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왕 에드워드의 암살 사건: 왕권 분열과 시성의 역사 (Edward the Martyr)



순교왕 에드워드: 비극적 서사와 역사가 교차하는 성스러운 여정


1. 평화왕 에드거의 사후와 잉글랜드의 불확실성

10세기 후반, 잉글랜드는 '평화왕 에드거(Edgar the Peaceful)'의 치세 아래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전체의 진정한 국왕으로 추대된 첫 군주였으며, 베네딕토회 개혁 운동을 강력하게 후원하며 국가의 종교적·문화적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975년,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맞이한 에드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견고해 보였던 국가적 안정성에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군주의 부재는 즉각적인 후계 구도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에드거가 남긴 두 아들, 당시 약 13세였던 장남 에드워드와 7세에 불과했던 차남 애설레드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이 어린 왕자들은 스스로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기엔 너무나 어렸고, 이들을 둘러싼 지지 세력 간의 역학 관계는 잉글랜드를 분열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습니다. 

강력한 구심점을 잃은 왕권은 이제 지배 계층 내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성유를 바른 대주교의 손길이 채 마르기도 전에, 소년 왕의 어깨 위에는 개혁의 열망과 귀족들의 탐욕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무게가 지워졌습니다.


2. 왕위 계승 분쟁: 베네딕토회 개혁과 권력의 충돌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혈통의 문제를 넘어, 당대 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 개혁'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습니다. 

에드거 왕 치세에 토지를 몰수당하거나 강제로 매각해야 했던 세속 귀족들은 왕의 사후 이를 되찾기 위해 조직적인 '반(反) 수도원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토지 분쟁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군주가 사라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법적·행정적 허점을 노린 '기회주의적 약탈(Opportunism)'이 이 시기의 본질이었습니다.


구분
에드워드 지지파 (장남 측)
애설레드 지지파 (차남 측)
핵심 인물
성 던스턴(캔터베리 대주교), 성 오스월드(요크 대주교)
계모 앨프스리스(왕비), 주교 애설워드, 앨프헤어(머시아 백작)
명분 및 배경
장자 상속의 원칙과 왕권 정통성 수호
정식 결혼(성유를 받은 왕비)을 통한 적통성 강조
정치적 성향
베네딕토회 개혁의 지속 및 강화 지지
수도원 토지 회수 및 세속 귀족의 기회주의적 권익 옹호

이들의 대립은 잉글랜드 정세를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던스턴 대주교는 정통성이 취약한 에드워드를 지지함으로써 왕권을 보완하려 했고, 그의 강력한 영향력에 힘입어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파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한 채 위태로운 통치의 서막을 알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불안정한 지지 기반 위에서 시작된 에드워드의 짧은 통치는 성인으로서의 경건함과 한 인간으로서의 격정이 교차하는 모순된 시간이었습니다.


순교왕 에드워드


3. 짧고 격정적이었던 통치: 종교적 헌신과 성격적 결함의 교차

에드워드 왕의 3년 남짓한 통치는 경건함과 잔혹함이라는 이질적인 두 면모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한편으로 하느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했던 '성스러운 그릇'으로 추앙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통치자였습니다. 

비르트페르스(Byrhtferth)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장 가까운 가신들조차 공포에 떨게 했던 날카로운 언어적 채찍질(tongue-lashings)을 가했으며, 때로는 잔혹한 매질과 신체적 폭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성격적 결함은 그를 향한 귀족들의 적개심을 키우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통치기의 주요 사건에 대한 사학적 분석

• 기회주의적 반(反) 수도원 반응의 격화: 앨프헤어 등 귀족들은 왕의 행정적 장악력이 약화된 틈을 타 수도사를 축출하고 토지를 강제로 회수했습니다. 

이는 에드거 왕이 구축한 종교적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 대기근의 발생(976년):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민심이 이반되었으며, 왕권의 신성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칼네(Calne) 회의의 참변(977년): 현인 회의 도중 건물 2층 바닥이 무너져 많은 고문관이 사망했으나 던스턴 대주교만 기적적으로 생존했습니다. 

이는 당대인들에게 왕권의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징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내부적 갈등과 소년 왕의 불안정한 성품은 귀족들의 은밀한 불만을 임계점으로 몰아넣었고, 이는 결국 코프 성의 비극적인 저녁으로 수렴하게 됩니다.


4. 코프 성의 비극: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사악한 행위'

978년 3월 18일 저녁, 사냥 중이던 16세의 소년 왕 에드워드는 도싯의 코프 성(Corfe Castle)에 머물던 이복동생 애설레드를 방문하기 위해 홀로 성에 도착했습니다. 

계모 앨프스리스는 겉으로는 그를 환대하며 벌꿀술(mead) 한 잔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말 위에서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앨프스리스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가 그의 등을 칼날로 꿰뚫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에드워드는 고통 속에서 "내 오른손을 꺾어 무엇을 하려느냐?(What are you doing, breaking my right hand?)"라는 비통한 외침을 남긴 채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한쪽 발이 등자(stirrup)에 걸린 채 겁에 질린 말에 끌려가던 소년 왕의 육신은 성문 밖으로 처참하게 짓개졌습니다. 


에드워드, 코프에서 살해당하다


당대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사건을 두고 "잉글랜드 민족에게 이보다 더 나쁜 행위는 없었다"고 기록하며 종교적 죄악감을 표출했습니다. 

이 비극은 배후로 지목된 앨프스리스뿐만 아니라, 형의 피 위에 왕좌를 세우게 된 어린 애설레드 왕에게도 평생토록 씻을 수 없는 정치적 낙인이 되었습니다. 

육신의 비참한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향한 영적인 숭배의 시작이었습니다.


5. 기적과 시성: 정치적 살인에서 종교적 순교로의 변모

에드워드의 시신은 처음에 웨어럼(Wareham)의 평범한 무덤에 품위 없이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직후부터 보고된 기적들은 그를 단순한 희생자에서 성스러운 순교자로 격상시켰습니다.

1. 맹인의 치유: 왕의 시신이 임시 안치되었던 오두막에서 여왕의 자선으로 연명하던 선천적 맹인 여성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 '천상의 빛'을 목격한 후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 불기둥의 현현: 웨어럼의 무덤 위로 하늘까지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이 목격되었고, 주민들은 이를 신의 계시로 여겨 유해를 수습했습니다.

3. 유해의 불패(不敗)와 낙원의 향기: 981년 샤프츠버리 사원(Shaftesbury Abbey)으로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무덤을 열었을 때,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1001년 재안치(Elevation) 시에는 무덤에서 "낙원의 향기(Fragrance of Paradise)"가 뿜어져 나와 참관객들로 하여금 천국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기적적 서사는 1008년 전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그를 공식 성인으로 선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왕가를 향한 민중의 치유이자, 바이킹의 침략을 '국왕 시해'라는 죄악에 대한 신의 벌로 인식하던 당대인들이 왕권의 신성함을 회복하려는 정치적·종교적 승화였습니다.


샤프츠버리 수도원에 있는 에드워드 순교자 석비


6. 현대적 유산: 유해의 발견과 브룩우드의 안식

종교 개혁의 격랑 속에서 자취를 감췄던 에드워드의 유해는 1931년 고고학자 윌슨 클래리지(J.E. Wilson-Claridge)에 의해 샤프츠버리 사원 터에서 재발견되었습니다. 

골학 전문가 T.E.A. 스토웰 박사는 이 유골이 말에 끌려가며 발생한 상처 부위와 일치하는 20세 전후 청년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료와의 일치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학계에는 신중한 반론도 존재합니다. 

돈 브로스웰(Don Brothwell)과 같은 학자들은 해당 유골이 20대 후반에서 30대 남성의 것이며, 발견된 부상 역시 사망 당시가 아닌 사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실체'와 '신앙적 숭배' 사이의 긴장은 에드워드 서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오랜 논쟁 끝에 1988년, 유해는 브룩우드 묘지의 성 에드워드 순교자 정교회에 안치되어 현대 정교회 및 영국 교회에서 기려지고 있습니다.

에드워드의 삶과 사후 서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치를 전달합니다.

• 비극의 승화: 개인적 결함이 있는 지도자라도 그 죽음이 공동체의 죄책감과 결합할 때 어떻게 성스러운 상징으로 변모하는지 보여줍니다.

• 역사적 치유: 시해된 왕을 성인으로 추대함으로써 잉글랜드 사회는 분열의 상처를 봉합하고 왕권의 도덕적 정통성을 재확립했습니다.

한 소년 왕의 짧고 격정적인 삶은 배신과 칼날 앞에 허무하게 저물었으나, 그의 사후 서사는 천 년의 시간을 넘어 '희생'과 '치유'의 이름으로 영원한 역사적 마스터피스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10세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순교왕(Edward the Martyr)의 생애와 죽음을 중심으로, 정치사·종교사·성인전 전통(hagiography)을 함께 검토하여 서술한 역사 해설입니다.

암살 과정의 세부 묘사, 기적 서사, 발언 기록 등 일부 내용은 당대 연대기와 후대 성인전에서 전해지는 전통적 서술에 기반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다양한 해석과 신중한 재검토가 병행되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사실 관계에 대한 보완, 다른 사료 해석, 또는 관점 차이가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와 토론을 남겨주세요.

이 글이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역사와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함께 고민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Edward the Martyr was a teenage king whose brief reign exposed the deep fractures of late tenth-century England. 

After the death of King Edgar the Peaceful, rival factions clashed over succession, monastic reform, and land ownership. 

Edward, supported by church reformers, ruled amid famine, political unrest, and aristocratic hostility. 

In 978, he was assassinated at Corfe Castle under circumstances later interpreted as both a political murder and a moral crime against kingship. 

Following his violent death, miracle stories transformed Edward into a martyr-saint, helping society reconcile guilt and restore sacred authority. 

His cult endured beyond the Middle Ages, reflecting how tragedy, faith, and power shaped collective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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