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던 1973년 겨울, 김정우(서울의 부품 조달 담당자)는 회사 공지문을 들여다봤다.
난방 온도를 낮추고, 야간조명을 줄이고, 유류 사용을 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목표는 단순했다.
공장을 멈추지 않고, 집을 춥지 않게 지키는 일.
그가 라디오를 켜자 반복되는 단어가 들렸다.
석유.
감산.
금수.
오아펙(OA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의 조치로 원유 공급이 줄고 가격이 급등했다는 뉴스였다.
10월, 욤키푸르 전쟁 직후 오아펙이 금수와 감산을 선언했다.
배가 멈추자 가격표가 먼저 뛰었다.
산유국은 공시가격(원유의 기준 판매가)을 연속 인상했고 유가는 몇 달 사이 네 배에 근접했다.
미국은 스윙 생산력(수요 변동에 맞춰 즉시 증산·감산하는 여유 생산능력)을 잃어 완충이 사라져 있었다.
달러의 금태환 중단(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약속 종료)으로 약세가 이어지자 인상 명분이 커졌다.
비축과 정보 공유는 허술했다.
소문이 사재기를, 사재기가 대기줄을 만들었다.
가격 통제와 배분 규칙은 신호를 왜곡해 ‘품절’ 표지를 더 자주 걸리게 했다.
그 겨울, 일시적 차질은 구조적 재편으로 바뀌었다.
정우는 달력을 보며 난방유가 들어올 날을 셌다.
문제의 ‘적대자’는 한 사람이나 한 나라가 아니었다.
전기, 자동차, 난방, 비료, 플라스틱까지 석유가 스며든 생활 전체였다.
우리는 그 구조 위에서 살고 있었고, 구조가 흔들리자 모든 장면이 동시에 흔들렸다.
데드라인은 계절이었다.
겨울이 오는 속도에 맞춰 난방유를 확보해야 했다.
회사에서는 다음 주에 들어올 원유 선박, 다음 달의 전력 피크 시간, 이번 분기의 생산계획을 동시에 계산했다.
달력의 날짜가 곧 정책이 되었다.
실패했을 때의 손실은 바로 체감됐다.
집에서는 온수 사용 시간이 줄었고, 전기히터 대신 두꺼운 외투를 꺼냈다.
회사에서는 생산 속도가 느려지고, 초과근무가 사라졌다.
버스 배차가 줄면서 출퇴근 시간은 길어졌다.
가격표는 빠르게 바뀌었고, 장바구니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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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오리건 포틀랜드 주유소의 긴 대기줄 / Bird’s-eye view of a Portland gas station queue in 1973 Wikimedia Commons, NARA/EPA DOCUMERICA,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김정우의 하루와 나란히,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도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샌드라(미국 포틀랜드의 주유소 직원)는 ‘가솔린 없음’ 표지판을 걸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줄은 코너를 돌아 길게 이어졌고, 홀짝제처럼 요일과 번호판으로 주유 가능한 날이 나누어졌다.
마리아(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은행 사원)는 일요일마다 차를 집에 두었다.
차 없는 도시가 낯설었지만, 실제로 도로가 비자 절약이 실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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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스테르담, 자동차 대신 롤러스케이터·자전거로 가득한 거리. 출처·라이선스: 네덜란드 국립기록원(Nationaal Archief) · CC0 위키미디어 공용 |
사토 마사코(일본 오사카의 가정주부)는 휴지와 세제를 사려 새벽부터 줄을 섰다.
생활용품과 등유가 동시에 품귀를 보이며 ‘쇼크’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다.
아흐메드(이집트 카이로의 제빵사)는 밀가루 가격을 매일 확인했다.
빵 보조금이 삶과 직결되었고, 줄을 선 사람들의 표정은 예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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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유소 매진 안내판, ‘기름 없음’ / “Out of Gasoline” sign at Oregon station, 1973 Wikimedia Commons, NARA/EPA DOCUMERICA,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김정우의 회사는 부품 배달 차량을 합승제로 묶었다.
불 꺼진 생산라인을 돌아보며 그는 계산했다.
기름은 시간이고, 시간이 줄면 생산이 줄며, 생산이 줄면 월급이 줄어든다.
가계는 돈 대신 시간을 줄 서서 지불했다.
각국의 정책은 숫자와 표지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시속 55마일로 낮췄다.
겨울철에는 일광절약시간제를 시험해 저녁 전력 피크를 낮추려 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차량 번호판에 따라 주유 요일을 나눴다.
유럽은 ‘무차일요일’을 시행한 도시가 늘었다.
정책은 선언이 아니라 체험이었다.
사람들은 비어 있는 도로와 어두운 쇼윈도를 직접 보면서 절약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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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urn Off the Damn Lights” conservation sticker in a Portland office, 1973.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경제 지표는 좋지 않았다.
생산은 줄고, 물가는 올랐다.
임금 협상은 거칠어졌고, 이자율은 불안정했다.
‘스태그플레이션(어원: stagnation+inflation 합성)’이라는 새 단어가 뉴스에 등장했다.
기업은 에너지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려 했고, 소비자는 장바구니에서 비필수 품목을 뺐다.
하지만 미드포인트에서는 구조적 대응도 시작됐다.
선진 공업국들은 국제에너지기구(IEA·International Energy Agency)를 만들며 비축·정보 공유·수요관리 규칙을 합의했다.
한 나라의 재고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었다.
미국은 에너지정책보존법을 제정해 전략비축유(SPR·Strategic Petroleum Reserve)를 법제화하고, 자동차 평균연비 기준(CAFE·Corporate Average Fuel Economy)을 도입했다.
영국의 북해 유전과 알래스카 송유관 같은 새로운 공급선도 차례로 가동됐다.
공급 다변화와 효율 향상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압박은 산업 현장에서 더욱 선명했다.
에너지 집약 공정은 가동 시간을 줄였고, 납품 기한은 길어졌다.
항공사들은 노선을 조정했고, 해운 운임은 들쭉날쭉했다.
도시의 밤은 더 어두워졌고, 광고판의 조명은 꺼지는 일이 잦아졌다.
정책회의의 문장들은 점점 짧아졌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순서를 바꾸고, 불필요를 삭제하는 식의 문장들이었다.
김정우는 영혼의 밤을 지나 결단을 적었다.
공장 창고의 단열을 보강하고, 증기 보일러의 열 회수를 늘리며, 부품 운송 경로를 재설계하는 계획이었다.
출퇴근은 카풀로 바꾸고, 사무실 난방은 한 겹 더 입는 것으로 보완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합치면 숫자가 됐다.
그의 팀은 ‘이번 겨울’이라는 데드라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했다.
피날레는 조용하게 찾아왔다.
오아펙의 금수는 풀렸지만, 가격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약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기업은 에너지 효율 투자를 계속했다.
국제 협력의 틀은 다음 위기를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됐다.
1979년 두 번째 오일 쇼크가 오자, 이미 만들어 둔 제도와 비축이 바로 가동됐다.
이 사건이 남긴 영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생활 습관의 변화다.
집은 단열이 강화되고, 도시에는 대중교통과 자전거 도로가 늘었고, 주행 속도와 차량 크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둘째, 산업 구조의 조정이다.
에너지 효율 높은 설비와 공정이 표준이 되었고, 내구재의 설계는 무게와 공기저항을 줄이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셋째, 제도와 협력의 상설화다.
국가 비축, 연비 기준, 전력 수요관리, 국제 정보 공유가 패키지로 묶여 상시 체계가 되었다.
이 경험은 ‘값싼 에너지’라는 전제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위기 때는 개인의 절약, 기업의 효율, 정부의 비축과 규제가 함께 움직여야 효과가 난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김정우의 가정과 샌드라의 주유소, 마리아의 일요일 거리, 사토 마사코의 장바구니, 아흐메드의 제빵대 위에 그 교훈이 동시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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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유소 앞에서 홀짝제 도입을 알리는 신문과 ‘휘발유 없음’ 표지. 출처·라이선스: NARA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오늘의 독자에게 남기는 핵심은 어렵지 않다.
석유는 가격표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시간표와 연결되어 있다.
가격이 오르면 바로 줄이 길어지고, 시간이 늘어나며, 계획이 바뀐다.
그래서 에너지 위기의 해법은 ‘돈’만으로 풀 수 없다.
절약과 효율, 대체와 비축, 정보 공유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1973년의 겨울은 그 단순한 사실을 전 세계가 동시에 배운 계절이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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