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당대 보도)·시 기록물·연구서』 등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캘리포니아)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섰다.
그는 조슈아 아브라함 노턴(Joshua Abraham Norton, 영국 출생·남아공 성장·미국 이민 상인)이었다.
1859년 가을, 그는 스스로를
“미합중국의 황제 노턴 1세(Emperor Norton I of the United States)”라고 선포했다.
장소는 신문사 사무실 문턱이었고 방식은 놀랄 만큼 간단했다.
![]() |
| 황제 노턴 I 초상(Emperor Norton I portrait), 1870년대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 |
“나는 황제다.”
그의 선언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도장 하나 없이, 말과 종이로만 실행되었다.
도시는 크게 웃었고, 곧 따뜻하게 맞았다.
웃음은 조롱에서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왜 여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샌프란시스코로 오기 전의 시간을 잠깐 되짚어야 한다.
노턴은 런던(London)에서 태어났고(논쟁),
어린 시절을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남아공)에서 보냈다.
골드러시의 광풍이 불던 1849년 무렵,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곧잘 돈을 벌었다.
그는 부동산과 무역을 하며 유능한 상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모든 것이 바뀐 건 ‘쌀’ 때문이었다.
1850년대 초, 그는 쌀 가격 급등기에 대량 매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예측과 달리 추가 선적이 항구에 들어오며 가격이 급락했다.
그는 계약 취소를 요구했고 소송이 시작되었다.
법원 판단은 그에게 불리하게 기울었다.
노턴은 재산을 잃었고 신용을 잃었다.
1858년경 그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그의 이름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았다.
그의 다음 선택은 대부분의 상인이 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는 권력을 샀거나 빼앗지 않았다.
그는 ‘역할’을 발명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도시를 초대했다.
| 황제 노턴 포고문(Emperor Norton proclamation), Wells Fargo History Museum Wikimedia Commons, CC BY-SA 3.0(다중 라이선스). 위키미디어 커먼스 |
1859년 9월경, 그는 신문사(The San Francisco Bulletin)에 황제 선포문을 보냈다.
도시는 그 문서를 장난거리로 읽었고, 곧 매일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기다렸다.
신문은 그의 칙령을 때때로 지면에 실었다.
독자들은 그를 ‘우리 동네 황제’라고 불렀다.
그는 곧 제복을 갖추었다.
군용 재고(전승)로 보이는 푸른 제복에 견장을 달고, 낡은 비버 모자에 장식을 꽂았다.
황제의 지팡이는 의식용이었고, 검은 외투는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를 버티기에 충분했다.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권력자가 아니라 퍼포머에 가까웠다.
![]() |
| 마켓 스트리트 풍경(Scene down Market Street), 1865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1912년 간행물 수록 이미지). 위키미디어 커먼스 |
그러나 거리에서 그는 ‘진짜’였다.
그는 매일 순찰을 돌았다.
보도블록이 파인 곳을 지적했고, 간판이 흔들리는 가게를 들어가 주의를 주었다.
“정돈하십시오. 황제가 지나다닙니다.”
사람들은 웃었고, 그 웃음 뒤에는 약속이 있었다.
가게 주인은 못을 더 박았고, 아이들은 길가의 돌을 치웠다.
황제의 권한은 법에서 오지 않았지만, 그의 효력은 생활에서 나왔다.
도시는 ‘재미있게’ 더 나아졌다.
그는 칙령도 꾸준히 발표했다.
미 연방 의회를 해산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정당을 폐지하라는 요구도 있었다.
그는 ‘프리스코(Frisco, 도시 축약명)(어원)’라는 단어 사용에 벌금을 매기기도 했다(전승).
뻔뻔할 정도로 과장된 명령들이었지만, 작은 규칙이 되어 거리에 농담처럼 흐렸다.
![]() |
| 노턴 1세 발행 10달러 스크립(Emperor Norton $10 scrip), 19세기 후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스 |
그는 돈도 발행했다.
황제 채권(Imperial Bond, 스크립·가맹권 성격)(어원)이라 부르는 종이들이었다.
가게 몇 곳은 그 종이를 ‘농담 반·홍보 반’으로 받았다.
영수증 옆에 “황제를 응원합니다”라는 문구가 찍혔다(전승).
극장들은 그에게 좋은 좌석을 내어주었다.
식당들은 식사를 대접했고, 몇몇 페리 회사는 무임승차를 허용했다(전승).
그의 존재는 도시 자체의 브랜드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그를 통해 자신들의 유머와 관용을 증명했다.
물론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한 경찰관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보고 연행했다.
도시 언론과 시민들이 반발했다.
경찰 수뇌부는 사과했고, 황제는 석방되었다.
그날 이후 경찰은 그를 예우했다.
거리에서 그를 만나면 경례를 붙였다(전승).
황제는 그 예우를 검소하게 받았다.
그는 모자를 벗고 짧게 답례했다.
황제의 칙령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Oakland, 베이 동쪽 도시)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라는 명령이었다.
또 하나는 만(灣)을 가로지르는 터널을 뚫으라는 제안이었다.
당시에는 우스갯소리였지만,
훗날 베이 브리지(Bay Bridge)와 트랜스베이 튜브(도시철도 터널)가 들어섰다.
![]() |
|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 제안 스케치(Proposed Bay Bridge sketch), 1913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미국 내). 위키미디어 커먼스 |
사람들은 뒤늦게 그 연결을 이야기했다.
“황제가 미리 봤다.”라는 식의 칭찬이 붙었다(전승).
실제로 그는 도시의 불편을 누구보다 잘 걸어서 체감한 사람이었다.
걸어 본 사람이 길을 제안할 수 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구간을 걸었다.
상점가에서 바가지 요금이 오르내리면 한마디를 던졌다.
“백성의 생활을 괴롭히지 마시오.”
상인은 웃었고, 가격표는 때로 조정되었다(전승).
그는 아이들의 편이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다 경찰 호각에 쫓기면 중간에 나섰다.
“훈계는 하되, 공은 돌려주시오.”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고, 부탁이 오히려 더 잘 먹혔다.
그에게도 일상은 있었다.
그는 하숙방에 살았고, 소유한 것은 많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모자의 각도를 다듬고, 버튼의 실밥을 정리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자신을 준비했다.
그의 식사는 검소했다.
가끔은 지인이 밥값을 미리 내주었고, 가끔은 가게가 무료로 대접했다.
그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영수증 뒤에 “황제의 이름으로 감사”라고 적었다(전승).
황제에게 ‘신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술집 주인, 신문 기자, 경찰관, 극장 지배인, 노점상들이 돌아가며 신하 역할을 했다.
그들은 황제의 장난을 키웠고, 동시에 도시의 전설을 쌓았다.
전설은 공동저작물이었다.
노턴의 출생 연도와 초기 생애 세부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논쟁).
그러나 그가 유대계 가정 출신이었다는 점, 남아공에서 상업 감각을 길렀다는 점,
샌프란시스코에서 성공했다가 쌀 사건으로 무너졌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실패 뒤 황제가 된 선택은, 그의 인생을 비극에서 ‘희극’으로 구했다.
그리고 도시는 그 희극을 매일 소비했다.
| 노턴이 쓰러졌던 북비치/차이나타운 경계 공간의 상징적 랜드마크. 올드 세인트 메리스 대성당(Old St. Mary’s Cathedral), 샌프란시스코 Wikimedia Commons, CC0(퍼블릭 도메인 기증). 위키미디어 커먼스 |
도시의 애정은 그의 ‘장례’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1880년 어느 겨울밤, 그는 길 위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소식이 퍼지자 수많은 시민이 조문 행렬에 섰다.
“만 명이 넘었다”는 회고가 전해진다(전승).
그의 유산은 많지 않았다.
낡은 제복과 모자, 지팡이, 칙령 문서들, 그리고 소액의 채권 수첩뿐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그에게 마련해 준 장례는 화려했다.
‘우리의 황제’에게 마지막 예우를 바치는 의식이었다.
![]() |
| 황제 노턴의 묘(Emperor Norton’s grave), Colma, Californi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위키미디어 커먼스 |
그의 무덤은 훗날 콜마(Colma,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비석에는 “Norton I, Emperor of the United States and Protector of Mexico(미합중국 황제, 멕시코의 보호자)”라 새겨졌다.
‘보호자’라는 호칭은 그가 어느 시기에 덧붙인 칭호였다(전승).
사람들은 그 문장을 읽고 미소 지었다.
노턴의 이름은 이후 여러 문화 속에서 되살아났다.
신문 칼럼은 그를 도시 유머의 상징으로 불렀다.
소설과 만화, 연극은 그를 조금씩 다른 옷으로 입혔다.
현대의 작가들은 그를 ‘자존감 높은 시민’으로도, ‘천진한 거리의 왕’으로도 묘사했다.
그는 ‘제도 밖의 권력’을 연기한 사람이었다.
그의 명령은 법적 효력이 없었으나, 그의 영향은 생활에서 작동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어준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늘 먼저 걸었고, 늘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질서를 지키시오.”
“약자를 괴롭히지 마시오.”
“도시를 깨끗이 하시오.”
그의 메시지는 통치가 아니라 매너에 가까웠다.
도시는 그의 메시지를 즐거움으로 배웠다.
웃다가 배우면 오래 남는다.
황제의 통치는 유머를 매개로 한 시민성 교육이었다.
그 교육은 강제 대신 참여로 이뤄졌다.
그가 발행한 황제 화폐와 채권은 수집가들의 손에서 오래 살아남았다.
종이의 인쇄 흔들림, 엉성한 서명, 우스꽝스러운 문장들이 사랑스럽게 보존되었다.
그 종이는 당시 가게의 벽에 ‘받습니다’ 표지와 함께 걸려 있었다고 한다(전승).
홍보와 놀이가 경제 행위와 섞이는 순간이었다.
한편, 그를 ‘사업 실패자가 만든 자위극’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 해도 결과는 도시의 품격을 높였다.
도시는 약자를 조롱하는 대신, 역할을 맡겨 즐겼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여유와 관용이 증명되었다.
![]() |
| 노턴과 버머·라자루스(Emperor Norton with Bummer & Lazarus), 1860년대 풍자화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구작). 위키미디어 커먼스 |
노턴과 연관된 길거리의 친구들로 ‘범머(Bummer, 떠돌이개)(어원)’와
‘래저러스(Lazarus, 떠돌이개)’가 자주 등장한다.
두 마리 개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길의 주민’이었다.
노턴이 그들을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으나, 확실한 동행 기록은 엇갈린다(전승).
어쨌든 사람들은 세 존재를 함께 묶어 도시의 우스개와 동정심을 설명했다.
그의 ‘반(反)정당’ 칙령은 신문 오락면의 단골 소재였다.
그는 정치 싸움을 지겨워했다.
정당 싸움 대신 시민의 편의를 챙기라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단순했기 때문에 더 멀리 갔다.
그는 종종 실존적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려 했다.
가난한 이가 길에서 시비를 당하면 중재했고, 폭우 뒤 침수 골목을 돌아다니며 위험을 알렸다(전승).
누구도 그를 시키지 않았고, 누구도 그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
그는 ‘역할’로 먹고 살았다.
극장들은 그의 방문을 홍보했다.
포스터 맨 아래에 “황제 전용석 예약 완료” 같은 문구가 붙었다(전승).
관객은 황제를 구경하고, 황제는 관객을 구경했다.
구경은 도시의 합의였다.
그는 세금 문제에서도 ‘황제다운’ 태도를 보였다.
납부 통지서가 오면 “이미 황제 세금으로 면제”라고 적어 돌려보냈다고 한다(전승).
시청은 그 편지를 모아두고 잠시 웃은 다음, 실제 징수는 건너뛰었다는 전언도 있다(전승).
행정의 유머 감각이 도시의 품격을 보완했다.
노턴은 도시의 ‘여론’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현장에 항상 있었고, 사람들 속에서 말을 골랐다.
그의 칙령은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작은 편의에서 나왔다.
버스 정류장의 위치, 보도의 파임, 다리의 필요.
베이 브리지와 트랜스베이 튜브의 아이디어는 그에게 ‘창밖의 문제’였다.
물길이 도시를 가르고, 배가 날씨에 묶이고, 사람이 발이 묶이는 문제.
그는 ‘건너가자’고 말했다.
도시는 한 세대 뒤에 그 말을 실행했다.
그의 죽음은 도시의 하나의 챕터를 닫았다.
그러나 장은 끝나지 않았다.
도시는 때때로 다리 위에 그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다(전승).
어떤 해에는 표지판이 세워지기도 했다(전승).
노턴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를 “샌프란시스코가 스스로에게 준 농담”으로 보는 것이다.
그 농담은 사람을 비하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을 조금씩 좋게 만들었다.
그게 좋은 농담의 조건이다.
그를 ‘가짜 황제’라고 부르는 건 사실이지만, ‘가짜’가 모두 나쁜 건 아니다.
도시는 그 가짜를 매일 찾아 웃고, 조금 더 친절해졌다.
그 웃음이 쌓여 도시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노턴은 샌프란시스코 브랜드의 공동 창업자였다.
![]() |
| 샌프란시스코 듀폰트 스트리트 풍경(Dupont Street, San Francisco), 1862, 카를턴 왓킨스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스 |
그의 하루 루틴을 따라가 보면, 영웅서사가 아니라 생활기록이 보인다.
아침에 하숙방을 나와 마켓 스트리트(Market Street)를 걷고,
그랜트 애비뉴(Grant Avenue, 당시 듀퐁 스트리트) 언저리에서 인사하고, 극장가를 훑었다.
점심은 가벼웠고, 저녁은 초대를 받으면 가고 아니면 건너뛰었다.
밤에는 하숙집에 돌아와 모자의 먼지를 털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종이 몇 장이 있었다.
새 칙령의 초안,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보낼 바통카드, 그리고 채권 영수증.
그는 펜을 오래 들고 있지 않았다.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도시는 그를 시끄럽게 기억하지 않았다.
그를 크게 떠들어 칭송하지도, 악담하지도 않았다.
그는 도심의 조용한 풍경이었고, 그 조용함이 오래 남았다.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며, “그땐 우리가 조금 더 웃었지”라고 말한다.
그의 삶에서 과장되거나 꾸며진 디테일도 많다.
예컨대 ‘황실 도장’이나 ‘외국 사절 접견’ 같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전승의 층을 거쳤다(전승).
그럼에도 핵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걷는 황제였고, 걷는 통치로 도시를 조금 낫게 만들었다.
그의 번듯한 직함 가운데 ‘멕시코의 보호자(Protector of Mexico)’가 있다.
그 표현은 당시 멕시코 정세와 미국 내부 정치에 대한 그의 풍자였다.
그는 보호를 약속했지만, 실은 누구도 보호하지 않았다.
풍자는 약속을 흉내 내어 약속의 허점을 드러낸다.
노턴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것은 간단하다.
권위는 강요보다 합의에서 오래간다.
합의는 재미와 편의에서 시작된다.
그는 재미와 편의를 매일 제공했다.
그래서 그의 ‘통치’는 널리 사랑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보러 나왔고, 그와 인사했고, 그가 남긴 말에 귀 기울였다.
그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제안은 듣기 쉽고, 실행하기 쉽다.
그가 떠난 뒤,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역할’을 발명하는 도시로 남았다.
예술가와 기업가, 노점상과 거리 공연자들이 각자의 왕국을 열었다.
도시는 그들에게 가벼운 왕관을 씌워 주었다.
그 왕관의 원조가 노턴이었다.
![]() |
| 노턴 기념 플라크(Emperor Norton Bay Bridge plaque), Transbay Terminal Wikimedia Commons, CC0. 위키미디어 커먼스 |
한 세기 넘게 지나도 ‘황제 노턴’이라는 이름은 가끔 기사 제목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그의 화폐를 경매에 내놓고, 누군가는 그의 칙령을 재현한다.
학생들은 그의 사연으로 도시사 과제를 만들고, 관광객은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그 발자국은 베이 바람과 함께 여전히 샌프란시스코를 돈다.
이야기를 마치며, 그의 하루를 다시 한 번 요약한다.
걷는다.
본다.
말한다.
그 다음은 도시의 몫이다.
웃는다.
조금 고친다.
그리고 내일도 웃는다.
그 과정에서 황제는 필요 없지만, 노턴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대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사람이다.
도시는 그런 사람을 잃으면 딱딱해진다.
샌프란시스코가 그를 잊지 않는 이유다.
그가 실제로 했던 일 가운데, 오늘 우리가 당장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걷고, 본 것을 기록하고, 지나치지 않는 것.
작은 불편을 누군가에게 알려 주고, 가능하면 바로잡는 것.
그게 시민의 왕도다.
그의 칙령은 종이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방식은 거리에서 남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길 위에서 서로의 왕이 된다.
권력의 자리는 비어 있지만, 역할의 자리는 늘 있다.
그 자리에 먼저 앉은 사람이 도시를 바꾼다.
노턴은 먼저 앉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따라 앉을 수 있도록 자리의 높이를 낮췄다.
그건 참 잘한 통치였다.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Joshua Abraham Norton, a failed 1850s San Francisco merchant,
reemerged in 1859 by proclaiming himself Emperor Norton I.
In a blue uniform he issued tongue-in-cheek “decrees”—from abolishing parties to urging a bridge to Oakland—patrolled the streets,
and paid with “imperial” scrip some shops honored.
Police came to salute him; theaters comped seats.
When he died in 1880, thousands mourned. His legend shows a city turning empathy and wit into everyday civic glue.
.jpg)

,%201870%EB%85%84%EB%8C%80.jpg)

.jpg)


.jpg)
,%201862.jpg)
.jpe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