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시대에 이성을 외치다: 피에르 아벨라르, 중세 지성을 뒤흔든 비극적 서사시 (Pierre Abélard)


불꽃의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 이성과 사랑, 신념의 대서사시


페르 라셰즈의 두 연인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 한가운데, 고딕 양식의 작은 사원 아래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연인의 무덤이 있다. 

바로 12세기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와 그의 영원한 사랑 엘로이즈이다. 

아홉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이들의 비극적이면서도 불멸하는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묘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경건하게 멈추게 한다. 

무덤 주위에는 지금도 연인들이 남기고 간 꽃과 편지들이 마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담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아벨라르는 중세 유럽의 지성계를 뒤흔든 위대한 철학자이자, 굳건한 신앙의 시대에 감히 '이성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혁명가였다. 

이 글은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을 넘어, 중세의 지성을 뒤흔든 한 위대한 사상가의 불꽃같았던 삶과 사상의 정수를 탐색하는 지적 순례가 될 것이다.


제1부: 반항하는 천재의 등장

1장: 칼 대신 펜을 선택한 기사의 아들

피에르 아벨라르는 1079년, 프랑스 르팔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앞에는 기사로서의 영광과 가문의 상속이라는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운명처럼 정해진 칼의 길이 아닌, 사유의 미로를 탐험하는 펜의 길을 선택했다. 

기사의 길을 포기하고 철학자가 되겠다는 그의 결단은 가문의 명예와 상속을 무엇보다 중시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그의 성격은 그의 선택만큼이나 비범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날카로운 재치와 신랄한 독설, 그리고 무한한 오만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논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고, 그의 불타는 지성 앞에서는 낡은 권위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피에르 아벨라르


2장: 파리를 뒤흔든 지성의 결투

청년 아벨라르는 파리로 향했고,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기욤 드 샹포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노트르담 대성당 부속 학교의 강의실은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든 학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가 자욱한 먼지를 드러내고, 촛농과 땀, 낡은 양피지 냄새가 뒤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도 젊은 지성들의 열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그 열기 속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곧 스승의 핵심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파리 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다. 

이들의 대결을 촉발시킨 것은 중세 철학의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보편 논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불꽃 튀는 지성의 결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기욤 드 샹포가 플라톤의 그림자를 밟으며 선언했다. 

"보편(普遍)은 개별자들에 앞서 실재하는 영원한 본질이오! 우리 눈에 보이는 개별 인간들을 넘어서, 저 영원한 세계에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네."

그러자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칼날을 휘두르듯 맞받아쳤다. 

"스승님,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개별자들을 묶는 '이름'일 뿐이며, 우리 정신이 부여한 개념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개별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하나의 단어일 뿐, '인간성'이라는 실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가 스승을 이긴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낡은 사유 방식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으며, 파리에 변증법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철학 초심자를 위해 '보편 논쟁'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보편 논쟁(Universalienstreit: 보편적 개념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 우리 일상과도 맞닿아 있다. 


실재론(Realism) - 스승 기욤의 입장: "붕어빵 틀은 진짜 존재한다"

기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구체적인 사물보다, 그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틀'이 훨씬 더 진짜라고 믿었다.

논리: "자네 눈앞의 '사과'는 언젠가 썩어 없어지지만, '사과라는 본질'은 영원히 변치 않네. 개별적인 인간(철수, 영희)은 죽어도 '인간성'이라는 실체는 하늘 위에 실재하는 법이지."

쉬운 비유: 세상에 수천 개의 붕어빵이 있어도, 그 빵들을 찍어낸 '무쇠 틀'은 단 하나뿐이며 실제로 존재한다. 

빵(개별자)은 먹으면 사라지지만, 틀(보편)은 남는 것과 같다.

결론: 보편(개념)은 사물에 앞서 실제로 존재한다!


유명론(Nominalism) - 제자 아벨라르의 입장: "이름은 그저 이름표일 뿐이다"

반면 아벨라르는 보편이란 건 인간이 편의를 위해 붙인 '이름(Nomen)'일 뿐이라고 반격했다.

논리: "스승님, '인간성'이라는 게 따로 돌아다니는 걸 보셨습니까? 실제로 존재하는 건 눈앞의 철수와 영희뿐입니다. '인간'이라는 말은 그들의 공통점을 묶어 부르기 위해 우리가 만든 소리에 불과합니다."

쉬운 비유: '과일'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나요? 사과, 배, 포도는 있지만 '과일'이라는 물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들을 한꺼번에 담으려고 만든 '바구니 이름표'일 뿐이죠.

결론: 보편은 실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이 지성의 결투 한 번으로, 아벨라르라는 이름은 파리의 모든 학도와 스승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고, 그의 강의실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젊은 지성들로 터져나갈 듯했다.


아벨라르의 오만함은 단순히 논리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 안셀무스(라온의 안셀무스)의 강의를 듣고는 "아무런 알맹이 없는 구름 잡는 소리"라며 비웃었다. 

분노한 학생들이 "그럼 네가 직접 해보라"고 다그치자, 아벨라르는 코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성경에서 가장 어렵다는 에제키엘서를 나에게 주시오. 딱 일주일 뒤에 해설 강의를 열겠소."


신학을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배운 적 없던 청년의 이 황당한 선언에 모두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일주일 뒤, 강의실은 마법에 걸린 듯했다. 

아벨라르는 마치 평생 신학만 연구한 사람처럼 가장 난해한 구절들을 칼날 같은 논리로 해체해 나갔다.

학생들은 경악했고, 질투에 눈이 먼 스승 안셀무스는 결국 그를 학교에서 쫓아냈다. 

이 사건은 '이단아 아벨라르'의 서막이자, 파리가 그를 주목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2부: 하늘을 뒤흔든 사랑

3장: 운명적 만남, 엘로이즈

1115년경, 파리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30대 후반의 교수 아벨라르는 그의 인생을 바꿀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엘로이즈,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원인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다. 

당시 17세였던 엘로이즈는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파리에서 가장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녀의 지성에 매료된 아벨라르는 숙부 퓔베르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들의 수업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니었다. 

아벨라르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 『내 불행의 내력』(Historia Calamitatum)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책을 펼쳐 놓았으나, 철학보다는 사랑의 말을 더 많이 속삭였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서로의 지성을 자극하고 완성시키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사랑의 밀어를 넘어, 지성과 감성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치열한 교감의 장이었다.


엘로이즈: "선생님의 논리학은 모든 것을 명쾌하게 가르지만, 오비디우스의 말처럼 '모든 연인은 병사(militat omnis amans)'라 했습니다.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마음의 전쟁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벨라르: "그대의 지성은 나의 가장 날카로운 논증마저 무디게 만드는 힘을 가졌소. 그대의 눈빛은 나의 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대의 질문은 나의 철학에 영혼을 불어넣는구려. 그대 없이는 나의 학문도, 나의 노래도 미완성일 뿐이오."


아벨라르는 논리학자였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뜨거운 시인이었다. 

그는 엘로이즈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라틴어 시에 담아 노래로 만들었다. 

놀랍게도 이 노래들은 파리의 거리로 흘러 나갔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내가 만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소. 그들은 노래의 주인공이 그대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 아름다운 가사에 취해 있었지."


아벨라르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 시절을 회상하며 은근한 자기자랑을 섞어 고백한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연애 사실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자신이 만든 사랑 노래가 파리 전역에 유행하는 것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 오만한 천재도 사랑 앞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어 하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19세기 판화


4장: 금지된 비밀

열정적인 사랑은 곧 결실을 보았다. 

엘로이즈가 임신을 한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그녀는 아벨라르의 고향인 브르타뉴로 피신해 아들 '아스트롤라베'를 낳았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숙부 퓔베르는 격노했지만, 아벨라르는 비밀 결혼을 제안하며 그를 달랬다.

하지만 이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퓔베르는 약속을 어기고 결혼 사실을 사람들에게 떠벌렸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학문적 명예에 흠이 갈 것을 염려하여, 사람들 앞에서 결혼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이로 인해 숙부의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5장: 잔인한 밤의 비극

아벨라르는 퓔베르의 학대를 피해 엘로이즈를 그녀가 자랐던 아르장퇴유 수녀원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인 오해를 낳았다. 

퓔베르는 아벨라르가 자신의 조카를 수녀로 만들어 버리려 한다고 생각했고, 가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날 밤, 파리의 뒷골목은 비에 젖은 돌이 등불 빛을 삼키고 있었고, 시궁창의 악취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퓔베르가 고용한 자들이 아벨라르의 숙소를 급습했다. 

정적을 깬 것은 육중한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뒤이은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야만적인 폭력 앞에 중세 최고의 지성은 무너졌다. 

그들은 아벨라르를 거세했다. 

이 끔찍한 사건은 한 철학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의 자존심과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육체적 거세는 한 인간으로서의 아벨라르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지성을 외부 세계의 명예가 아닌,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성소로 향하게 만드는 잔인한 계기가 되었다.

육체적 거세는 한 인간으로서의 아벨라르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철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간의 외면적 행위가 아닌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거세당하는 아벨라르


제3부: 상처 입은 사상가의 길

6장: 세상에 등 떠밀린 수도사

비극적인 그 밤 이후, 파리의 찬란했던 태양은 졌다. 

한때 수천 명의 학도가 우러러보던 지성의 아이콘, 피에르 아벨라르는 이제 없었다. 

거세라는 잔혹한 형벌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하늘을 찌를 듯했던 그의 오만함과 남성성마저 도려냈다. 

세상의 조롱 섞인 시선과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유폐하기로 결심한다.

1119년, 그는 화려한 교수복을 벗어 던지고 생드니 수도원(Abbey of Saint-Denis)의 육중한 철문 뒤로 숨어들었다. 

연인 엘로이즈 역시 그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아르장퇴유 수녀원의 검은 베일 속으로 자신을 가두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냉정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는 그녀에게 즉시 수녀가 될 것을 강요했고, 수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미움이 아니라 '자격지심'이었다. 

거세된 육체로 그녀 앞에 설 자신이 없었던 아벨라르는 고결한 종교적 결단이라는 핑계 뒤로 도망친 셈이었다. 

훗날 엘로이즈가 보낸 절규 섞인 편지를 받고서야 그는 떨리는 펜을 들었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내가 침묵했던 것은 그대를 잊어서가 아니라, 그대에게 남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라오."


수녀생활을 시작하는 엘로이즈


논리로 세상을 이겼던 남자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초라한 상처를 들키기 싫어하는 유약한 인간으로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신성한 안식을 기대했던 수도원은 그에게 또 다른 지옥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의 강력한 비호를 받던 생드니 수도원은 기도의 향기가 아닌 탐욕과 부패의 악취로 가득했다. 

수도사들은 성경 대신 장부를 뒤졌고, 금욕의 계율 대신 은밀한 술판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거세된 몸으로 깊은 영적 고독에 침잠해 있던 아벨라르에게, 이들의 위선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상처 입은 늑대는 다시 어금니를 드러냈다.


"당신들이 입고 있는 이 거친 수도복이 부끄럽지도 않소? 입으로는 찬양을 내뱉으면서 배는 세속의 기름진 고기로 채우다니, 이곳이 성소인가 아니면 시정잡배의 소굴인가!"


아벨라르의 독설은 예전보다 더 날카롭고 서늘해져 있었다. 

그는 수도원의 정체성마저 정면으로 공격했다. 

생드니 수도원이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오'가 사실은 그들이 믿는 인물과 다른 사람이라는 역사적 증거를 논리학으로 증명해 버린 것이다. 

이는 수도원의 존립 근거를 뿌리째 흔드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동료 수도사들에게 아벨라르는 이제 은혜를 모르는 '재앙'이자 '이단자'였다. 

밤마다 그의 숙소 밖에서는 살벌한 저주가 들끓었고, 심지어 그를 독살하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아벨라르는 도망치듯 생드니를 탈출했다. 

그가 향한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벌판, 샹파뉴 지역의 외딴 강가였다. 

그는 그곳에서 직접 진흙을 이기고 갈대를 엮어 작은 오두막을 지었다. 

그리고 그 보잘것없는 거처에 '파라클레(Paraclete: 위로자 성령)'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상 모든 권위와 위선으로부터 버림받은 그가 오직 신의 위로만을 갈구하며 세운 고립된 성소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천재 아벨라르가 광야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파리의 안락한 강의실을 버린 수백 명의 학생이 떼를 지어 그 황무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승의 강의를 듣기 위해 직접 텐트를 치고 거친 빵을 나누어 먹으며 자급자족했다. 

도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철학자가, 아무것도 없는 벌판 위에 오직 지성만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광야의 생활은 처절했다. 

한때 파리의 귀족적인 생활에 익숙했던 학도들이 진흙 범벅이 된 손으로 땅을 파고 갈대를 엮는 모습은 기이한 장관이었다. 

아벨라르는 그들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은 수치심을 피해 도망쳐온 죄인인데, 제자들은 오직 자신의 지식을 갈구하며 이 척박한 땅까지 쫓아온 것이다.

밤이 되면 스승과 제자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화려한 강단도, 권위적인 사제복도 없었다. 

아벨라르는 그곳에서 비로소 '교수'가 아닌 '스승'이 되었다. 

그는 제자들이 가져온 거친 빵 한 조각을 나누며, 인간의 고통과 신의 침묵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하기 시작했다. 

진흙 바닥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들을 보며 아벨라르는 깨달았다. 

위선적인 수도원도, 권위적인 교회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제자들이 가져온 수많은 성인들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목격하며,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의심과 논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광야의 고독과 열기 속에서, 중세 사유의 문법을 완전히 뒤바꿀 거대한 폭탄이 제조되기 시작했다.


7장: '예, 그리고 아니오': 새로운 학문의 탄생

고난 속에서도 그의 학문적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중세 학문의 흐름을 바꾼 혁신적인 저서 『예, 그리고 아니오』(Sic et Non)를 집필한다. 

이 방법론은 단순한 학문적 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승 기욤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생드니 수도원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며, 맹목적인 믿음에 회의를 품게 된 아벨라르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 책의 방법론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다.


1. 하나의 신학적 질문을 제시한다. (예: 신앙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2.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Sic)"고 답하는 교부(敎父)들의 문헌을 나열한다.

3. 바로 이어서 "그렇지 않다(Non)"고 답하는 교부들의 상반된 견해를 나란히 제시한다.


아벨라르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독자 스스로가 권위자들의 모순된 주장 사이에서 의심하고, 탐구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진리를 찾도록 유도했다. 

이는 성서와 교부의 권위를 절대시하던 중세의 학문 풍토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지혜의 첫 번째 열쇠는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를 파악한다."


8장: 철학자의 윤리학: 진실은 마음에 있다

자신의 '의도'는 사랑이었으나 세상은 그의 '행위'를 보고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이 끔찍한 부조리 속에서 아벨라르는 도덕성의 진정한 소재지를 향한 필사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그의 윤리학 저서 『너 자신을 알라』(Scito Te Ipsum)이다. 

세상의 심판이 얼마나 피상적일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겪은 그는,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외부가 아닌 내부, 즉 '마음'에서 찾았다.


• 핵심 주장: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그 행위의 결과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내면적인 '의도(Intention)'와 '동의(Consent)'에 달려 있다.

• 죄란 무엇인가?: 죄는 나쁜 행동 자체가 아니다. 

진정한 죄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행하겠다고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욕망이나 악한 생각 그 자체는 죄가 아니며, 그것에 동의하는 순간 비로소 죄가 성립된다.

• 구체적 사례: 분노한 주인에게 쫓기던 하인이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인을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행위(살인)와 결과(주인의 죽음)는 분명 나쁘다. 

하지만 아벨라르는 하인의 '의도'는 주인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었기에 악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의 행동은 비난받을지언정, 그의 영혼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의도와 동의의 차이: 아벨라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도덕적 비난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동의'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진정한 도덕적 칭찬은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 

오직 '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카리타스, Caritas)에서 비롯된 선한 의도'만이 진정으로 칭찬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인간 내면의 순수성을 윤리의 중심으로 가져온 아벨라르의 사상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것이었고, 그의 명성을 시기하던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제4부: 마지막 투쟁

9장: 클레르보의 사자, 베르나르

아벨라르의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다. 

그는 바로 당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였다. 

두 사람은 12세기 지성계를 대표하는 거인이었지만,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구분
피에르 아벨라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진리 탐구 방식
이성적 분석과 변증법 (의심과 질문)
신앙과 신비적 체험 (믿음과 기도)
신학적 태도
신앙의 신비를 이성으로 이해하려 함
이성으로 신앙의 신비를 분석하는 것을 교만으로 여김
성격
지적이고 논쟁적이며 오만함
카리스마 있고 신념이 강하며 단호함


베르나르에게 아벨라르의 방식은 신앙의 신비를 인간의 오만한 이성으로 해부하려는 위험천만한 이단 행위로 비쳤다.


10장: 상스에서의 대결

1140년 6월, 프랑스 상스(Sens)의 대성당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터질 듯했다. 

국왕 루이 7세와 수많은 고위 성직자, 그리고 구름처럼 몰려든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세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지성의 격돌이 예고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60세의 노련한 철학자 아벨라르가, 다른 한쪽에는 당대 유럽의 정신적 지배자이자 '클레르보의 사자'라 불리는 베르나르가 서 있었다.


아벨라르는 당당했다. 

그는 자신의 논리가 정당하다면 베르나르와의 공개 토론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평생 이성을 믿어온 철학자의 순진한 확신이었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준비한 것은 '토론'이 아니라 '처형'이었다.


대결 전날 밤, 성당의 어두운 밀실에서는 비열한 작전이 모의되었다. 

베르나르는 주교들을 미리 소집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며 아벨라르의 저서에서 뽑아낸 19개의 구절을 '이단'으로 낙인찍도록 선동했다. 

재판관들은 술기운과 베르나르의 카리스마에 눌려, 피고인의 변론도 듣기 전에 이미 유죄 판결을 확정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벨라르가 당당한 걸음으로 회의장에 입장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정적과 적대감이었다. 

토론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아벨라르의 눈을 매섭게 쏘아보며, 미리 작성된 이단 혐의 목록을 마치 선고문처럼 낭독하기 시작했다.


"피에르 아벨라르, 그대는 신앙의 신비를 가련한 인간의 이성으로 해부하려 했으며, 거룩한 삼위일체를 논리학의 장난감으로 전락시켰다. 이 19가지 조항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철회하는가!"


아벨라르는 경악했다. 

이것은 학자 간의 대화가 아니라 굶주린 늑대들이 먹잇감을 에워싼 형국이었다. 

주교들은 베르나르의 선동에 동조하며 "이단이다!", "불태워라!"라고 고함을 질렀다. 

아벨라르는 자신을 둘러싼 그 광기 어린 눈빛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는 깨달았다. 

이곳에 이성이 설 자리는 없으며, 어떤 논리적 설명도 귀를 막은 자들에게는 소용없다는 사실을.

그는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수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떼었다.


"나는 로마 교황에게 직접 상소하겠소."


아벨라르는 재판관들의 당혹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고개를 꼿꼿이 든 채 회의장을 걸어 나갔다. 

그것은 패배자의 도망이 아니라, 이성을 포기한 광신에 대한 철학자의 마지막 저항이자 고결한 침묵이었다. 

대성당 밖으로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이단자!"라는 저주의 함성이 빗물처럼 쏟아졌지만, 아벨라르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성을 향한 마지막 신뢰마저 무너진 순간, 만신창이가 된 이 노철학자는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로마를 향해 고독한 여정을 시작했다.


11장: 클뤼니의 황혼

상스에서의 굴욕적인 재판 이후, 아벨라르는 로마로 향하는 길 위에서 자신의 영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으려던 그에게 도착한 소식은 치명적이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아벨라르의 변론을 들어보기도 전에 그를 '이단자'로 낙인찍었고, 그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제 유럽 대륙 그 어디에도 그가 설 땅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이 노철학자를 거둔 것은 '유럽의 양심'이라 불리던 클뤼니 수도원(Abbey of Cluny)의 원장, 존자 피에르(Peter the Venerable)였다. 

피에르는 베르나르의 서슬 퍼런 서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바람에 꺾인 이 거대한 거목을 수도원의 가장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피에르 아벨라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소. 이곳에서 당신은 신의 종이자 나의 형제로 머무르게 될 것이오."


2025년의 클루니 수도원


피에르의 배려 속에서 아벨라르는 생애 처음으로 '평온'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평생을 날 선 논리와 독설로 무장하며 적을 만들었던 그는, 이제 클뤼니의 도서관에서 조용히 양피지를 넘기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한때 자신을 이단으로 몰았던 숙적 베르나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승리도 패배도 의미가 없어진 황혼의 시간, 두 거인은 비로소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아벨라르의 마지막 나날은 수도사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한때 파리를 호령하던 그 오만했던 천재는 이제 가장 겸손한 수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겼고, 화려한 수사학 대신 깊은 침묵으로 기도했다. 

제자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논리학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안식을 찾았노라."


1142년 4월 21일, 성 마르셀 수도원의 작은 방. 

창밖으로 들려오는 수도사들의 은은한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아벨라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생을 이성과 신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불꽃 속에서 치열하게 타올랐던 영혼이 비로소 고요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부고를 들은 존자 피에르는 엘로이즈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가 주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제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처에서

아벨라르가 세상을 떠나자, 엘로이즈는 그의 유해를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파라클레 수도원으로 옮겨와 곁을 지켰다. 

그리고 20여 년 후, 그녀 역시 그의 곁에 나란히 묻혔다. 

혁명과 풍파를 거치며 흩어졌던 두 사람의 유해는 마침내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함께 안치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헌정 명판


오늘날 그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아벨라르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철학적 유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신학에 적용하여 스콜라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신앙의 시대에 이성의 역할을 과감하게 옹호한 선구자였다.

• 윤리적 유산: 행위의 결과를 넘어 내면의 동기와 의도를 중시한 그의 윤리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 법철학과 윤리 사상에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 문화적 유산: 그의 학문적 성취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엘로이즈와의 사랑 이야기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원형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피에르 아벨라르의 삶은 이성과 사랑, 그리고 신념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불꽃 사이에서 고뇌하고 투쟁했던 한 위대한 인간의 대서사시였다.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글은 피에르 아벨라르(Petrus Abaelardus, 1079–1142)와 엘로이즈(Héloïse)를 둘러싼 중세 문헌 전통(아벨라르의 자서전 『내 불행의 내력』, 두 사람의 서간, 동시대 교회 기록과 후대 연대기)을 바탕으로,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화·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서사형 글입니다.

인물의 감정선, 현장 묘사, 대사의 상당 부분은 기록에 직접 남아 있지 않거나 전거가 단편적인 경우가 많아, 사실의 뼈대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문학적으로 보강했습니다. 

동일 사건을 두고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논쟁), 전승 성격이 강한 일화는 (전승)으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중세 인물과 사건은 번역·전승 과정에서 세부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인용 문구·연대·지명·교회 회의 결정 등 핵심 사실을 바탕으로 추가 확인을 권합니다.


Pierre Abelard (1079–1142), a brilliant and combative Parisian teacher, rose by challenging leading masters in logic and theology. 

He fell in love with his gifted student Heloise; their secret affair led to a child and a hidden marriage. 

Her uncle Fulbert sought revenge, and Abelard was brutally castrated, driving both into monastic life. 

From exile Abelard rebuilt his school at the Paraclete and wrote works that promoted doubt, dialectical inquiry, and an ethics centered on intention and consent. 

His rational approach provoked fierce opposition from Bernard of Clairvaux; at the Council of Sens (1140) he was condemned as a heretic without fair debate. 

Granted refuge at Cluny by Peter the Venerable, Abelard reconciled with his enemies and died in peace; Heloise later laid him to rest beside her, their story enduring as love, intellect, and faith in confl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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