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왕조실록』과 민간 설화에 기록된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소설적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역사서가 아니라,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아침의 장터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커다란 솥에서 고기가 끓는 냄새가 골목길을 따라 번져갔다.
지친 농부는 그 냄새에 발길을 멈췄고, 상인은 잠시 짐을 내려놓았다.
그 국물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조선의 백성과 왕까지 함께 나누던 국, 바로 설렁탕이었다.
설렁탕의 시작은 세조 혹은 성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해진다.
특히 가장 많이 전해지는 이야기는 성종(조선 제9대 임금) 때였다.
성종은 백성들의 삶을 자주 살폈다.
그는 어느 날, 종묘제례(조상을 기리는 제사)가 끝난 뒤 남은 고기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제사 후엔 늘 산더미 같은 소고기가 남았고, 이것을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이 고기를 백성들과 나누어 먹게 하라.”
성종의 한마디에 궁궐의 솥이 움직였다.
궁궐 밖 마당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렸다.
뼈와 고기를 한데 넣고 오래도록 푹 고아냈다.
그 국물은 하얗게 우러나와 진하고 고소했다.
백성들은 줄을 서서 그릇을 내밀었고, 임금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 사람들은 처음으로 “선농단에서 끓인 국”을 맛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설렁탕의 이름이 ‘선농탕(先農湯)’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백성을 위해 농사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 그 고기를 나누어 끓인 탕.
그것이 설렁탕이었다.
다른 이야기 하나는 더 소박하다.
농민들이 소를 키우고, 힘을 다해 논밭을 갈던 시절.
소가 귀했던 시대, 한 마리 잡으면 버릴 곳이 없었다.
고기는 물론 뼈까지 모조리 솥에 넣어 고아냈다.
허기진 사람들은 그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며 “이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맛”이라 했다.
백성들의 입속에서 시작된 국물이, 훗날 왕의 손길까지 닿으며 이름 있는 음식이 된 것이다.
서울 장터의 겨울.
상인들은 손을 호호 불며 국밥집 앞에 모여 있었다.
“여보게, 오늘도 그 하얀 국물 한 그릇 주게.”
사발에 담긴 국물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추위를 녹였다.
밥을 말아 후루룩 들이키면 속이 뜨끈해졌다.
설렁탕은 그렇게 서민의 국밥이 되었다.
뼈가 우러난 국물 속에는 고단한 삶을 견디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설렁탕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왕이 제사를 마친 뒤 백성들과 나눈 음식, 그리고 시장에서 누구나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음식.
계급을 넘어, 모두가 같은 그릇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여 국물을 들이켰다.
하얀 국물 속에 녹아든 건 단순한 뼈와 고기가 아니라,
배고픔을 달래고, 신분을 넘어 함께 나눈 조선 사람들의 삶이었다.
오늘날, 서울 어느 골목을 가도 설렁탕집을 만날 수 있다.
사골을 하얗게 우려낸 깊은 국물.
파 송송, 소금 살짝.
옛날처럼 밥을 말아 한 숟가락 뜨면,
백 년 전 장터와 선농단의 풍경이 입안에 번진다.
설렁탕은 그렇게 여전히 우리의 밥상 위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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