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럽연합은 만들어졌는가: 냉전, 경제, 평화가 만든 거대한 실험 (The History of the European Union)



 이 글은 《유럽연합 조약집》, 《마스트리히트 조약 전문》, 로마조약(1957), 

ECSC 창설 문서(1951), 그리고 유럽통합사 연구서들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도시에는 늘 냄새가 남는다.

불탄 석조 건물의 냄새, 굶주린 아이들의 기침 냄새,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빈자리에서 풍기는 공허의 냄새.

1945년, 유럽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뒤였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모두 잿더미 위에 서 있었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부하던 이들도 승리의 환호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철로는 끊어지고, 항구는 무너졌고, 공장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다시는 같은 전쟁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갈망이 자리했다.

유럽연합(EU)의 역사는 바로 이 절망과 갈망 속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외교관 로베르 슈만(훗날 ‘유럽의 아버지’라 불린 인물)은 

어느 날 연설 원고를 내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알았다.

이제는 국가의 자존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들고 있던 원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생산하는 석탄과 철강을 공동 관리할 것을 제안한다.”


1950년 5월 9일, 파리 외교부 청사에서 그는 발표를 했다.

이 제안은 단순한 경제 계획이 아니었다.

석탄과 철강은 전쟁의 심장이었다.

탱크와 총, 대포는 철강으로 만들고, 공장은 석탄으로 돌아갔다.

만약 두 나라가 이 자원을 함께 관리한다면, 다시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할 수 없을 것이고, 

프랑스도 독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었다.


출처


백성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오랜 세월의 적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전쟁의 폐허를 바라본 이들에게는 평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1951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여섯 나라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 서명했다.

유럽연합의 첫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1957년, 로마.

여섯 나라 대표들이 모여 또 하나의 문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바로 로마조약이었다.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창설되었다.

그들은 단일시장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상품, 자본, 노동,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날 저녁, 한 대표가 회의장에서 나와 동료에게 속삭였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경제의 문을 연 것이 아니오.

미래의 유럽을 연 것이오.”


그러나 유럽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냉전의 그림자가 대륙을 덮고 있었다.

동쪽에는 소련이 동독과 폴란드, 체코, 헝가리를 묶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만들었다.

서쪽의 유럽은 미국과 함께 나토(NATO)에 속해 있었다.

만약 유럽이 분열된 채 남아 있다면, 두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영원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럽통합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정치적 생존의 전략이기도 했다.


1960~70년대, 유럽경제공동체(EEC)는 점차 확대되었다.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가 새롭게 합류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처음에는 영국 가입을 반대했지만, 결국 시간은 유럽통합의 편에 있었다.

1973년 석유파동이 몰아쳤을 때, 유럽은 에너지 위기에 함께 대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경제 공동체는 서서히 정치적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었다.

1979년에는 유럽의회가 처음으로 직접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유럽의 시민들이 직접 유럽을 선택한다.”

이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국가를 넘어선 정체성이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

작은 네덜란드 도시에서 역사적 조약이 체결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연합(EU)의 공식 출범을 알렸다.

이 조약은 단일 시장을 넘어서 단일 통화, 단일 외교, 단일 안보 체제를 향한 약속이었다.

“오늘 우리는 유럽 시민으로 태어난다.”

그날의 환호는 유럽통합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1999년, 유로화가 도입되었다.

유로화는 단순한 화폐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로마 시대 이래 처음으로, 유럽의 수많은 나라가 같은 주머니를 쓰게 된 것이다.

파리에서 사용한 지폐가 베를린에서, 로마에서, 마드리드에서 같은 가치로 통용되었다.

이는 곧 경제와 정체성을 동시에 묶는 실험이었다.


그러나 모든 실험에는 위기가 따른다.

2008년 금융위기와 그리스 재정위기는 유로존을 흔들었다.

“우리는 정말 하나의 운명 공동체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부유한 북유럽과 힘겨운 남유럽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리고 2016년, 영국은 국민투표로 "브렉시트(Brexit)"를 선택했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유럽연합에서 주요 회원국이 이탈하는 첫 사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브렉시트는 남은 국가들에게 

“유럽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히려 나머지 회원국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유럽연합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교훈이다.

EU는 단순한 경제 협력체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제도적 구현이고,

냉전 속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며,

세계화 시대에 유럽 시민의 권리를 지키려는 집단적 실험이다.


길가메시가 불멸을 찾다가 결국 도시와 사람 속에서 영원을 깨달았듯,

EU도 영원한 제국을 꿈꾼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기를 관리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오늘도 브뤼셀의 유럽의회 의사당에서는 27개국 대표들이 모여 끝없는 논쟁을 벌인다.

언어는 다르고, 문화는 다르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말한다.

“우리는 다투더라도 함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다시 전쟁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아직도 완성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서사이며, 불완전하지만 멈추지 않는 실험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