1,000 banknote reverse (2007), motif “Gyesangjeonggeodo”
Wikimedia Commons,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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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문서가 풍부하진 않다.

그러나 주문서와 납품 기록, 제자들의 전언은 남아 있다(전승).

‘값을 깎는 대신, 현장을 보게 해달라’는 농담 섞인 요구도 있었다고 한다(전승).

그는 협상보다 스케치를 택했다.


그의 취향은 분명했다.

튀는 색보다 먹의 편차.

과장된 기암괴석보다 현지의 바위결.

폭포의 소리보다 물줄기의 자리.


정선 ‘박연폭포’ / Jeong Seon, “Bakyeon Falls”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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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산수는 오늘의 도시에도 남아 있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 유리벽 뒤에서, 그의 산이 다시 보인다.

작품의 소장 경로는 바뀌고, 전시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그림의 위치는 그대로다.

‘우리의 산을 본다’는 관람의 습관 말이다.


그가 남긴 영향은 미술사를 넘어 생활 풍경으로 번졌다.

지도와 우편엽서, 교과서와 관광 안내판에서 ‘실경 묘사’의 규범이 형성됐다.

디자인과 영상에서도 ‘현지 조사→구성’의 흐름이 표준이 되었다.

이 뿌리에 정선의 방법론이 놓여 있다.


정선의 삶에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은 첫 답사였다.

그날 이후 그는 스승보다 산을 더 믿었다.

책보다 구름의 움직임이 정확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기록보다 장면을 택했다.


그의 그림은 장르적 쾌감도 준다.

비 개인 인왕의 먹빛, 금강의 연속 봉우리, 한강 물안개.

두 장면만으로도 그는 한 시대의 시각 문법을 바꿨다.

시점과 거리, 먹의 숨을 조절하는 방식 말이다.


정선의 약점도 있다.

인물과 사건 대신 풍경에 집중하는 그의 선택은 사람의 이야기를 옅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는다(논쟁).

그러나 그는 사람을 풍경에 숨겨 두었다.

나루의 배, 산길의 점, 사찰의 마당.

작은 디테일이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한다.


오늘 우리가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질문은 단순해진다.

“이 산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정선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그는 감상이 아니라 답사를 요구한다.


정선의 말년은 조용했지만, 여파는 길다.

국보로 지정된 그의 두 그림은 근현대의 미술 담론에서 ‘한국적인 것’의 근거로 자주 호출된다.

진경산수는 관광 홍보물의 상투어가 되었고, 동시에 현장 기록의 기준선이 되었다.

‘먼저 가서 본다’는 원칙은 기자·건축가·디자이너의 일에도 스며들었다.


정선 ‘압구정’, 한강변 누정 / Jeong Seon, “Apgujeong” (pavilion on Han River)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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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을 다시 불러온다.

1751년, 비 개인 뒤의 인왕.

정선은 붓을 들고, 산의 골짜기마다 남은 물기를 더듬는다.

그 짧은 시간에만 생기는 색.

그는 그 색을 ‘제색’이라 불렀다.

그리고 종이를 접었다.


정리하면, 정선은 조선의 산천을 실경으로 끌어와 화면의 문법을 바꾼 화가다.

도화서의 주문과 자신의 답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고, 1734년 「금강전도」와 1751년 「인왕제색도」로 정점을 찍었다.

칭찬은 ‘조선 산천의 주역화’였고, 비판은 ‘사실의 과도한 구속’이었다(논쟁).

그러나 그의 선택은 한국 회화의 지형을 바꾸었다.

산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그리는 방식으로.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Jeong Seon (1676–1759) pioneered Korea’s “true-view” landscape by painting places he walked. 
Trained around the Royal Painting Bureau, he sketched on site and composed at home; his peaks are Geumgang Jeondo (1734) and Inwangjesaekdo (1751), capturing Inwangsan just after rain. 
The small tiled house at lower right is read as friend Yi Byeong-yeon’s or his own Ingokjeongsa (contested). 
Gyesangjeonggeodo (1746) later appeared on the 1,000-won note. 
His method reshaped later artists and everyday visu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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