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근대 국가를 설계한 합스부르크 여성 군주 (Maria Theresia)



마리아 테레지아: 제국의 어머니, 근대 오스트리아의 설계자


1. 풍전등화의 제국과 23세 여대공의 등장

1740년 10월 20일, 빈의 호프부르크 왕궁은 깊은 침묵과 공포에 잠겼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사냥 중 얻은 열병으로 돌연 서거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군주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650년을 이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남성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이자, 유럽 전역을 뒤덮을 거대한 전쟁의 서곡이었습니다.

카를 6세는 생전 자신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국의 모든 영토를 온전히 상속받을 수 있도록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이라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유럽의 열강들에게 수많은 외교적 양보와 이권을 내어주며 이 종이 한 장에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국제 정치라는 비정한 전장 위에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법적 약속은 단지 '찢어발기기 좋은 종이 조각'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카를 6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그토록 집착했으나 끝내 운명은 그를 외면했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딸이 제국을 지탱할 수 있을지 의심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꽃으로 피어나 방패로 단련되다: 준비되지 않은 상속녀의 유년기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국의 기쁨이자 동시에 거대한 숙제였습니다.

1717년 빈에서 태어난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남동생 레오폴트 요한이 요절한 후, 사실상의 후계자로 자라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의 장미": 유럽을 홀린 미모

어린 시절의 그녀는 '합스부르크의 장미'라 불릴 만큼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와 옅은 금발,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한 크고 푸른 눈동자를 가졌습니다.

훗날 그녀의 숙적이 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조차 청년 시절 그녀를 처음 보고 "천사 같은 미모에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며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녀는 춤과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궁정 발레 공연에서 직접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한 번 보는 것이 빈 여행의 목적"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제왕학 없는 공주 교육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부친 카를 6세는 딸을 위해 '국사조칙'이라는 법적 장치에는 집착했으나, 정작 그녀에게 제왕학 교육은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와 역사, 예술에는 정통했으나 국가 통치에 필수적인 군사학이나 행정, 법학 교육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카를 6세는 마지막까지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가 23세에 즉위했을 때, 그녀는 "국가 보고서 한 장 읽는 법을 모르는 상태"였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 유년기의 방치된 교육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권위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운명적 사랑: 프란츠 슈테판과의 만남

그녀의 유년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6세 때 미래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로렌 공국 상속자)을 만난 것입니다.

당시 18세기 왕실에서 보기 드문 '진실한 사랑'이 싹텄습니다. 

그녀는 10대 시절부터 다른 정략결혼 상대를 거부하고 오직 프란츠만을 고집했습니다.


"나의 전 생애는 그를 위한 것" 

아버지가 정치적 이유로 결혼을 망설일 때, 그녀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결국 1736년 결실을 본 이 사랑은 훗날 그녀가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심리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는 처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국고는 파산 상태였으며, 모든 주요 수입원은 이미 전쟁 채무를 위해 저당 잡혀 있었습니다. 

군대는 정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만 명 수준으로 약체화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훈련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그녀를 보좌해야 할 고문관들은 부친 세대부터 자리를 지켜온 노쇠하고 무능한 '살아있는 화석'들과 같았습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 젊고 경험 없는 여성을 가리켜 "왕관을 쓴 사냥감"이라 비웃었습니다. 

특히 베를린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는 그녀의 성별과 제국의 재정적 곤경을 틈타 합스부르크의 심장부를 도려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8세기 유럽의 권력 지형에서 여성 군주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정통성의 위기였으며, 제국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국의 딸'은 비탄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곧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가혹한 시험대 위로 올라서야 했습니다.


2. 시련의 불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슐레지엔 상실

카를 6세가 서거한 지 불과 두 달 뒤인 1740년 12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합스부르크의 가장 비옥한 영토인 슐레지엔을 침공했습니다. 

이는 국사조칙의 서약을 비웃는 명백한 '배신'이자 '강탈'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프리드리히를 가리켜 "양심 없는 악마"라 부르며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프리드리히의 도발은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바이에른, 프랑스, 스페인, 작센이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사방에서 늑대처럼 달려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740년부터 1748년까지 전 유럽을 피로 물들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입니다. 


초기 전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1741년 오스트리아군은 몰비츠 전투에서 참패했고, 적군은 빈의 턱밑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당시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주변 참모들은 영토 포기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단 한 뼘의 땅도, 단 하나의 권리도 포기하지 않겠다."


1741년 9월 11일, 그녀는 제국의 운명을 걸고 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 의회로 향했습니다. 

당시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냉소적이었으나, 상복을 입은 채 갓 태어난 아들 요제프(훗날 요제프 2세)를 품에 안고 나타난 젊은 여왕의 모습은 그들의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녀는 라틴어로 눈물의 연설을 토해냈습니다. 

"제국과 나의 생존이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에 감동한 마자르 귀족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외쳤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피를 바치겠다!(Vitam et Sanguinem!)" 

이 전설적인 헌신은 오스트리아에 6만 명의 정예병과 막대한 군자금을 선사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충성맹세


이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는 반격에 나섰고, 1745년에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등극시키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요충지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내어주어야 하는 뼈아픈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전 유럽으로부터 합스부르크의 정당한 상속자로서의 지위를 공식 승인받았으며, 제국의 결속력을 확인했습니다. 

슐레지엔의 상실은 그녀에게 평생의 숙제이자 상처가 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오스트리아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3. 국가의 재탄생: 근대화를 향한 거대한 설계와 개혁 정책

전쟁을 통해 제국의 구조적 취약점을 뼈저리게 느낀 마리아 테레지아는 '계몽주의적 전제군주'의 면모를 드러내며 대대적인 내부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그녀는 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과 같은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가 필수적임을 깨달았습니다.


행정 및 조세 개혁: 하우크비츠의 등용

그녀의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은 백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하우크비츠(Haugwitz)였습니다. 

그는 프로이센이 점령한 슐레지엔 지역의 행정 시스템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를 오스트리아에 접목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수적인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하우크비츠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조세 제도였습니다. 

과거 귀족과 교회는 면세 특권을 누렸으나, 그녀는 국가의 존립을 위해 이들에게도 과세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습니다. 

또한, 지방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행정권을 중앙 정부로 회수하여 빈 중심의 효율적인 관료제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지방 분권적인 봉건 국가에서 근대적인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하는 거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군사 개혁: 테레지아 군사 아카데미

그녀는 군대를 군주의 사병이 아닌 '국가의 보루'로 재정립했습니다. 

1752년 비너 노이슈타트에 설립된 '테레지아 군사 아카데미'는 전문적인 장교단을 양성하는 제국의 엘리트 산실이 되었습니다. 

또한 일반 징병제를 도입하고 농민 출신 병사들에게도 정기적인 급료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이러한 군사 개혁은 오스트리아군의 전투력을 프로이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카데미 본관 (비너 노이슈타트 성)


교육 혁명: 초등 의무 교육의 효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1774년에 공포된 '일반 학교령'입니다. 

그녀는 "교육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공적인 영역"이라고 선언하며, 전 유럽에서 가장 선구적인 초등 의무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계층과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가 6세부터 12세까지 기본 교육을 받도록 규정했으며, 이를 위해 교과서를 통일하고 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했습니다. 

이는 훗날 오스트리아 국민의 지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여 근대화의 인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사법 및 인권: 인도주의적 법제화

그녀는 인권 향상과 법치주의 확립에도 헌신했습니다. 

1749년 행정과 사법을 완전히 분리하여 재판의 독립성을 확보했으며, 1768년에는 '테레지아 형법전(Constitutio Criminalis Theresiana)'을 편찬했습니다. 

특히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법적 고문을 엄격히 금지하고 사형 집행을 제한하는 등 인도주의적 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또한 천연두 예방 접종을 장려하고 빈민 구제 기관을 설립하는 등 백성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정치를 실천했습니다.


4. 외교 혁명과 7년 전쟁: 세 자매의 패티코트 작전

1750년대,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탈환이라는 일생의 목표를 위해 수백 년간 지속된 합스부르크와 프랑스 부르봉 가문 사이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파격적인 '외교 혁명'을 단행했습니다. 

이 대담한 전략의 기획자는 천재 외교관 카우니츠 백작(Count Kaunitz)이었습니다.

전통적 우방이었던 영국이 숙적 프로이센과 손을 잡자, 카우니츠는 프랑스의 실권자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설득하여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을 성사시켰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까지 가세하며 프로이센을 포위하는 강력한 동맹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역사는 이를 두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프랑스의 퐁파두르라는 세 여성이 주도했다 하여 '3자매의 패티코트 작전'이라 부릅니다.


말 위에 탄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빌헬름 캄파우젠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군은 과거와 달랐습니다. 

1757년 콜린 전투(Battle of Kolín)에서 오스트리아는 무적이라 불리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제국 최고 무공 훈장인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제정했습니다. 

프로이센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1762년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우방이었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급서하고,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표트르 3세가 즉위한 것입니다. 

러시아는 즉각 동맹에서 이탈하여 프로이센을 구원했고, 이는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기적'이라 불리며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눈앞에서 앗아갔습니다.


카를 뢰흘링의 작품, [콜린 전투의 프로이센 보병 근위대]


결국 1763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끝내 슐레지엔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무한 팽창을 저지하고,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녀는 전장에서 얻은 교훈을 왕실의 가장 개인적인 영역인 '결혼 외교'로 확장하며 제국의 안보를 도모했습니다.


5.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어머니(Übermutter)': 사랑과 정략의 교차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군주인 동시에 16명의 자녀를 둔 헌신적인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에게 자녀는 제국의 미래를 담보할 가장 소중한 자산이자, 결혼 동맹을 통해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외교적 도구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당시 왕실에서 보기 드문 연애결혼을 한 그녀는 남편의 바람기조차 눈감아줄 정도로 그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1765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깊은 비탄에 빠져 남은 생애 15년 동안 오직 검은 상복만을 입었으며, 자신의 침실을 검게 꾸미고 죽는 날까지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기도문에 남긴 기록: 그녀의 기도 책자에는 남편과 함께한 시간을 분 단위로 계산한 메모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29년 6개월 6일, 즉 335개월, 1,540주, 10,781일, 그리고 258,744시간이었다." 

제국을 통치하던 냉철한 군주가 밤마다 숫자를 세며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계단: 노년의 그녀는 몸이 비대해져 거동이 불편해지자, 남편의 묘소가 있는 지하 납골당으로 내려가기 위해 특수 제작된 승강기를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승강기 줄이 끊어지는 사고가 나자 그녀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남편이 나를 빨리 부르는 모양이구나."


프란츠 1세, 프란츠 슈테판


그러나 군주로서의 그녀는 자녀들의 운명에 대해 냉혹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유럽 각국으로 시집보내며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공고히 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 

프랑스와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15세의 딸을 루이 16세에게 보낸 그녀는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딸을 훈계했습니다. 

"사치에 빠지지 마라", "프랑스 국민의 사랑을 받아라", "찰스 1세의 처형을 기억하라"는 그녀의 경고는 어머니의 사랑과 통치자의 불안감이 교차하는 지점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녀들 사이에서도 차별과 편애를 보였습니다. 

넷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는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하며 막대한 지참금을 주었으나, 몸이 불편하여 정략적 가치가 없었던 마리아 안나에게는 차갑게 대했습니다. 

이러한 'Übermutter(위대한 어머니)'로서의 면모는 그녀의 인간적인 그늘인 동시에 제국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군주의 숙명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가족들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요 자녀와 그 운명]

이름
생몰연도
주요 역할 및 운명
요제프 2세
1741~1790
신성로마제국 황제,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 급진적 개혁 추진
마리아 크리스티나
1742~1798
모친의 전폭적인 편애로 유일하게 알베르트 공작과 연애결혼
마리아 안나
1738~1789
신체적 결함으로 정략결혼에서 제외되어 수녀가 됨
레오폴트 2세
1747~1792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어 황제 등극, 안정적 통치 계승
마리아 카롤리나
1752~1814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로서 강인한 통치력 발휘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되는 비극


6. 황혼의 통치: 공동 섭정과 유산의 무게

1765년 남편의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은 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세대 갈등'과 '철학적 대립'의 장이었습니다. 

계몽주의적 이상주의자였던 요제프 2세는 전통과 관습을 단숨에 타파하려 했으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실용주의자였던 어머니는 점진적인 변화를 고수했습니다.


요제프 2세


특히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은 그녀의 도덕적 양심과 제국의 실리가 충돌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녀는 주권 국가인 폴란드를 찢어발기는 행위가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영토를 나누어 갖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만 배제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서명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비웃으며 "그녀는 울면서도 결국은 가졌다"라고 평했습니다.

그녀의 통치에는 명암이 분명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는 등 근대화에 앞장섰으나, 유대인에 대해서는 불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개신교도들에게도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 안정감은 요제프 2세의 급진성이 초래할 수 있었던 제국의 분열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무덤


7.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원한 유산과 역사적 평가

1780년 11월 29일, 평생을 제국에 헌신했던 이 위대한 정치가가 6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합스부르크의 영광스러운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위엄을 상징하는 쇤브룬 궁전(Schönbrunn Palace)의 노란색(테레지아 옐로) 벽면은 그녀의 취향과 권위를 상징하며, 전 세계에서 은화의 대명사로 통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Thaler)는 그녀의 영향력이 국경을 넘어섰음을 증명합니다. 


오스트리아의 1 탈러, 마리아 테레지아 - 1780년경


또한 그녀가 세운 테레지아눔과 군사 아카데미는 오늘날까지도 오스트리아의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순히 '제국의 어머니'라는 신화 속에 박제된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성별에 대한 편견과 파산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직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혜안으로 제국을 구하고 현대 오스트리아의 기틀을 설계한 혁명가였습니다. 

18세기라는 거친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리더십은 오스트리아가 20세기 초까지 거대 제국으로 존속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시대를 앞서간 설계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배출한 가장 찬란하고 견고한 보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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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 사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해 장면 구성·서사적 연결·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둘러싼 일부 일화와 표현은 당대 기록·후대 전승·역사가의 해석이 혼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오류, 과도한 해석, 누락된 맥락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세요.

또한 본문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해석·반론·확장 토론 역시 언제나 환영합니다.

이 글이 일방적인 결론이 아닌, 살아 있는 역사 대화의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Maria Theresa (1717–1780) ascended the Habsburg throne in 1740 at the age of twenty-three, facing the collapse of dynastic authority, an empty treasury, and foreign invasion.

Though legally secured by the Pragmatic Sanction, her inheritance was immediately challenged, most notably by Frederick II of Prussia, triggering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Despite early defeats and the permanent loss of Silesia, Maria Theresa consolidated her legitimacy through political resolve, symbolic leadership—most famously before the Hungarian Diet—and diplomatic endurance.

Rather than ruling through military conquest alone, she rebuilt the state from within. 

Her reign marked a decisive transformation from a fragmented feudal realm into a centralized, modern state. 

Through sweeping administrative, fiscal, military, judicial, and educational reforms, she strengthened bureaucracy, imposed taxation on nobility and clergy, professionalized the army, restricted judicial torture, and introduced compulsory primary education. 

These measures laid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modern Austria.

A devout Catholic yet pragmatic ruler, Maria Theresa balanced tradition with reform, often clashing with her more radical son, Joseph II. 

As a mother of sixteen children, she practiced dynastic marriage diplomacy, most famously arranging the marriage of Marie Antoinette to France. 

Though she failed to reclaim Silesia, her resilience preserved Habsburg power and reshaped Central Europe. 

Maria Theresa remains not merely an “empress-mother,” but a decisive architect of the modern state—governing through endurance, reform, and an unyielding sense of d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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