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종소리가 멈춘 뒤, 한양(조선 도성)의 골목은 낯설게 고요했다.
서리(아전·문서 담당 하급관리)인 박윤(가명)은 관청 마루에 서서 방금 받은 유지를 다시 읽었다.
“사원 토지·노비를 거두고, 승려는 도성 출입을 금한다.”
글자는 마른 먹처럼 선명했고, 기한은 짧았다.
비가 내리면 강가의 물길이 바뀌듯, 나라의 길도 그날부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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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 사상가, 혁명가 정도전 커먼즈 저작자표시 2.0 일반 라이선스 나무위키 |
그 변화의 논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정도전(유학자·개혁가)은 불씨잡변(불교 비판서)로 국가의 질서를 유교 예제(禮) 위에 세우자고 주장했다.
새 왕조 조선(1392)이 기둥을 세우자, 그의 말은 곧 정책의 설계도가 되었다.
사원의 토지는 누가 경작하고, 수확은 어디로 갔는지 장부로 묻기 시작했다.
사원의 노비 장정은 다시 군역과 부역의 이름으로 불려 나왔다.
산문을 지키던 승려들은 곳곳에서 도첩(度牒·승려 신분증)을 검사받았다.
허가 없이 길을 떠난 이는 산문으로 되돌려졌고, 어떤 이는 아예 머리를 기르고 세속으로 나왔다.
한양의 문에는 새 규칙이 걸렸다.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도성 안의 관사와 사찰 터는 점차 관청과 유교 서원으로 성격을 바꾸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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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양 도성 지도 / Woodblock map of Hanyang (Seoul) in the Joseon er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근래까지 불전(佛殿) 옆에서 주문을 받던 목수 김봉(가명)은 일이 끊겼다.
불상 대신 문묘(공자 사당)와 향교의 기둥이 새로 올라갔다.
도시 빈민에게 죽을 퍼주던 사찰의 부엌은 문이 닫혔다.
아이를 데리고 줄을 서던 과부는 다음 주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종교는 경제였고, 경제는 생활이었다.
정책은 점차 정밀해졌다.
태종(조선 3대 왕) 대에는 사원 정리의 강도가 높아져 토지·노비 환수가 진척됐고(논쟁),
세종(조선 4대 왕) 대에는 전국 사찰을 분류·축소해 관리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오래된 종파들은 묶였다.
사찰은 산으로 더 올라갔고, 도시는 유교의 예식으로 중심을 맞췄다.
“숭유억불(유교를 높이고 불교를 억제함(어원))”은 구호가 아니라 행정 용어가 되었다.
그 변화에 맞서 함허 득통(선승·법명: 기화(己和))은 붓을 들었다.
그는 『현정론(유교 비판·불교 옹호서)』으로 응답하며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 하나만은 아니라고 썼다.
글은 세상을 뒤집진 못했지만, 논쟁의 여백을 남겼다.
그 여백 속에서 어떤 고을은 산사에 남은 농번기 구휼을 유지했고,
어떤 고을은 사찰의 곡간을 비우며 장부를 새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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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불숭유(抑佛崇儒) ’ 부당성 항거…현실적인 반야사상가 불교신문 |
한양 외곽의 고개를 넘던 박윤은 길가에서 승려 한 명을 만났다.
승려는 도첩을 내밀었고, 박윤은 관청 낙인을 확인했다.
“도성 안으로는 못 들어옵니다.”
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산속 암자에서 겨울을 날 계획이라고 했다.
문자의 위치도 달라졌다.
향교에서는 『소학』과 『주자가례』가 생활의 규칙이 되었고, 관혼상제의 절차가 고을 단위로 표준화됐다.
사원의 의식은 줄어들었고, 공공의 예식은 유교가 맡았다.
결혼식의 상 위에서 불경이 빠지고, 옆 자리엔 족보가 올라왔다.
사람들은 가문의 역사로 자신을 소개했다.
종교는 가계(家系)와 국가 행정의 언어로 다시 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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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어진 스케치 / Sketch of King Sejo”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렇다고 불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조(조선 7대 왕) 대에는 왕실 불사(佛事)와 불전 간행이 일시 활기를 띠었다.
간경도감(불교 경전 간행기관)이 설치되어 한글·한문 경전이 찍혔고(논쟁),
『월인석보(불경 언해서·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 합본)』 같은 책이 사람 손에 올랐다.
억제의 큰 흐름 속에서도 왕실과 민간의 신앙은 다른 경로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세는 분명했다.
사찰은 수를 줄이고, 승려는 산으로 물러났다.
국가의 세금·군역·교육 체계는 유교 예제를 기준으로 정비됐다.
불전의 종소리는 산허리에 남았고, 도성의 종각은 관청의 시간표를 울렸다.
어디서 종이 울리는가가 그 사회의 질서를 말했다.
| “법주사 팔상전 / Palsangjeon wooden pagoda at Beopjusa”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변화의 비용은 사람에게 떨어졌다.
사찰 경제에 걸려 있던 장인과 상인은 일감을 잃었고,
빈민 구휼과 장례를 도왔던 네트워크는 행정의 도움 없이 버텨야 했다.
관청은 새 규칙을 공표했지만, 새 규칙은 밤에 배고픈 아이의 울음을 바로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떤 고을의 유생들은 향약에 ‘곡물 돌봄 조항’을 넣었다(전승).
종교의 빈자리를 공동체 규약이 메웠다.
산사는 다른 길을 택했다.
선(禪)은 더 고요해졌고, 교(敎)는 더 얇아졌다.
승려들은 산중의 비구니 절과 암자를 중심으로 기금과 농사를 이어갔다.
도시의 소음이 줄어든 만큼, 시와 선문답은 더 길어졌다.
불교는 도시의 종교에서 산의 종교로 성격을 바꾸며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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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승려 초상 / Portrait of a Buddhist monk (Joseon period)”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hiladelphia Museum of Art, PD-Art). 위키미디어 공용 |
박윤은 몇 해 뒤 다시 같은 고개를 넘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고, 집안의 제사 순서가 몸에 익었다.
아버지의 초상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명절마다 향은 같은 그릇에 피워 올랐다.
도시의 삶은 예식으로 정돈되었다.
그는 때로 산을 올랐다.
한암자에서 노승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셨는가.”
“관청에서 왔습니다.”
“그럼 관청에서 배우는 마음을 여기서 한 번 쉬었다 가시오.”
박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도성의 시간표와 산중의 호흡이 한순간 겹쳤다.
세월이 흐르고, 기록이 정리됐다.
사원 정리의 숫자와 연도는 문헌마다 다르게 남았다(논쟁).
어떤 책은 사찰의 수를 급격히 줄였다고 하고, 어떤 보고서는 지역별 차가 컸다고 적는다.
그러나 굵은 선은 같다.
초기 조선은 가문·관청·향교의 축으로 사회를 정비했고,
불교는 그 바깥에서 축소·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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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대장경 목판 /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at Haeinsa” 산문 중심의 불교 유산이 ‘억불’ 속에서도 존속한 실물 증거.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이 변화는 도덕의 승패만은 아니었다.
행정의 기술, 세수의 재배치, 노동의 이동, 복지의 재편이 함께 움직였다.
종교 정책은 곧 사람의 자리 정책이었다.
누가 도성에 들어오고, 누가 산으로 가는가.
누가 장부에 오르고, 누가 장부에서 지워지는가.
그 질문에 대한 국가의 답이 바로 ‘숭유억불’이었다.
밤이 깊을 무렵, 한양의 종각이 시간을 알렸다.
관청의 불이 꺼지고, 산중의 목탁이 다시 울렸다.
두 소리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자리를 분명히 했다.
초기 조선의 종교 정비는 그렇게 끝나지 않은 채로, 오늘까지 제도의 골격을 남겼다.
도성의 예식과 산중의 침묵, 두 풍경이 한국사의 한 장을 이룬다.
이 글은 『불씨잡변』·『현정론』, 『조선왕조실록』 관련 조목과 학계 통설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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