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 양심과 법 사이를 걸었던 '모든 계절의 사람'
1. '모든 계절의 사람' 토마스 모어와의 만남
16세기 런던,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템스강 변의 법정과 스치는 비단 옷 소리가 요란한 화려한 궁정, 그리고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고요한 수도원의 침묵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입니다.
그는 당대 동료 학자였던 로버트 휘팅턴(Robert Whittington, 16세기 영국의 문법학자)으로부터 '모든 계절의 사람(A Man for All Seasons)'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는 모어가 비단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같은 평화로운 시절뿐만 아니라, 거친 풍랑과 몰아치는 한파 같은 겨울의 시련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결함과 지혜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어의 절친한 벗이자 당시 유럽 최고의 지성이었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르네상스 대표 인문학자)는 그를 이렇게 묘사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이토록 친절하고 감미로우며 조화로운 성격을 만들어낸 적이 있는가? 그는 천사의 지혜와 독보적인 학식을 갖춘 사람이며, 때로는 놀라운 즐거움을, 때로는 진지한 엄숙함을 보여주는 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왜 500년 전의 인물인 토마스 모어를 다시 공부하고 그의 삶을 추적해야 할까요?
그는 법률가로서 세속적인 성공의 최정점에 올랐고, 대법관(Lord Chancellor, 영국 최고 사법·행정 관직)으로서 국가의 정의를 세웠으며, 인문주의자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지성을 뽐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이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진짜 이유는 그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했던 '선택'의 순간 때문입니다.
권력자가 내미는 달콤한 회유와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라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작은 목소리, 즉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평생 일궈온 모든 관직과 재산, 심지어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던졌습니다.
이 글은 독자 여러분을 16세기 르네상스 전환기 런던의 생생한 현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어와 함께 법정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고, 첼시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그가 자녀들과 나누는 따뜻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축축하고 차가운 런던탑 감옥의 벽을 어루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양심은 단순히 나의 고집인가, 아니면 진리를 향한 성실한 탐구의 결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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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모어 초상화 |
2. 지혜의 뿌리: 법률가 가문에서의 성장과 인문주의적 도야
토마스 모어가 보여준 탁월함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깊은 지혜는 런던의 유서 깊은 법률가 가문이라는 비옥한 토양과,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교육이라는 따스한 햇살 아래서 단단하게 싹을 틔웠습니다.
런던의 아들과 모턴 추기경의 예언
모어는 1478년 런던 시내의 중심가인 밀크 스트리트(Milk Street)에서 성공한 법률가이자 훗날 왕립 법원의 판사가 된 존 모어(John More)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세인트 앤소니 고등학교에서 기초 학문을 탄탄히 닦은 그는, 12세가 되던 해에 당시 영국의 권력과 지성의 중심지였던 존 모턴(John Morton, 캔터베리 대지목이자 대법관) 추기경의 저택에 시종(Page, 귀족 집안에서 수련하는 소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소년 모어는 귀족들의 식탁에서 시중을 들며 권력의 생리와 상류 사회의 예법을 몸소 익혔습니다.
특히 그는 성탄절 연극 공연이 열릴 때면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올라 대본에도 없는 역할을 즉흥적으로 연기하며 관객들을 배꼽 잡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 임기응변과 재치를 유심히 지켜본 모턴 추기경은 모어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귀족들 앞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지금 식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이 아이는, 머지않아 세상이 놀랄 만큼 경이로운 인물이 될 것이다."
추기경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모어는 1492년 옥스퍼드 대학교(캔터베리 홀)로 진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린아크(Thomas Linacre, 영국의 의사이자 인문학자)와 그로우신(William Grocyn, 영국 그리스어 학자)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 밑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고전 문학을 스폰지처럼 흡수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실용적인 성공을 거두길 바랐던 아버지 존 모어는 아들이 인문학이라는 '배부른 학문'에 빠져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2년 만에 모어를 옥스퍼드에서 불러내어 강제로 법학 공부를 시작하게 했습니다.
모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뉴 인(New Inn)과 링컨 인(Lincoln's Inn, 런던의 법학원)을 거치며 왕실 법률 전문가로서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수도원의 침묵과 고행용 셔츠
법률가로서 승승장구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청년 모어에게는 남모를 영적 고민이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그는 사제직에 깊이 매료되어, 1499년부터 1503년까지 4년 동안 카르투시오 수도회(엄격한 침묵과 기도를 강조하는 가톨릭 수도회) 근처에 머물며 수도자들과 똑같은 절제된 수행 생활을 했습니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7시까지 기도와 학문에 전념했고, 엄격한 단식을 지켰습니다.
치열한 성찰 끝에 모어는 자신이 정막한 수도원보다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평신도의 길'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상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그렇다고 수도 시절의 엄격함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거친 거위 털로 만든 '고행용 셔츠(Hair shirt)'를 속옷 안에 입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제어했습니다.
나라의 최고 관직인 대법관이 되어서도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며 겸손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모어가 세상의 화려한 명예를 누리면서도 영혼의 중심은 항상 하늘을 향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3. 지상의 유토피아: 모어의 가정 교육과 '시민적 철학'
모어는 자신의 가정을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하나의 '작은 아카데미'로 일구었습니다.
그는 런던 근교 첼시(Chelsea)에 위치한 저택을 학문과 예술,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이 넘쳐나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조성했습니다.
딸 마가렛과 시대를 앞선 진보적 교육
16세기 당시 유럽에서 여성에 대한 교육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다수 여성은 글을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어는 남성과 여성의 지적 능력이 본질적으로 대등하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딸들에게 아들과 똑같은 수준의 학문적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 언어의 마스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게 하여 고전 원전을 자유롭게 읽고 해석하도록 교육했습니다.
- 자유 학예 교육: 단순한 문학에 그치지 않고 수사학, 논리학, 수학, 천문학, 철학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교양을 가르쳤습니다.
- 덕성 우선주의: 단순한 지식의 자랑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과 경건함임을 강조하며, 학문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특히 그의 큰딸 마가렛 로퍼(Margaret Roper)는 당대 유럽 최고의 여성 학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지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어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한 정신적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유토피아]와 '시민적 철학'
모어가 1516년에 발표한 불후의 명저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No-place)'이라는 뜻인 동시에 '좋은 곳(Good-place)'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모어는 상아탑 안에 갇혀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철학이 아니라, 실제 세상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시민적 철학(Civilior Philosophy)'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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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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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철학 (Aca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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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철학 (Civil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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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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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 세계에서만 완벽함을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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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속에서도 키를 잡고 배를 운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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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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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추함을 비판하며 멀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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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덜 나쁘게"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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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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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인 정의의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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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인 책임과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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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
모어는 또한 [리처드 3세의 역사]라는 저술을 통해 왕의 독재와 폭정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정치가 군주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권력이 아니라, 시민들의 동의와 엄정한 법의 지배 위에 서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현실에 발을 딛고 정의를 꿈꾸는 실천적 인문주의자였습니다.
4. 정의의 저울: 법률가이자 행정가로서의 탁월한 행보
모어는 런던 부시장을 거쳐 하원의장, 그리고 마침내 1529년 평신도 법률가로서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최고 관직인 대법관(Lord Chancellor)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전까지 대법관직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으나, 모어는 순수한 법률적 능력과 도덕성으로 그 벽을 깨부수었습니다.
형평성(Equity)의 원리와 가난한 이들의 변호사
모어는 딱딱하고 메마른 법 조항 자체에만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법의 문구 뒤에 숨은 법의 정신을 살리는 '형평성(Equity)'의 원리를 판결에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당시 영국 일반법(Common Law)은 너무 가혹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조항이 많아 억울한 피해자를 낳곤 했습니다.
모어는 양심과 정의의 관점에서 사건의 구체적인 사정을 참작하여 가장 공정한 결론을 도출해냈습니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직접 무료 변론에 나섰기에, 민중들은 그를 "가난한 이들의 가장 친절한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악마와 아버지 사이에서의 판결
그의 철저한 공정성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로버트 볼트의 희곡)
사위인 윌리엄 로퍼가 가족으로서 재판에서 약간의 특혜를 기대하며 불평을 늘어놓자, 모어는 사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만약 한쪽에는 나의 아버지가 서고, 다른 쪽에는 악마가 서서 소송을 벌인다 해도, 내 판단의 기준은 오직 법과 정의일 뿐이네. 만약 악마 쪽의 주장이 옳다면 나는 기꺼이 악마의 손을 들어줄 것이네."
그의 행정 능력 또한 전설적이었습니다.
당시 대법관 법원에는 처리되지 않은 소송 사건이 수년째 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사건을 심리하여, 임기 중 모든 소송을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그가 재판정을 나설 때 더 이상 다룰 사건이 남아있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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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홀바인 2세가 그린 토마스 모어 경, 그의 아버지, 그의 가족 및 후손들 |
5. 거대한 충돌: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와 양심의 위기
모어와 국왕 헨리 8세(Henry VIII)는 한때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습니다.
왕은 모어의 지혜와 재치를 사랑하여 밤늦도록 그를 궁정에 불러 대화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친밀했던 관계는 '국왕의 대사건(The Great Matter)', 즉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소송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 헨리 8세의 이혼 요구: 왕은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남계 후계자가 없자, 왕비를 배척하고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 재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황청은 이 혼인 무효 요청을 최종적으로 거부했습니다.
- 수장령(Supremacy Act) 발포: 분노한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1534년 스스로를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포하는 '수장령'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하에게 국왕의 종교적 지위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인정하는 '계승법 선서'를 강요했습니다. 이 선서를 거부하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대역죄(Treason)'로 지정되어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 모어의 결단: 모어는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1500년 동안 이어져 온 보편적 교회의 일치성을 깨뜨리는 이 선서가 자신의 신앙과 법 원칙에 어긋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1532년 대법관직을 조용히 사임하고 세속의 정치판에서 물러나 침묵을 택했습니다.
국왕은 모어의 침묵을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모어는 1534년 반역죄로 기소되어 차가운 런던탑(Tower of London) 감옥에 갇혔습니다.
습하고 어두운 감옥 안에서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애절한 회유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내 앨리스와 딸 마가렛은 감옥을 찾아와 눈물로 선서에 서명하고 목숨을 구하라고 애원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서하더라도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가족들의 통곡 앞에서 모어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덧없는 세속의 몇 년 남은 생명보다, 영원한 진리와 양심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6. 양심의 본질: 단순한 고집이 아닌 '진리를 향한 성실한 탐구'
여기서 우리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모어는 왜 그토록 고집스럽게 타협을 거부하고 죽음을 자초했을까요?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양심(Conscience)'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내 마음대로 생각할 권리'나 단순한 개인의 주관적 고집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형성된 양심 (Formed Conscience)
모어에게 양심이란 감정에 따른 즉흥적인 선호나 이기적인 독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성찰과 공부를 통해 단단하게 일구어진 '형성된 양심'이었습니다.
그는 국왕의 이혼과 수장권 문제가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헨리 8세의 '대사건'이 본격화되던 시기부터 무려 7년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성경, 교부들의 저술, 교회의 역사적 전통, 그리고 유럽 전체의 법적 합의를 치열하게 연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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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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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주관적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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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의 '형성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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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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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익, 감정, 편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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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진리, 보편 교회의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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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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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인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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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이상의 학문적 탐구와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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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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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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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앞에 서는 성실한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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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양심이 결코 혼자만의 독선이 아니음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영국이라는 한 국가의 의회가 제정한 일시적인 법이, 유럽 전체 기독교 세계의 역사적 합의와 하나님의 보편법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정의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모어에게 양심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들여 닦아낸 '영혼의 거울'이었습니다.
7. 마지막 변론: 순교와 유머, 그리고 영원한 승리
1535년 7월 6일, 법정에서 최종 사형 선고를 받은 토마스 모어는 처형장인 타워 힐(Tower Hill)의 단두대로 향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다가온 순간에도 그는 특유의 '소크라테스적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허술하게 만들어져 비틀거리는 사형대 계단을 오르며, 모어는 처형 집행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올라갈 때는 좀 도와주게나. 내려올 때는 내가 알아서 내려올 테니."
단두대 위의 장엄한 선언
사형 집행인이 도끼를 들어 올리자, 모어는 자신의 긴 수염을 단두대 밖으로 젖혀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수염은 왕에게 반역한 적이 없으니 자를 필요가 없다네."
그리고 그는 인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위대한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국왕의 신실한 종으로 죽지만, 그보다 먼저 하느님의 종으로 죽습니다."
(I die the King's good servant, and God's first.)
이 짧은 문장에는 모어 철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국왕에 대한 존경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국가나 왕의 명령보다 더 높은 곳에 인간의 양심과 하나님의 정의가 위치한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비록 그는 지상의 법정에서 대역죄인으로 몰려 머리가 런던 다리에 효수되는 비극을 맞이했으나, 역사의 법정과 양심의 법정에서는 영원한 승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8. 현대인이 토마스 모어에게 배우는 법
토마스 모어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삶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또렷한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모든 계절의 사람'이었던 그에게서 우리는 세 가지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성실한 공부를 통한 양심의 형성: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성급하게 주장하기 전에,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와 보편적인 가치에 부합하는지 치열하게 공부하고 성찰하십시오. 배움과 성찰이 없는 양심은 자칫 위험한 독선이 될 수 있습니다.
- 유머를 통한 내면의 자유: 모어가 죽음의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속의 명예와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작은 손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대범함을 배우십시오.
- 우선순위의 명확한 설정: 조직의 규칙이나 사회적 압박이 나를 짓누를 때, 그보다 앞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진리가 무엇인지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모어는 감옥을 찾아와 눈물 흘리는 딸 마가렛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을 속이며 비겁하게 얻는 20년의 삶보다, 영원한 진리를 택하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선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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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모어가 딸 마거릿 로퍼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 |
때로는 부드러운 친구이자 자상한 아버지로, 때로는 공정한 법률가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고결한 순교자로 살았던 토마스 모어.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품격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원한 교과서입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모어가 자신의 목숨과 바꿔 지켜냈던 단단하고 투명한 양심의 불꽃이 조금이나마 옮겨붙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토머스 모어의 삶과 사상을 최대한 역사적 사실과 사료에 근거하여 충실하게 소개하고자 노력한 글입니다.
다만 500여 년 전의 인물을 다루는 만큼, 당시의 기록과 후대의 전기, 여러 연구 자료에 따라 해석이나 세부적인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역사적 오류나 부정확한 표현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독자 여러분이 토머스 모어의 삶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 장면과 대화에는 서사적·문학적 재구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글 속의 모든 대화와 장면을 당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역사적 사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한 교양 서사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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