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7월 초, 뉴저지 해안의 리조트들은 더위를 피한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당시 동북부에 소아마비 유행 소식이 돌았고, 사람들은 “바닷바람이 낫다”고 믿었다(전승).
해변 수영은 새로 자리 잡은 여름 놀이였고, 경계 표지와 구조 체계는 지금보다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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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치헤이븐 잉글사이드 호텔 외관 / Engleside Hotel, Beach Haven (historic view)” Wikimedia Commons, CC BY 2.0. 위키미디어 공용 |
7월 1일 저녁 무렵, 비치헤이븐(Beach Haven, 롱비치아일랜드 남단 리조트).
찰스 엡팅 밴샌트(Charles E. Vansant, 필라델피아 관광객)가 해가 지기 전 얕은 물로 들어갔다.
모래턱을 넘어 20미터 남짓 나가서 가볍게 헤엄쳤다.
개가 물가에서 그를 따라 들어오자 주변에서는 웃음이 났다.
밴샌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팔짓은 점점 거칠어졌다.
구조원 알렉산더 오트(Alexander Ott, 해변 구조원)와 셰리던 테일러(호텔 투숙객)가 노를 밀며 접근했다.
오트가 겨드랑이를 받쳐 끌어 올리는 순간, 어두운 형체가 모래턱 가까이까지 붙었다가 돌아섰다.
사람들이 줄지어 부축했고, 호텔 로비 옆 탁자에서 응급 처치가 이어졌다.
그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시청과 상인들은 해변을 당장 닫지 않았다.
“큰 물고기의 실수”라는 의견이 회의 자리에서 나왔다고 한다(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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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프링레이크 해변 전경 / Spring Lake Beach, New Jersey shorelin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다섯 날 뒤, 7월 6일 오후, 스프링 레이크(Spring Lake, 중부 해안 리조트).
찰스 브루더(Charles Bruder, 스위스 출신 호텔 벨보이)가 표지선 바깥으로 멀리 나갔다.
해변의 여성 한 명이 “빨간색 배가 뒤집혔다”고 외쳤다.
구조원 크리스 앤더슨과 조지 화이트가 보트를 저어 현장에 도착했다.
바다엔 배가 없었고, 붉게 번지는 물자국과 사람 하나뿐이었다.
브루더는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로 끌어올려졌지만 사망했다.
그날 저녁부터 감시탑에 쌍안경과 호루라기가 추가되었고, 수영 가능 구역이 바깥에서 더 안쪽으로 좁혀졌다.
그러나 호텔 예약은 대부분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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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 마타완 크리크 상어 사건 추모 동판 / Matawan Creek 1916 Shark Attack Memorial Plaque”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7월 12일 오전, 마타완 크리크(Matawan Creek, 라리턴만으로 트인 조수 하구) 입구.
토머스 코트렐(Thomas Cottrell, 선장·지역 주민)이 수로에서 상어를 봤다고 마을에 알렸다.
“강에 상어가 올 리가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같은 날 오후 2시 무렵, 와이코프 선창(Wyckoff Dock) 아래에서 아이들이 수영을 했다.
레스터 스틸웰(Lester Stillwell, 11세)이 물속으로 급히 사라졌고, 등지느러미처럼 보이는 것이 짧게 올라왔다는 말이 돌았다(전승).
어른들이 몰려들었고, 스탠리 피셔(Stanley Fisher, 24세, 가게 점원)가 허리끈을 묶고 바로 물로 뛰어들었다.
시야는 나빴고 바닥은 미끄러웠다.
피셔는 바닥 근처에서 소년의 다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때 강한 당김이 뒤에서 왔고, 피셔의 허벅지에서 피가 솟았다.
사람들이 노와 갈고리로 원을 만들고 그를 끌어냈다.
피셔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5시 30분에 사망했다.
소년의 시신은 이틀 뒤 상류에서 발견되었다.
같은 날 30분 뒤, 상류 반 마일에서 조지프 던(Joseph Dunn, 뉴욕 소년)이 다리를 물렸지만 형과 친구가 끌어내어 살아남았다.
마을은 강에도 경계줄과 감시 인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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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슐라이서와 포획된 백상아리(1916) / Michael Schleisser with captured great white (1916)” Bronx Home News 스캔, Public Domain(미국). 위키미디어 공용 |
사흘 뒤, 7월 14일, 라리턴만(Raritan Bay) 일대에 현상금과 수색선이 집중되었다.
박제사 마이클 슐라이서(Michael Schleisser, 어획·전시 흥행업 종사)가 7피트대 상어를 낚시로 걸었다.
보트가 기울 정도로 버텼고, 그는 노를 부러뜨려 내려치며 제압했다.
해안에서 곧장 위장을 열자 살점과 뼈가 나왔다.
젊은 백상아리로 판정되었고, 잔해는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는 보고가 남았다(논쟁).
그 주 이후 뉴저지 연안의 공격 보고는 끊겼다.
한편 황소상어가 하구까지 올라와 공격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는 해석도 지금까지 이어진다(논쟁).
종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실은 공격이 멈췄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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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 뉴저지 상어 공격 지도 / Map of the 1916 New Jersey shark attacks”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CC BY 2.5. 위키미디어 공용 |
도시와 주민의 행동은 곧바로 바뀌었다.
해변은 감시탑·쌍안경·호루라기·경계줄·순찰 보트를 표준 장비로 삼았다.
강과 하구에도 그물과 경계 표지가 설치되었다(전승).
일부 해변은 수일 간격으로 임시 폐쇄와 재개장을 반복했다.
지방 정부는 예산을 늘렸고, 구조원 배치표를 시간대별로 세분화했다.
신문은 상어 관련 정보를 반복 보도했고, 관광업계는 광고와 안전 공지를 함께 내보냈다.
가정의 규칙도 바뀌었다.
부모는 아이가 표지선 안쪽에 있는지, 수심이 얼마인지 직접 확인했다.
수영 전후 샤워, 상처 소독, 단체 수영 시 간격 유지 같은 생활 지침이 안내판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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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07-15 신문 1면—뉴저지 상어 공포 / Jul 15, 1916 front page on NJ shark terror”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미국). 위키미디어 공용 |
사람들의 기억 속 장면들도 명확해졌다.
해변에서 구조원이 보트를 밀던 소리.
선창에서 소년들이 “올라와!”라고 동시에 외치던 순간.
피셔가 망설임 없이 물로 들어가던 발걸음.
상류에서 돌아온 던을 부둣가 사람들이 잡아끌던 손.
이 장면들은 기사보다 빠르게 지역에 퍼졌다.
마타완 크리크의 사건은 “강에도 상어가 올 수 있다”는 상식을 처음으로 널리 각인시켰다.
현장의 조건도 많은 것을 설명한다.
비치헤이븐과 스프링 레이크는 여름철 방문객이 많은 개방해변이었다.
표지선 바깥은 흐름이 빠르고, 그늘이 없으면 수면 반사가 커져 위험 발견이 늦었다.
마타완 크리크는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으로, 조수 때 염분과 작은 먹잇감이 함께 들어왔다.
시야가 탁하고 바닥이 미끄러운 날은 사람과 동물이 서로를 늦게 알아챘다.
이 조합이 12일 동안 연쇄 사건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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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 상어 공포 풍자 만평 / 1916 editorial cartoon on shark panic”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미국). 위키미디어 공용 |
인물도 함께 남는다.
밴샌트와 브루더, 스틸웰과 피셔, 그리고 살아남은 던.
해변에서 신호를 올리고 노를 젓던 구조원들.
경보를 울리고 그물을 당기던 주민들.
사건은 개인의 비극이었고,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대응 훈련이었다.
그 대응이 이후의 표준이 되었다.
사건 뒤의 변화는 오늘까지 이어진다.
많은 해변 도시가 상어 감시를 일일 보고에 포함시켰다.
강·하구·포구는 바다와 다른 지침으로 관리된다.
경보·구조·폐쇄·재개장 절차가 문서화되고, 여름철 인력 충원이 정례화되었다.
학교와 지역 프로그램에서 해양 안전 교육이 늘었다.
바다는 여전히 여름의 무대지만, 이제 사람들은 한 번 더 표지판을 확인하고 들어간다.
핵심을 다시 정리한다.
첫째, 12일 동안 해변 두 곳과 하구에서 연쇄 공격이 일어났다.
둘째, 라리턴만에서 포획된 상어의 위장에서 인간 잔해로 보이는 것이 나왔으나 종 단정은 (논쟁)으로 남아 있다.
셋째, 사건 직후 안전 장비·인력·행정 절차가 빠르게 강화되었고, 오늘의 해변 문화와 규정의 기반이 되었다.
넷째, 이 기록은 괴담이 아니라 다음 사고를 줄이기 위한 실제 절차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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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타완 브리지 상어 벽화 / Shark mural under Route 36 bridge, Matawan”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지금도 현장에는 흔적이 있다.
비치헤이븐의 옛 호텔 자리, 스프링 레이크의 감시탑, 마타완 크리크의 추모판.
사람들은 산책길에서 이름과 날짜를 읽는다.
여름이 오면 감시탑의 쌍안경이 먼저 점검된다.
표지선 안쪽인지 한 번 더 확인하고 들어간다.
역사는 이렇게 생활 규칙으로 남는다.
이 글은 [기본 사료·논문·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In July 1916, New Jersey’s shore saw four fatal/near-fatal shark attacks in 12 days: Charles Vansant at Beach Haven (July 1), Charles Bruder at Spring Lake (July 6), Lester Stillwell in Matawan Creek and rescuer Stanley Fisher (July 12), with Joseph Dunn surviving upstream.
On July 14, Michael Schleisser caught a shark with human remains (contested; great white vs bull shark).
The panic reshaped beach safety: lifeguards, flags, nets, closures, patrols, signs, and formal dr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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