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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법치주의의 초석: 함무라비 법전의 역사적 성립과 현대적 위상
1. 함무라비 법전이 인류사에 던지는 화두
인류 문명의 역사는 '힘의 지배'를 '법의 지배'로 전환하기 위한 거대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기원전 1754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탄생한 함무라비 법전(The Code of Hammurabi)은 단순한 고대 유물을 넘어, 성문법이라는 인류 문명의 거대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전략적 가치를 지닙니다.
이 법전은 인류 최초의 성문법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고대 법전 중 가장 완전한 체계와 구체성을 갖춘 형태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강력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법전이 지향하는 근본 정신에 있습니다.
법전 서문에 명시된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지 못하게 한다(That the strong might not injure the weak)"는 선언은 현대 법치주의(Rule of Law)의 핵심 가치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통치자의 자의적인 권력을 명문화된 법의 틀 안에 가둠으로써,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예측 가능한 질서를 제공하려 했던 인류 최초의 거대한 시도였습니다.
본 고찰에서는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 속에서 바빌론이 제국으로 부상한 과정과, 함무라비라는 군주의 입체적인 통치 철학을 분석할 것입니다.
나아가 법전 석비가 지닌 예술적·신학적 상징성, 1901년 재발견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282개 조항에 담긴 사법적 정의관을 심도 있게 탐구함으로써, 4,000년을 뛰어넘어 현대 법체계의 근간이 된 함무라비의 유산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이 거대한 법전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도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2.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부상과 함무라비 왕의 통치 철학
2.1. 지정학적 배경과 바빌론 제1왕조의 성장
기원전 1792년경, 함무라비가 바빌론의 6대 왕으로 등극했을 당시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아모리인(Amorite) 도시국가들이 비옥한 농토와 수로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혈투를 벌이던 전장(戰場)이었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건국된 지 1세기가 조금 넘은 신생 소국에 불과했습니다.
주변에는 엘람(Elam), 아시리아(Assyria), 이신(Isin), 에슈눈나(Eshnunna), 라르사(Larsa)와 같은 선발 강대국들이 포진하여 바빌론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함무라비는 부친 신-무발리트(Sin-Muballit)가 이룩한 소규모 영토(보르시파, 키시, 시파르 등)를 물려받았으나, 초기 20여 년 동안은 정복 전쟁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운하를 건설하고 사원을 증축하며 '백성의 목자'로서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외교적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누구보다 냉혹하고 기민한 정략가로 돌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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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무라비 |
2.2. 마리 기록(Mari Archives)을 통해 본 함무라비의 입체적 면모
시리아 동부 마리에서 발견된 수만 장의 점토판 기록은 함무라비라는 인물을 매우 입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자가 아니라, 동맹국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고 정세를 관망하는 "신중하고도 변덕스러운(Moody and Suspicious)" 군주였습니다.
마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동맹인 마리의 짐리-림(Zimri-Lim)과 수많은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결국 전략적 필요에 따라 동맹을 파기하고 마리를 정복하는 냉철함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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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론 왕들의 이름이 적힌 점토판, 건국 기념 점토판, 함무라비의 편지, 청금석 원통 |
그의 전략적 신중함은 엘람과의 전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엘람이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을 때, 그는 숙적이었던 라르사와 연합하여 엘람을 축출했습니다.
그러나 라르사가 군사적 지원을 지연하자, 함무라비는 즉각 창끝을 돌려 라르사를 정복함으로써 하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제국의 생존을 위한 고도의 지정학적 계산이 깔린 행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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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792년 함무라비가 즉위했을 당시와 기원전 1750년 사망했을 당시의 영토 |
2.3. '정의의 왕'이라는 통치 정당성의 확보
함무라비는 물리적 힘에 의한 통치만으로는 광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없음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즉위 연호를 '정의가 확립된 해'(1년), '정의의 왕 함무라비의 상'(22년) 등으로 명명하며, 자신을 신에 의해 선택된 '정의의 수호자'로 각인시켰습니다.
그의 정의는 결코 석비 속에 박제된 문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발굴된 수많은 점토판 서신에 따르면, 그는 지방 관리가 뇌물을 받았다는 첩보를 입수하면 즉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해당 관리를 바빌론으로 압송하고 뇌물로 받은 재산을 몰수하라."
그는 제국 전역의 사법 절차를 실시간으로 감독하는 '최고 사법관'의 역할을 자처하며 백성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왕 한 명의 초인적인 감시만으로는 제국의 영속성을 담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함무라비는 자신의 의지와 통치 철학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 규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치자의 개인적 결단(Discretion)을 만고불변의 법(Law)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는 비로소 검은 현무암 석비에 법을 새기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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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함무라비 법전 |
3. 함무라비 법전 석비(Stele)의 외형적 특징과 상징적 예술성
3.1. 검은 현무암 석비의 시각적 전략
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2.25m, 폭 65cm의 실린더 형태를 가진 검은 현무암 석비(Basalt Stele)에 새겨져 있습니다.
현무암이라는 소재의 선택은 그 자체로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진흙 판(Tablet)이 주류였던 당시, 극도로 견고하고 희귀한 현무암을 사용한 것은 법의 '영속성'과 '불변성'을 시각적으로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석비 하단에는 아카드어(Akkadian) 쐐기문자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무라비는 엘리트 계층의 언어인 수메르어 대신 당시의 공용어였던 아카드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법전의 내용을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법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고 바빌론 중심의 언어 개혁을 꾀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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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
3.2. 상단 부조 분석: 왕권신수설의 시각화
석비 상단부의 부조는 법전의 신성함을 뒷받침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부조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이자 정의의 신인 샤마시(Shamash)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학계 일각에서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로 보기도 합니다).
• 신의 권위: 샤마시는 사원 형태의 보좌에 앉아 어깨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신성한 위엄을 드러냅니다.
• 권력의 수여: 샤마시는 왕권과 법 집행의 상징인 지팡이(Rod)와 고리(Ring)를 함무라비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이는 법의 근원이 왕의 독단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있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이를 통해 자신의 입법 행위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격상시켰으며, 백성들에게 법 준수를 종교적 의무로 인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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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함무라비 왕, 오른쪽 의자에 앉은 신은 샤마시이다 |
3.3. 'Rule of Law'의 초기 발현: 시각적 매체로서의 법전
함무라비의 천재성은 법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대중에게 '전시'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바빌론의 에사길(Esagila / 마르두크 신전) 사원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의 주요 거점에 이 석비의 복제품을 세웠습니다.
비록 당시 대다수 백성은 문맹이었으나, 법이 '공개된 장소'에 '변하지 않는 돌'의 형태로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억제하는 상징적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백성들은 거대한 검은 기둥 앞에 서서 신에게 법을 부여받는 왕의 부조를 목격했습니다.
글자를 읽지 못해도 그 위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시각적인 '법치 홍보(Legal Propaganda)'의 시작이었습니다.
법은 이제 왕의 입에서 나오는 변덕스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 실체이자, 보이지 않는 질서의 화신으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비는 제국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수천 년 후 이란의 수사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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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수사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자크 드 모르강이 만든 참호 |
4. 1901년의 재발견: 수사(Susa) 발굴과 루브르로의 여정
4.1. 약탈의 역사와 수사에서의 발견
1901년 12월,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 모르강(Jacques de Morgan)이 이끄는 발굴 팀은 현재 이란의 영토인 고대 도시 수사(Susa)를 발굴하던 중 세 조각으로 나뉜 검은 돌기둥을 발견했습니다.
바빌론의 상징인 이 법전이 타국인 이란에서 발견된 배경에는 고대 근동의 치열한 약탈 전쟁사가 숨어 있습니다.
기원전 1158년경, 엘람의 왕 슈트루크-나훈테 1세(Shutruk-Nahhunte I)는 바빌론을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함무라비 법전 석비를 전리품으로 약탈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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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훈테가 가져온 바빌로니아 석비에 그의 이미지(왼쪽)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비문 일부를 깎아낸 흔적도 보입니다. |
그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석비 하단부의 비문 일부(약 4~5개 열)를 깎아냈습니다.
자신의 치적을 새겨 넣으려 했던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추가적인 비문은 새겨지지 않은 채 석비는 수천 년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약탈의 흔적은 법전의 역사성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엘람의 왕은 승전 기록을 새기기 위해 법전 하단의 조항 일부를 깎아냈으나, 정작 자신의 이름은 새기지 못한 채 석비를 방치했습니다.
이 텅 빈 공간은 훗날 고고학자들에게 '지워진 정의'를 복원해야 한다는 강력한 탐구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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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드 모르강 |
4.2. 고고학적 충격과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
발견된 석비는 당시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독점 발굴권을 얻어냈던 프랑스 발굴팀에 의해 즉시 파리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고대 엘람인이 바빌론에서 훔쳐온 유물을 근대의 프랑스가 다시 '합법적 약탈'이라는 고고학적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가져간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루브르 박물관에 둥지를 튼 이 검은 기둥은 곧 인류사를 뒤흔들 열쇠가 되었습니다.
쐐기문자 해독의 권위자였던 장-뱅상 셰일(Jean-Vincent Scheil / 도미니코회 신부이자 고고학자) 신부가 단 6개월 만에 282개 조항을 해독해 냈을 때, 전 세계 고고학계와 법학계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성경의 모세 율법보다 무려 수 세기나 앞선 시기에, 현대 법전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고도화되고 세밀한 사법 체계가 실재했다는 사실은 인류 문명사의 연표를 통째로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4.3. 삭제된 비문의 복원
엘람 왕에 의해 지워진 비문 조항들은 후대 바빌론과 아시리아의 서기관들이 연습용으로 필사해 둔 수많은 토판(Tablets)을 통해 상당 부분 복원되었습니다.
이는 함무라비 법전이 제국 멸망 이후에도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법적 교과서이자 정의의 표준으로 수세기 동안 활용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유물의 발견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새겨진 282개 조항이 보여주는 고도의 법적 체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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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무라비 법전 서문이 새겨진 점토판 |
5. 법전의 핵심 내용 분석: 동해보복형과 사법적 정의관
5.1. 구조적 분석: 서문, 본문, 결문
함무라비 법전은 문학적 완성도와 법적 논리성을 동시에 갖춘 텍스트입니다.
1. 서문(Prologue): 신들이 함무라비를 선택한 이유를 서술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을 보살피는 "구원의 목자"로 칭하며, 통치 목표가 사회적 정의 실현임을 강조합니다.
2. 본문(282개 조항): 가언 명령(If~, then~)의 형식으로 구성된 실질법들입니다.
3. 결문(Epilogue): 미래의 왕들에게 법을 훼손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신들의 처참한 저주(Sin 신에 의한 실명, Shamash 신에 의한 권력 파괴 등)를, 따르는 자에게는 축복을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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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무라비 법전 25장 |
5.2. '눈에는 눈, 이에는 이(Lex Talionis)'의 현대적 재해석
함무라비 법전의 핵심 원칙인 동해보복형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잔혹해 보일 수 있으나, 그 시대적 맥락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장치였습니다.
• 보복의 상한선 제한: 당시의 관습적인 사적 복수는 가족 간의 피의 복수로 이어져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함무라비는 '입은 피해만큼만' 되갚게 함으로써 과잉 보복을 막고 국가가 형벌권을 독점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 사회적 지위의 반영: 보복의 원칙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귀족이 귀족을 상해하면 신체형(196, 200조)을 받지만, 귀족이 평민이나 노예를 상해하면 금전적 보상(198, 199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법적으로 고착화한 한계를 보여줍니다.
5.3. 주요 법률 카테고리와 사회상의 복원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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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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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조항 및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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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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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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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3조: 무고죄 처벌(사형). 제5조: 판사가 판결을 번복하면 12배 배상 및 영구 퇴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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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추정의 원칙과 사법 공정성 확보를 위한 판사의 엄중한 책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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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 및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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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4조: 제방 관리 태만으로 이웃 농지를 침수시키면 배상 책임. 지불
능력 없으면 노예로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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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 사회의 핵심 자산인 수자원 관리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과 인과관계 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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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및 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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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조: 재해로 흉작 시 그해 이자 면제 및 '빚 문서 세척(Washing debt-tablet)'. 제117조: 채무 노예 기간 3년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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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위한 초기 복지 시스템과 영구 노예 방지를 위한 인권적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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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및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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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110조: 술집 여주인이 도량형을 속이거나 모의꾼을 숨겨주면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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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Tavern)을 정치적 음모의 장소로 보았으며, 공정 거래 질서에 매우 민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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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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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조: 의사가 수술 중 환자 사망 시 손 절단. 제229조: 부실 공사로 집주인 사망 시 건축가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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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지식을 가진 자에 대한 엄격한 품질 보증과 결과 책임 원칙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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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는 가정의 파탄마저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관리하려 했습니다.
제142조에 따르면, 남편이 자신을 비하하고 집을 돌보지 않을 경우 아내는 자신의 지참금(Sheriqtum / 어원: 수메르어에서 유래한 신부의 재산)을 챙겨 친정으로 돌아갈 권리를 가졌습니다.
4,000년 전 이미 '정당한 사유에 의한 이혼권'과 '재산권'을 법으로 보장한 셈입니다.
이는 법이 단순히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의 최소한의 인간 존엄을 지키는 방어막이었음을 보여줍니다.
5.4. 선구적 사법 체계: 신판(Ordeal)과 증거
제2조의 '강물 시험'은 현대인의 눈에는 미신적이지만, 당시에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경계의 사건을 신의 영역으로 넘김으로써 사법적 결론을 강제하는 고도의 분쟁 해결 방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확증하지 못하면 처벌한다"는 원칙은 허위 고발로부터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함무라비의 법은 메소포타미아에 국한되지 않고, 인근 문화권의 법률적 사고에도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6. 비교 법제사: 모세 율법 및 수메르 법전과의 관계성
6.1. 수메르 법적 전통의 집대성
함무라비 법전은 진공 상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 우르-남무 법전 (BC 2100): 인류 최초의 법전으로, 함무라비보다 보복보다는 금전적 배상을 중시했습니다.
• 리핏-이쉬타르 법전 (BC 1860) & 에슈눈나 법전 (BC 1770): 함무라비는 이들 선대 법전의 형식을 계승하되, 제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처벌의 강도를 높이고 내용을 훨씬 세밀하게 다듬었습니다.
6.2. '바벨과 비벨(Babel und Bibel)' 논쟁과 모세 율법
1902년, 독일의 아시리아학자 프리드리히 델리치(Friedrich Delitzsch)가 카이저 빌헬름 2세 앞에서 행한 강연은 기독교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모세 율법(탈출기 언약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을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유사성: "눈에는 눈"이라는 표현, 소가 사람을 들이받았을 때의 처벌 규정 등은 두 문헌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 차이점: 함무라비 법전은 국가와 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세속법인 반면, 모세 율법은 하나님과의 계약과 공동체적 성결을 강조하는 종교법적 성격이 강합니다.
• 최근 견해: 2010년 이스라엘 하초르(Hazor)에서 함무라비 법전 계열의 쐐기문자 토판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이 법률 체계가 고대 근동 전역에 공유된 '공통의 법 문화적 자산(Common Semitic heritage)'이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함무라비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의 법정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7. 현대적 유산: 미국 연방 대법원과 법치주의의 상징
7.1. 위대한 입법자로서의 현현
미국 연방 대법원 건물 남쪽 프리즈(Frieze)에는 인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법 제정자들의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함무라비는 모세, 솔론, 나폴레옹 등과 함께 당당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하원 회의장 대리석 부조에는 모세를 중심으로 한 23인의 위대한 입법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함무라비를 '문명적 질서의 창시자'로 예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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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즈에 모세 옆에 있는 함무라비. |
7.2. 권력의 제한과 책임 있는 통치
함무라비가 현대 법치주의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법의 공개성'과 '권력의 자기 제한'입니다.
법전 제5조에서 판사가 자신의 판결을 바꾸면 처벌받는다는 규정은, 사법권이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사법 독립'의 초기적 맹아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제23-24조에서 범인을 잡지 못한 강도 사건에 대해 지역 관료와 지자체가 배상 책임을 지게 한 것은, 국가의 본질적인 임무가 '치안과 국민 보호'에 있음을 4,000년 전에 이미 선포한 것입니다.
7.3. 사회복지법의 정신적 기원
그의 법전이 단순히 가혹한 처벌만 담고 있었다면 오늘날 이토록 높게 평가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흉작 시 이자를 탕감해주는 제48조나, 채무 노예를 3년 후 해방하게 한 제117조, 고아가 부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보호한 규정 등은 현대 사회복지법과 아동 보호법의 원형을 제시합니다.
정의란 곧 "약자가 압제당하지 않는 상태"라는 그의 철학은 현대 인권 사상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함무라비 법전이 인류에게 남긴 최종적인 교훈을 정리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겠습니다.
8. 4,000년을 관통하는 정의의 목소리
함무라비 법전은 인류가 야만의 시대를 지나 문명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무거운 돌덩이에 새겨진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라,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포 속에 안전을 심어주려 했던 인간 이성의 찬란한 승리였습니다.
본 글을 통해 확인했듯이, 함무라비 법전은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인류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첫째, 문자화된 법의 지배: 왕의 변덕이 아닌 기록된 법이 통치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둘째, 공정한 거래와 책임: 상업과 전문직의 책임을 명시하여 신뢰 중심의 경제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셋째, 사회적 안전망: 재난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약자들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하려 했습니다.
넷째, 보편적 사법 정의: '눈에는 눈'이라는 원칙을 통해 보복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고 국가적 정의를 수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만 페이지의 법전과 고도로 발달한 사법 시스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4,000년 전 함무라비가 제시했던 "정직한 도량형과 책임 있는 판결"이라는 대답보다 더 명확한 것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인류 문명이 지속되는 한, 함무라비 법전이 가지는 고전적 가치는 변치 않을 것이며,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지 못하게 하라"는 그 고결한 외침은 영원히 법치주의의 심장부를 울리는 정의의 목소리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고대 근동 사료와 현대 역사·법제사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다만 함무라비 법전의 일부 조항은 훼손·결손되어 있으며, 연대·신격 해석 등에는 학계 내 다양한 견해가 공존합니다.
본문에서는 통설을 중심으로 서술하되, 논쟁적이거나 추정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맥락에 따라 해석했습니다.
혹시 사실 오류, 누락된 관점, 추가로 참고할 만한 사료가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세요.
또한 본문에 대한 비판·보완·확장 토론 역시 환영합니다.
이 글은 ‘완결된 결론’이 아니라, 함께 사유하기 위한 열린 기록입니다.
The Code of Hammurabi, created in the mid-18th century BCE, represents one of humanity’s earliest and most complete attempts to establish the rule of law through written statutes.
Although not the first legal code, it stands out for its systematic structure, detailed provisions, and explicit claim that law exists to prevent the strong from oppressing the weak.
Emerging during Babylon’s rise under King Hammurabi, the code functioned as both a legal framework and a political instrument.
By inscribing 282 laws on a monumental basalt stele and displaying it publicly, Hammurabi transformed royal authority into an enduring, visible order grounded in divine legitimacy, symbolized by the sun god Shamash granting the law to the king.
The laws regulate judicial procedure, agriculture, commerce, family relations, and professional responsibility, reflecting a complex urban society.
While the principle of “an eye for an eye” appears harsh today, it originally served to limit excessive retaliation and centralize punishment under state authority.
Provisions on debt relief, slavery limits, and women’s property rights reveal an early concern for social stability and vulnerable groups.
Rediscovered in 1901 at Susa, the code reshaped modern understanding of ancient law and influenced later legal traditions.
Its legacy endures as a foundational milestone in legal transparency, accountability, and the enduring pursuit of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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