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Vienna·오스트리아의 수도) 겨울 밤,
헤디 라마르(Hedy Lamarr·본명 Hedwig Eva Maria Kiesler·1914–2000·오스트리아 출신 배우·발명가)가 창문을 닫았다.
피아노 소리가 멎자 거실엔 손목시계 초침만 남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틀어 올렸고, 보석을 빼서 상자에 넣었다.
이 집의 주인은 남편 프리츠 만들(Fritz Mandl·무기 사업가)이었지만, 오늘의 주인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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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디 라마르 1939년 스튜디오 초상 / Hedy Lamarr studio portrait, 1939” UCLA Library, Los Angeles Times Photographic Collection, Wikimedia Commons — CC BY 4.0. 위키미디어 공용 |
두 해 전, 1933년 체코 영화 「엑스터시(Ecstasy)」가 유럽을 흔들었다.
수영 장면과 근접 촬영으로 논란이 컸고, 이름 없는 19살 배우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명성은 보호막이 되지 않았다.
만들은 손님들 앞에서 그녀를 “너무 눈에 띈다”고 낮추었고, 그의 연회에서는 탄약·무기 거래가 식탁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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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스터시’(1933)의 헤디 키슬러 / Hedy Kiesler in the 1933 film Ecstasy”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날 밤, 그녀는 하녀의 검정 드레스를 입었다(전승).
문간의 경비가 졸 때, 그녀는 계단을 내려갔다.
비엔나를 떠나 파리로, 다시 런던으로.
앵글로·유대계 여성이라는 명함과, 독재의 그림자에서 멀어지려는 발걸음 하나.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서 루이스 B. 메이어(Louis B. Mayer·MGM 대표)가 그녀를 보았다.
메이어는 계약서의 급여를 낮게 썼다.
그녀는 거절했다.
하루 뒤, 옷차림과 말투를 바꾸고 다시 나타나, 더 많은 액수를 받아냈다.
이름도 바뀌었다.
헤디 라마르.
헐리우드의 조명은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담았다.
「알제(Algiers·1938)」, 「좀도둑 사라(1941)」 같은 작품이 스크린을 채웠다.
미국이 전쟁으로 기울자 전시 재원을 모으는 밤이 늘었다.
그녀는 무대에 올라 전쟁 채권을 팔았다.
팬들이 줄을 섰고, 그녀는 입맞춤을 경매처럼 내걸었다(전승).
그게 전쟁의 기계에 들어갈 돈이라면, 유명세도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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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 캔틴에서 병사들에게 서빙” / “Marlene Dietrich & Rita Hayworth serving at Hollywood Canteen” Wikimedia Commons·Library of Congres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러나 조명 밖에서 그녀의 손은 다른 것을 잡고 있었다.
부엌 탁자, 악보, 연필, 그리고 피아노 롤(자동 연주용 종이 롤).
조지 앤타일(George Antheil·작곡가)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는 기계 장치의 박자에 환했고, 그녀는 무선 통신의 약점에 집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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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조지 안타일의 1922년 초상” / “Composer George Antheil, 1922 portrait”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문제는 간단했다.
송신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으면, 적의 전파 방해로 무선 유도가 끊긴다.
해법은 리듬을 바꾸는 것.
주파수를 짧은 간격으로 바꿔 가며, 송신기와 수신기가 같은 시각표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피아노 롤처럼 구멍 배열을 맞추면 어때요?”라고 말했다.
앤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장의 종이 롤이 88개의 건반처럼 채널을 예고하고, 롤의 패턴이 끝까지 같이 굴러가면 서로 딱 맞는다.
방해가 한 음을 막아도 다음 음으로 넘어가면 곡은 멈추지 않는다.
이 원리는 주파수 도약(frequency hopping·어원)의 심장, 더 넓게는 스프레드 스펙트럼(spread spectrum·어원)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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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통신 시스템 특허 도면 / US Patent 2,292,387 ‘Secret Communication System’ drawing” Wikimedia Commons — 미국 연방정부 문서,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해 여름, 그녀는 발명자 등록 서류에 본명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를 적었다.
1941년 6월, 특허 출원이 접수되었고, 1942년 8월 11일 특허가 발행되었다(미국 특허 US 2,292,387).
다만 해군은 ‘피아노 롤 기계장치’의 내구성과 실전 운용성을 의심했다.
서랍 속의 아이디어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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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디 라마르(헤디 키슬러 마키) 서명” / “Signature of Hedy Kiesler Markey (Hedy Lamarr)”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미국). 위키미디어 공용 |
헐리우드의 생활은 찬란했고, 사람사는 일은 복잡했다.
그녀는 여섯 번 결혼했다.
프리츠 만들, 진 마키(Gene Markey·시나리오 작가·프로듀서), 존 로더(John Loder·영국 배우), 테디 스타우퍼(Teddy Stauffer·밴드 리더), W. 하워드 리(텍사스 석유 사업가), 루이스 J. 보이스(Lewis J. Boies).
사이에서 아들 앤서니(Anthony)와 딸 드니즈(Denise)가 자랐다(드니즈·입양 배경과 기록은 출처마다 다름·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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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디 라마르와 남편 존 로더(1946) / Hedy Lamarr with husband John Loder, 1946” Los Angeles Times 사진 아카이브(UCLA) via Wikimedia Commons — CC BY 4.0. 위키미디어 공용 |
그녀는 관계에 대해서도, 발명에 대해서도 후퇴하지 않았다.
교통 신호체계 개선안, 탄산 음료 정제 같은 생활 발명도 내놓았다(상업화 실패).
화려한 파티를 즐기기보다, 밤에 도면을 확인하고 아침에 산책을 나가는 쪽을 택했다.
연애와 이혼이 신문을 채워도, 그녀가 집어넣은 특허 번호는 대중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촬영장에서 그녀는 소품 담당자에게 물었다.
“이 소리, 어디서 나는 거죠?”
진동, 톱니, 고정핀.
현장의 물건을 뜯어보는 습관은 영화보다 그 뒤가 더 재미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통신의 세대가 바뀌었다.
전자 회로·반도체·작동 신뢰가 오르자, ‘널리 펼쳐 쓰는 신호’라는 개념이 군·민간을 피해 퍼졌다.
직접 혈통을 어디까지 잇느냐는 연구자마다 해석이 갈리지만(논쟁), 분산 스펙트럼은 훗날 GPS·블루투스·와이파이 같은 일상의 기술에 뿌리로 들어갔다.
그 묘사에는 언제나 한 줄이 따라다녔다.
“헐리우드 스타가 전파를 춤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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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 헤디 라마르의 별 / Hedy Lamarr’s star on the Hollywood Walk of Fame” Flickr — CC BY-NC 2.0(비영리). Flickr |
세월은 그녀의 얼굴을 뉴스에서 지웠다.
1960년대, 1990년대에 작은 법정 사건이 있었고(경미한 절도 혐의·벌금·집행유예),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 시기도 길었다.
그러나 말년에 몇 통의 전화가 왔다.
“전자 프런티어 재단(EFF)에서 상을 드리려 합니다.”
1997년, 그녀는 전화를 통해 수상을 알리는 소식을 들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기자에게 말했다.
“나는 얼굴로 돈을 벌고, 머리로는 보너스를 받았죠.”
오스트리아는 생일을 기념하는 날을 만들었다.
헐리우드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2014년에 그녀는 ‘발명가의 전당’ 명단에 올랐고, 다큐멘터리들이 다시 그녀의 드로잉을 비췄다.
특허 서류의 서명 옆에, 오래된 필름의 스틸 컷이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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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발명가의 전당 박물관 외관(2005) / 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Museum exterior, 2005”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그녀는 무엇을 좋아했나.
정답은 단순했다.
작동하는 것.
리듬이 맞는 것.
영화 세트의 조명도, 주파수표의 숫자도, 박자가 맞으면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싫어했나.
헛된 구경.
“보여 주기 위한 기계는 필요 없어요.”
그녀는 무대 위에 올라 박수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손바닥에 자국이 남는 드라이버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인간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한 시대의 미인이라는 라벨은 칭찬과 부담을 동시에 가져왔다.
언론은 이혼과 소송을 좋아했지만, 그녀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방 옆 서랍의 노트를 보았다.
거기엔 날짜, 부품, 실패, 다시 시도 같은 단어만 있었다.
그녀의 방식은 논리였다.
“방해가 예상되면, 일정표를 바꾼다.”
영화에서는 원테이크, 실험실에서는 다테이크.
박자를 쪼개면 간섭은 잘 먹히지 않는다.
이는 음악과 무선이 만날 때 생기는 법칙이었다.
가족에게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나.
딸에게는 자주 전화를 걸었고, 아들은 그녀의 말년을 곁에서 지켰다.
아들에게 건넨 상자는 낡은 발명 드로잉을 담고 있었다.
거기엔 “적에게 들리지 않는 대화”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삶을 칭찬만으로 덮을 수는 없다.
전장에서 쓰였어야 할 발명이 늦게 빛을 본 점, 유명세가 아이디어의 신뢰를 오히려 갉아먹은 점, 사적인 관계와 공적 명성 사이의 충돌.
그러나 비판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서랍 속 아이디어는 결국 산업의 규칙이 되었다.
영화적 쾌감의 순간을 고르라면, 부엌 탁자 위 피아노 롤의 구멍이 늘어선 장면이다.
두 사람이 종이를 밀며, “여기서 채널을 바꾸죠”라고 말하는 순간.
장면은 작지만, 파장은 길었다.
그 파장은 전 세계 수십 억 대의 기기 안에서 와이파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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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 롤 상자 진열” / “Collection of player piano rolls on shelves” Wikimedia Commons, CC0(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
그리고 그보다 더 이른 장면 하나.
하녀의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던 젊은 여성.
그가 탈출한 것은 저택이었지만, 그가 나아간 곳은 장르였다.
그녀는 미인상이 아니라 원리를 가진 사람으로 자기 인생을 다시 설계했다.
정리하면, 헤디 라마르는 배우이자 발명가로 살았다.
헐리우드의 조명 아래에서, 동시에 부엌의 조명 아래에서.
주파수를 바꾸는 종이 롤과, 이름을 바꾸는 계약서 사이에서.
그녀는 삶의 리듬을 스스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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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디 라마르의 빈 중앙묘지 묘소” / “Hedy Lamarr’s grave at Vienna Central Cemetery”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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