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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사천해전: 거북선의 첫 출격과 해상 주도권의 대전환
1. 서론: 임진왜란 초기 전황과 사천해전의 전략적 위상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고요하던 조선의 바다는 왜군의 거대한 침략 함대와 함께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한 왜군은 개전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했으며, 국왕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떠나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육전에서의 연전연패는 조선 조정에 절망을 안겼으나, 바다에서의 전황은 사뭇 달랐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는 1차 출동(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을 통해 적선 40여 척을 분멸하며 조선 수군의 저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1차 승전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여전히 위박했다.
왜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해상 보급로를 공고히 한 뒤, 남해안을 우회하여 서해로 진출함으로써 육군과 합세하는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었다.
만약 왜군 수군이 서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평양과 의주로 진격한 왜군 본대에 군량과 병기를 무한정 공급하게 되어 조선의 패망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될 상황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국면에서 1592년 5월 말 발발한 사천해전은 단순한 국지적 승리를 넘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대전환점'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 왜군은 거제도 서쪽 사천과 곤양 일대까지 진출하여 전라좌수영의 근거지인 여수와 전라도 전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 수군의 비밀 병기이자 병기공학의 정수인 '거북선(귀선)'을 실전에 투입하기로 결단한다.
사천해전은 거북선이라는 비대칭 무기체계가 왜군의 핵심 전술인 등선육박전(백병전)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붕괴시키고 해상 주도권을 탈환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 승리는 왜군에게 '복카이센(바다 괴물)'이라는 공포를 각인시켰으며, 조선 수군에게는 이후 당포, 당항포, 한산도 대첩으로 이어지는 연전연승의 심리적·기술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2. 병기공학의 혁명: 거북선(귀선)의 구조와 실전 준비 과정
조선 수군의 최종 병기인 거북선은 우연히 탄생한 산물이 아니었다.
이는 지휘관 이순신의 탁월한 전략적 예견과 실무 책임자 나대용(羅大用)의 공학적 헌신이 결합된 결정체였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추적해 보면, 이순신은 왜란 발발 훨씬 전부터 거북선의 건조와 화력 시험에 사활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 2월 8일, 이순신은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 베) 29필을 수령하며 건조의 박차를 가했다.
이후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는 시험을 처음으로 수행하여 함포와 선체 간의 반동 흡수 능력을 검증했다.
4월 11일 돛을 제작하여 기동력을 확보한 데 이어, 일본의 침공 단 하루 전인 4월 12일, 이순신은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실제로 발사하며 실전용으로 완벽히 완성했다.
"아침밥을 먹은 후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보았다"는 일기의 담담한 기록 뒤에는, 전쟁 직전 무기 체계의 최종 점검을 마친 지휘관의 치밀함이 서려 있다.
나대용은 전라좌수영의 '감조전선 군관(監造戰船軍官)'으로서 거북선 건조의 실질적 설계를 담당했다.
그는 기존의 주력함인 판옥선을 모체로 하되, 병기공학적 혁신을 더했다.
거북선은 하판(底板)의 길이가 64자 8치에 달하며, 판옥선의 갑판 위를 두꺼운 나무판으로 덮어 뚜껑을 씌운 구조였다.
그 위에는 날카로운 쇠못(철첨, 鐵添)을 빽빽하게 박아 왜군의 장기인 '등선육박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거북선의 기술적 우위는 왜선과의 재질 차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왜선인 세키부네나 아타케부네는 가볍고 빠른 기동을 위해 삼나무(杉木)를 주로 사용했으나, 이는 충격에 취약했다.
반면 거북선은 단단하고 비중이 높은 소나무(강송)를 사용했으며, 쇠못과 나무못을 혼용한 결구 방식을 채택하여 충각(衝角) 작전 시에도 선체가 파손되지 않는 강력한 내구성을 확보했다.
선체 사방에는 지자, 현자, 천자, 황자포를 배치하여 사각지대 없는 화망을 구성했고, 선수부에는 용머리(용두)를 설치하여 그 입을 통해 포격을 가하거나 유황 연기를 뿜어 적의 시야를 가리는 심리전을 병행했다.
승선 인원은 약 150명으로, 20개의 노에 80~90명의 노군이 배치되어 평저선 특유의 급선회 능력과 기동성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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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수군의 주력 돌격선인 거북선의 3층 갑판(상갑판) 내부 투시도 |
3. 전투의 전야: 1592년 5월 27일~29일의 기동과 합류
1차 출동을 마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하여 전열을 정비하던 이순신에게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의 긴급 구원 요청이 날아들었다.
"왜선 10여 척이 사천과 곤양 등지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으며, 아군 전선들은 남해 노량으로 이동했다"는 보고였다.
왜군은 이미 조선 수군의 본거지 턱밑까지 칼날을 들이민 상태였다.
이순신은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본래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6월 3일을 기해 합동 출격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적의 기세를 꺾지 않으면 해상 주도권을 영영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순신은 이억기에게 뒤를 쫓아오라는 전언을 남긴 채, 5월 29일 새벽 4시경(묘시) 전라좌수영 소속 판옥선 23척과 거북선 2척을 이끌고 여수를 발진했다.
1차 출동 당시보다 판옥선이 1척 줄어든 것은 송한련이 승보 장계를 들고 평양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함대는 노량 앞바다에 도착하여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함대와 합류했다.
당시 원균의 전력은 고작 판옥선 3척에 불과했다.
이로써 조선 연합함대는 총 26척의 판옥선과 2척의 거북선(본영 귀선, 방답 귀선)으로 구성되었다.
이순신이 우수영 함대를 기다리지 않고 출전을 강행한 것은 적의 보급로 확장을 차단하고, 초기 승전의 기세를 이어가야 한다는 전략적 단호함의 소산이었다.
연합 함대는 곤양 쪽에서 사천으로 달아나는 왜선 1척을 추격하여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현령 기효근의 포격으로 분멸한 뒤, 본격적인 적진인 사천 선창으로 진입했다.
4. 사천 선창의 지형적 난제와 유인 전술(誘引作戰)의 전개
함대가 도착한 사천 선창(현재의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장암창지 추정)은 지형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곳이었다.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지형이 험하고 산세가 구불구불 7~8리나 이어져 있으며, 절벽 위에는 왜군 400여 명이 뱀이 똬리를 튼 듯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군은 절벽 위 요새와 정박한 대선 12척을 연계하여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 수군에게 닥친 가장 큰 제약은 조수 간만의 차였다.
전투 당시 바다는 썰물이었고, 선체가 크고 평평한 평저선 구조의 판옥선은 수심이 얕은 포구 안으로 진입할 경우 개펄에 좌초될 위험이 컸다.
적은 이를 간파하고 절벽 위에서 조총을 쏘며 아군을 도발할 뿐, 유리한 지형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이순신은 전술적 유연함이 돋보이는 '거짓 후퇴' 유인책을 구사했다.
그는 함대를 뒤로 물려 먼 바다로 나가는 척했다.
이는 단순히 적을 끌어내는 것을 넘어,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기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 벌기였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으로 오판하여 산 위에서 포구 근처까지 내려와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시간이 흘러 물길이 차오르고 판옥선이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자, 이순신은 비로소 함대의 기수를 돌려 적진의 심장부를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사천해전의 전투 장소를 둘러싼 논란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기존에는 사천시 선진리 일대를 전적으로 인식해 왔으나, 최근 연구와 칼럼에서는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등장하는 ‘사천 선창’의 지형·조수 조건이 선진리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된다. 현재 조수 간만, 포구 구조, 절벽 배치 등을 종합한 재검토가 학계에서 진행 중이다.
참고 할만한 칼럼: https://www.benews.co.kr/news/422301
5. 역사적 순간: 거북선의 첫 실전 투입과 돌격전
밀물이 가득 차오른 사천 포구, 지휘선의 깃발이 나부끼며 돌격 신호가 떨어지자 거북선 돌격장 이기남(李奇男)이 이끄는 귀선들이 물결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전진했다.
이는 인류 해전사에서 장갑화된 돌격선이 체계적인 화포 사격과 결합하여 적진을 유린한 최초의 순간 중 하나였다.
거북선은 왜선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진형을 파괴했다.
선수부 용머리 포구에서는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며 불을 뿜었고, 측면의 현자총통들은 왜선의 측벽을 근거리에서 가차 없이 관통했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적선 속에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다"며 거북선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했다.
왜군은 평소의 전술대로 거북선 위로 올라타려 했으나, 짚더미 아래 숨겨진 날카로운 쇠못에 발이 찔리고 칼날에 배여 대성통곡하며 바다로 떨어졌다.
거북선이 뿜어내는 화력의 밀도는 왜군의 조총 사격을 압도했다.
용머리에서 뿜어지는 자욱한 연기와 유황 냄새는 왜군에게 미지의 괴물에 습격당하는 듯한 공포를 선사했다.
거북선이 왜선들 사이를 파고들어 진형을 흩뜨려 놓자, 뒤따르던 판옥선 주력 함대가 일제히 가세하여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조선 수군은 '단종진(單縱陣 일렬로 길게 늘어서는 진형)' 혹은 기동 진형을 유지하며 화력을 집중했고, 사천 포구는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변했다.
절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왜군 지휘부와 보병들은 아군 함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광경에 전의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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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해전 당시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 수군의 돌격 전술을 묘사한 그림 |
6. 전투의 결과: 왜선 13척 궤멸과 전술적 완승
전투는 약 3시간 만에 조선 수군의 압도적 완승으로 귀결되었다.
사천 포구에 정박해 있던 왜 대선 12척과 앞서 격침한 척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왜선이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거나 분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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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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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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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군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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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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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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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척 (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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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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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 발생 (사망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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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600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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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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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실전 능력 완벽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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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제해권 상실 및 공포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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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전투 후 패잔병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치밀한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도망친 왜군들이 인근 마을로 숨어들어 민간을 약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적선을 의도적으로 남겨두어 적들이 배를 타고 도망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적들이 포구 주변에 머무는 사이, 이순신은 밤중에 함대를 모자랑포(현재의 사천시 노룡동 미룡마을 비정)로 이동시켜 휴식을 취한 뒤, 다음 날 새벽 잔여 선박을 완벽히 소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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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측 기록에서 묘사된 이순신 모습 |
7. 고통 속의 리더십: 이순신의 부상과 난중일기의 기록
사천해전은 지휘관의 숭고한 희생이 깃든 전투였다.
이순신은 지휘선에서 직접 노를 재촉하며 최전방에서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조총 탄환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총탄은 그의 어깨뼈를 깊숙이 다치게 하고 등을 관통했다.
지휘선이 조총 사거리 내로 진입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가 격렬했음을 의미한다.
훗날 이순신이 친척이자 상관이었던 이광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의 고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난번 접전할 때 화살과 탄환을 무릅쓰고 먼저 나아갔다가 탄환을 맞은 곳이 매우 위중하였습니다. 견정대골(肩井大骨, 어깨 위 중앙 뼈)까지 깊이 다쳐 진물이 많이 흐르며 옷을 입을 수 없고, 활시위를 당길 수도 없습니다."
장계에서는 "중상에 이르지 않았다"며 조정을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치명상이었으며 1년이 지나도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전투 도중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부하들에게 숨기고 끝까지 전선을 지휘했다.
함께 부상당한 나대용과 이설 역시 지휘선을 이탈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고통을 압도하는 지휘관의 정신력은 함대 전체에 강력한 결속력을 부여했으며, 이는 향후 조선 수군이 맞이할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군인정신의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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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해전의 격전 속에서 조총 탄환에 어깨 부상을 입은 이순신 장군을 묘사한 기록화 |
8. 사천해전의 역사적 의의: 해상 주도권과 방위산업의 뿌리
사천해전은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세 가지 결정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거북선이라는 독창적 국방 기술의 승리다.
판옥선의 구조적 강점을 계승하면서도 왜군의 백병전을 차단하는 상갑판 덮개와 사방 화포 배치는 당대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이었다.
이러한 자주국방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는 사천해전 승전일인 7월 8일(양력)을 '방위산업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둘째, 해상 주도권의 전략적 전이다.
옥포해전이 조선 수군의 생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사천해전은 거북선을 앞세운 돌격 전술로 왜 수군을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왜군 지휘부로 하여금 조선 수군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갖게 했으며, 이후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이라는 거대한 포위 섬멸전을 전개할 수 있는 전술적 자신감을 제공했다.
셋째, 전적지 고증에 대한 학술적 진보다.
과거 사천해전지는 선진리성 일대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이봉수 소장 등의 연구에 따르면 『증병조참판정공전』의 기록("사천지장암")과 조수 간만의 차를 고려할 때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의 '장암창지'가 실제 전적지임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사천해전의 전술적 전개 과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근거가 된다.
9. 거북선, 불멸의 신화가 시작된 바다
1592년 5월 29일, 사천 앞바다에 울려 퍼진 거북선의 첫 포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에 보내는 승전의 축포였다.
지형적 난관과 수심의 한계를 밀물까지 기다리는 인내와 유인책으로 극복하고, 비밀리에 준비한 신무기를 적시 적소에 투입하여 적을 궤멸시킨 이순신의 리더십은 군사 전략의 모범으로 남았다.
총탄이 어깨를 꿰뚫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나의 부상을 알리지 말라"는 침묵 속에 승리를 일궈낸 그날의 숭고함은 4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맥동하고 있다.
거북선의 첫 출격지가 되었던 사천의 바다는 이제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요람이자 해양 안보의 성지로 기억될 것이다.
사천해전은 과거의 승전 기록을 넘어, 우리가 절망의 순간 어떻게 기술적 혁신을 일구고 전략적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영원한 지침서다.
이 글은 임진왜란 초기 사천해전을 중심으로, 거북선의 첫 실전 투입과 조선 수군이 해상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선조실록』 등 1차 사료와 후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전투의 흐름과 전략적 판단을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명적 서술과 장면 재구성을 병행했습니다.
전투 수치나 세부 전개에 대해서는 사료 해석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관계의 오류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을 통해 자유롭게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다양한 해석과 토론을 환영하며, 이를 통해 사천해전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합니다.
The Battle of Sacheon in 1592 marked a decisive transformation in naval warfare during the early phase of the Imjin War, as it witnessed the first combat deployment of the turtle ship and the consolidation of Joseon’s command of the southern seas.
While Japanese forces advanced rapidly on land after invading Busan, capturing the capital within weeks, the situation at sea evolved differently under the leadership of Admiral Yi Sun-sin.
After initial victories at Okpo and nearby engagements, Yi recognized that Japanese naval forces were attempting to secure maritime supply lines to support their northward advance.
If successful, this strategy would have ensured Japan’s dominance in the war.
The turtle ship was not an improvised weapon but the product of long preparation and naval engineering.
Designed under Yi’s strategic direction and constructed by the naval engineer Na Dae-yong, it combined a reinforced wooden hull, an enclosed armored deck covered with iron spikes, and heavy artillery positioned on all sides.
This design nullified Japanese boarding tactics and allowed the Joseon navy to dominate through firepower and maneuverability.
Prior to the battle, Yi conducted repeated weapons tests to ensure combat readiness.
At Sacheon, the Japanese fleet took advantage of coastal terrain and shallow waters, luring the Joseon navy into a difficult tactical situation.
Yi responded with a calculated feigned retreat, waiting for the tide to rise before launching a decisive counterattack.
When conditions became favorable, the turtle ship charged directly into the enemy formation, firing cannons at close range and shattering Japanese vessels.
As the enemy formation collapsed, panokseon warships followed with sustained artillery bombardment, resulting in the destruction of thirteen Japanese ships.
Despite suffering a severe shoulder wound during the battle, Yi concealed his injury and continued commanding the fleet.
The victory at Sacheon not only demonstrated the combat effectiveness of the turtle ship but also instilled lasting fear in the Japanese navy, secured control of the southern seas, and laid the foundation for subsequent triumphs such as Dangpo and Hansan Island.
More than a single engagement, Sacheon symbolized the power of technological innovation, disciplined leadership, and strategic patience in overcoming a seemingly overwhelming inv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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