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일의 심장, 주세페 가리발디: '두 세계의 영웅'이 걸어온 위대한 연대기
1. 왜 우리는 오늘날 가리발디를 배우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만큼 낭만적이고도 강렬한 서사를 가진 이는 드뭅니다.
그는 단순히 한 나라의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럽과 남미라는 두 개의 거대한 대륙에서 압제에 맞서 싸운 '두 세계의 영웅(Hero of the Two Worlds)'이었으며, 오늘날 이탈리아라는 근대 국가를 탄생시킨 결정적인 주역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가리발디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현대 민주주의와 민족 자결주의의 살아있는 교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공화주의적 신념이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통일'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개인의 명예와 권력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실용적이고 헌신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는 단순한 군복을 넘어, 자유를 갈망하는 전 세계 민중에게 불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Risorgimento)의 4대 핵심 인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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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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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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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평가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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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가리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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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실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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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혁명가이자 게릴라 전술의 천재.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국왕에게 헌납한 '통일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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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마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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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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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탈리아당' 창설자. 공화주의 이념을 전파하여 이탈리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일깨운 '통일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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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카보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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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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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탁월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끌어들여 통일의
현실적 기틀을 닦은 '통일의 두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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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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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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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이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 흩어진
세력을 하나로 묶는 '통일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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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무엇이 평범한 선원의 아들을 전 유럽이 경외하는 영웅으로 만들었을까요?
가리발디의 위대함은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거친 바다와 망명의 길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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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주세페 가리발디 |
2. 출생과 각성: 니스의 바다에서 혁명의 파도로 (1807~1834)
주세페 가리발디는 1807년 7월 4일, 당시 프랑스 제국령이었던 니스(Nic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리구리아 출신으로 대대로 바다를 누비던 선원 집안이었습니다.
가리발디 역시 자연스럽게 10대 시절부터 선원 생활을 시작하며 지중해와 흑해를 누볐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훗날 전술적 유연성과 국제적인 감각을 기르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리발디를 '전쟁의 신'으로만 기억하지만, 그의 청년기에는 지적인 탐구와 국제적 교류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1828년부터 1832년 사이 이스탄불(당시 오스만 제국)에서의 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스탄불에 형성된 사르데냐 망명객 네트워크와 깊이 교류하며, 고국의 비참한 현실과 자유주의적 이념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운명적인 만남은 1833년 러시아의 타간로크(Taganrog) 항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렌지를 운반하던 범선 '클로린다(Clorinda)'호의 항해사였던 그는 그곳에서 지오반니 바티스타 쿠네오라는 정치 망명객을 만납니다.
그를 통해 가리발디는 주세페 마치니가 이끄는 '청년 이탈리아당(Young Italy)'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하나의 자유로운 공화국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뜨거운 사명감에 눈을 떴습니다.
가리발디의 초기 가치관 형성의 3대 핵심 요소
- 바다에서의 세계 시민적 경험: 선원으로서 전 세계 무역로를 누비며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각과 강인한 생존력을 습득했습니다.
- 마치니의 공화주의 이념: 단순한 독립을 넘어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확립했습니다.
- 카르보나리(Carbonari) 비밀결사 활동: 1833년 제노바에서 마치니를 직접 만난 후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실전 혁명 조직의 운영 방식을 익혔습니다.
1834년, 그는 피에몬테에서 마치니 주도의 봉기에 참여했으나 이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가리발디는 제노바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추격대를 피해 마르세유로 탈출한 그는 가명인 '주세페 파네(Giuseppe Pane)'를 사용하며 대서양 너머 남미라는 미지의 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는 사형수 가리발디에게는 시련이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영웅 가리발디'가 탄생하는 거대한 서막이었습니다.
조국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쫓겨난 이 청년은 대서양을 건너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남미의 거친 벌판에서 훗날 이탈리아를 구원할 '게릴라 전술'의 정수를 배우게 됩니다.
3. 남미 망명기: 게릴라 전술의 완성인가, 전설의 시작인가 (1835~1847)
브라질에 도착한 가리발디는 곧바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브라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리오그란덴세 공화국의 '라가무핀 전쟁(Ragamuffin War)'에 참전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인 아니타(Ana Maria de Jesus Ribeiro da Silva)를 만납니다.
아니타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가리발디와 함께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빈 용맹한 전우였습니다.
그녀는 가리발디에게 남미 가우초(Gaucho)의 승마술과 문화, 그리고 판초와 챙 넓은 모자로 대변되는 스타일을 전수했습니다.
1842년, 무대를 우루과이로 옮긴 가리발디는 우루과이 내전에서 독재자 로사스에 맞서 싸웠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탈리아 망명객들을 모아 '이탈리아 군단'을 창설합니다.
이들이 입었던 옷이 바로 그 유명한 '붉은 셔츠(Redshirts)'였습니다.
당시 몬테비데오의 한 공장에서 아르헨티나 도축장으로 수출하려던 붉은 색 원단을 저렴하게 구입해 군복으로 사용한 것이 그 기원이었습니다.
이 붉은 셔츠는 훗날 가리발디 군대의 상징이 되어 적들에게는 공포를, 민중에게는 희망을 주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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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에서 일어난 전투 |
가리발디의 군사적 명성은 우루과이 해군 사령관으로서 거둔 승리들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특히 1842년 코스타 브라바 해전에서 패배 위기에 처했을 때, 적장이었던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 제독은 가리발디를 추격해 사살하려는 부하들을 제지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를 보내주어라, 저 가명(Gringo)은 정말 용감한 사내다!"
훗날 가리발디는 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자신의 손자 이름을 윌리엄이라 지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적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무인(武人)의 존경심을 나누었습니다.
[남미 경험이 이탈리아 통일에 기여한 바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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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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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 및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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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게릴라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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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상대하는 유격전과 상륙 작전의 대가가 됨.
이는 훗날 '1,000인 원정대' 성공의 핵심 자산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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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이미지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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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셔츠'와 '판초'라는 시각적 상징물 확립.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고결한 전사'라는 국제적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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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결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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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망명객들을 하나로 묶어 '이탈리아 군단'을 운영해 본
경험은 훗날 이탈리아 본토에서의 군사 조직화에 밑거름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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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발디는 남미에서 프리메이슨(Freemasonry)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이를 '진보적인 형제들의 네트워크'로 여겼으며, 이는 훗날 그가 가톨릭 교황청의 세속적 권력에 저항하는 강력한 '반교권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4. 1848년 혁명과 로마 공화국: 시련 속에 피어난 영웅주의 (1848~1849)
1848년, 전 유럽을 휩쓴 혁명의 불꽃이 이탈리아에도 번졌습니다.
가리발디는 지체 없이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검을 바치려 했으나, 국왕은 과거의 반역자인 가리발디를 불신하며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밀라노의 임시 정부를 돕기 위해 북부로 향했으나,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가리발디의 영웅적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1849년 선포된 로마 공화국 수호전이었습니다.
교황이 피신한 로마에서 마치니와 함께 공화국을 세운 그는 프랑스 정예군에 맞서 로마를 지켰습니다.
4월 30일, 가리발디는 수적으로 압도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했습니다.
6월, 로마 의회에서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연단에 올라 역사에 남을 퇴각 연설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보수도, 안락함도, 식량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오직 배고픔과 추위, 강행군과 전투, 그리고 죽음만을 약속할 뿐입니다.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나를 따르십시오!"
이 연설에 감동한 수천 명의 지원자가 그를 따라 로마를 떠나 산마리노를 거쳐 베네치아로 향하는 '대퇴각'에 동참했습니다.
이 험난한 여정 중, 임신 중이었던 아내 아니타는 병을 얻어 코마키오 인근의 숲에서 가리발디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맙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동료들을 잃고 조국에서도 설 자리를 잃은 가리발디는 다시 한번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떠나는 두 번째 망명길.
하지만 이 고난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전 세계의 민중은 이 비극적인 영웅의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향한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5. 전 세계를 누비는 방랑자에서 카프레라의 농부로 (1850~1858)
두 번째 망명은 그를 '글로벌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 정착한 가리발디는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의 양초 공장에서 일하며 평범한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화려한 명성을 뒤로하고 묵묵히 땀 흘려 일하는 모습으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그는 페루 시민권을 얻어 선장으로서 태평양을 횡단했습니다.
가리발디의 글로벌 행보와 명성
- 미국 (뉴욕): 민주주의 국제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정신을 목격함.
- 남미 (페루): 선박 '카르멘'호의 선장으로 중국 광둥, 마닐라 등을 항해하며 무역에 종사함.
- 영국 (타인사이드): 1854년 영국 사우스 실즈에 머물 때, 현지 노동자들로부터 '자유의 검'을 선물 받으며 전 유럽적 지지를 확인함.
1854년, 마침내 귀국 허가를 받은 가리발디는 형의 유산과 자신의 저축을 모아 사르데냐 북부의 황무지 섬 카프레라(Caprera)의 절반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직접 돌을 쌓아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카프레라의 사자'로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 시기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사르데냐의 수상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대중적 인기와 군사적 재능이 통일에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고, 그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농부의 삶을 살던 가리발디에게 1859년, 다시 한번 조국의 부름이 들려옵니다.
이제 그는 일개 혁명군이 아닌, 사르데냐 왕국의 공식적인 장군으로서 전장에 복귀하게 됩니다.
6. 1,000인 원정대와 리소르지멘토의 절정 (1859~1861)
1859년 제2차 독립 전쟁에서 '알프스 사냥꾼'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화려하게 복귀한 가리발디는, 1860년 5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대담한 도박인 '1,000인 원정대(i Mille)'를 조직합니다.
오직 1,089명의 자원봉사자와 두 척의 배(피에몬테호, 롬바르도호)만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강대국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러 떠난 것입니다.
[1,000인 원정대의 기적적인 경로]
- 제노바 콰르토 출발 (5월 5일): 빈약한 장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출정.
- 시칠리아 마르살라 상륙 (5월 11일): 영국 해군의 묵인 하에 성공적으로 상륙.
- 칼라타피미 전투 (5월 15일): 압도적 수의 나폴리 정규군을 상대로 지형을 이용한 총검 돌격으로 승리.
- 명언: 후퇴를 권하는 부하에게 가리발디는 "여기서 이탈리아를 만들거나, 아니면 죽자(Qui si fa l'Italia o si muore)!"라고 일갈함.
- 팔레르모 함락 및 나폴리 입성 (9월 7일): 민중의 열렬한 환영 속에 무혈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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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 나폴리 입성 |
가리발디가 나폴리를 장악하자, 북부의 사르데냐 왕국은 당혹감에 휩싸였습니다.
공화주의자인 가리발디가 남부에 공화국을 세울까 두려워한 카보우르는 국왕을 직접 남하시켰습니다.
1860년 10월 26일, 테아노(Teano)에서 가리발디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만났습니다.
여기서 가리발디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공화주의)을 꺾고, 조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자신이 정복한 모든 영토를 국왕에게 헌납했습니다.
그는 국왕을 향해 "이탈리아의 국왕을 환영합니다!"라고 외쳤고, 이는 근대 이탈리아 왕국 탄생의 결정적 순간이 되었습니다.
왕국의 영웅이 된 가리발디.
하지만 그는 모든 훈장과 보상을 거절하고, 한 자루의 씨앗과 마른 생선 한 바구니만을 들고 다시 자신의 섬 카프레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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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아노의 다리에서 가리발디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만남 |
7. 끝나지 않은 투쟁: 로마와 베네치아를 향해 (1862~1871)
통일 이탈리아가 선포되었으나, 로마(교황령)와 베네치아(오스트리아령)는 아직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가리발디는 이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1862년, 그는 "로마가 아니면 죽음을!(Roma o Morte)"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자적인 로마 진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프랑스와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아스프로몬테에서 가리발디의 군대를 저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리발디는 동족의 총에 발을 맞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는 비극을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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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에 맞아 상처 입은 가리발디 |
이후에도 그는 1866년 제3차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베제카 전투에서 승리하며 베네치아 수복의 길을 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후퇴 명령에 그는 단 한 마디, "복종하겠습니다(Obbedisco)"라는 전보를 보내며 군인으로서의 규율과 국가적 통합을 우선시하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가리발디의 반교권주의와 근대 국가 건설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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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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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발디의 주장 및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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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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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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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자유의 종교여야 한다." 교황의 세속적 영토 보유가
이탈리아 통합을 방해한다고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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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의 영토가 이탈리아 중부를 단절시켜 지리적 통합을
저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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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교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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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의 보수적 정치 개입을 강력히 비판하며 시민 중심의
근대 국가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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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가 오스트리아 등 외세의 압제를 묵인하거나
지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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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63세의 고령인 1870년, 그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하여 자신을 로마에서 쫓아냈던 프랑스(제3공화국)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보주 군단을 이끌며 디종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을 상대로 거둔 유일한 승리 중 하나였습니다.
육체의 쇠락과 동족의 배신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검은 언제나 '자유'가 필요한 곳을 향했습니다.
이제 노병은 마지막 안식처인 카프레라로 향합니다.
8. 카프레라의 사자: 최후의 나날과 불멸의 유산 (1872~1882)
말년의 가리발디는 카프레라 섬에서 관절염과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고생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습니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에 참여하며 사회적 정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했고, 바쿠닌 등과 교류하며 국제주의적 면모를 보였습니다.
특히 1861년, 미국 내전 당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북군 사령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가리발디는 '노예 해방 선언'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며 거절했던 일화는 그의 고결한 인권 의식을 보여줍니다.
훗날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가리발디는 그를 "위대한 해방자"라 칭송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1882년 6월 2일, 그는 바다가 보이는 침대 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소박하게 화장되어 자신의 섬에 묻히는 것이었으나, 국가적 영웅을 숭배하려는 이탈리아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화려한 국장(國葬)을 치른 뒤 그를 매장했습니다.
이는 개인 가리발디와 '국가적 상징' 가리발디 사이의 마지막 갈등이었습니다.
주세페 가리발디의 불멸의 유산
- 실용적 애국주의: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보다 조국의 통합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우선시한 리더십의 표본.
- 민주주의와 인권의 선구자: 보편적 선거권, 여성 인권,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20세기 해방 운동(네루, 체 게바라 등)에 영감을 줌.
- 순수한 헌신의 상징: 권력을 쥐었음에도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농부로 돌아간 '킨키나투스'적 삶의 태도.
가리발디의 삶은 끝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탈리아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최종적인 교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9. 가리발디 리더십 인사이트
주세페 가리발디는 우리에게 "진정한 힘은 신념을 지키는 용기뿐만 아니라, 대의를 위해 타협할 줄 아는 지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칼과 총으로 땅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헌신과 겸손으로 민중의 마음을 정복했습니다.
[가리발디 일대기: 성공과 시련의 연대기 최종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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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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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활동 및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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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리더십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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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1807-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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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간로크에서의 각성, 사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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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수립: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위해 인생을 던지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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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기 (1835-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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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게릴라 전술 완성, 붉은 셔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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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의 축적: 시련을 기회로 바꾸어 자신만의 독보적인 전문성을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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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기 (1848-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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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수호, 전 세계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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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탄력성: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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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 (1859-1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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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인 원정대, 테아노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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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희생: 조국을 위해 권력과 신념을 내려놓는 실용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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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기 (1862-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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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레라 은퇴, 국제적 인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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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가치: 죽는 순간까지 약자의 편에 서는 일관된 삶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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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발디의 삶은 하나의 대서사시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붉은 셔츠'에서 뜨거운 열정을 배우고, 그의 'Obbedisco(복종하겠습니다)'에서 차가운 절제력을 배웁니다.
가리발디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념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무엇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가리발디는 훗날 자신의 고향 니스(Nice)가 프랑스로 할양되자 카보우르를 강하게 비난하며 평생의 원한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통일을 위해 카보우르가 이끄는 사르데냐 정부와 협력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원한과 공적인 대의가 충돌할 때, 리더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가리발디의 선택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지 고민해 봅시다.
이 글은 주세페 가리발디의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과정과 관련된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다양한 사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본문에는 남미 망명기, 로마 공화국 수호, 1,000인 원정대 등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 장면과 표현은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해 서사적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또한 가리발디의 역할과 평가, 일부 전투의 의미 등은 학계에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으며, 단일한 시각이 아닌 여러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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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traces the life of Giuseppe Garibaldi, a central figure in the unification of Italy and a symbol of revolutionary struggle across continents.
Born in Nice, he began as a sailor before becoming involved in republican movements inspired by Giuseppe Mazzini.
After a failed uprising, he fled to South America, where he gained extensive military experience in Brazil and Uruguay, forming the foundation of his later campaigns.
Returning to Europe during the revolutions of 1848, Garibaldi played a key role in defending the Roman Republic.
Though defeated, his reputation grew, and he became an international figure associated with freedom movements.
His most famous achievement came in 1860 with the Expedition of the Thousand, where he led a small volunteer force to conquer southern Italy.
Despite being a committed republican, he chose to hand over his conquests to King Victor Emmanuel II, prioritizing national unity over personal ideology.
Garibaldi continued to fight for causes such as the liberation of Rome and even participated in foreign conflicts, maintaining his image as a global champion of lib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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