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황 요한나 전설: 허구로 밝혀진 교황,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이야기 (The Myth of Pope Joan)


여교황 요한나: 전설의 탄생, 역사적 논쟁, 그리고 문화적 변용


1. 서론

여교황 요한나(Pope Joan) 전설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와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논란과 매혹의 대상이 되어 온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전설의 핵심은 9세기경, 비범한 지성과 학식을 갖춘 한 여성이 남자로 위장하여 교회의 위계를 차례로 밟아 마침내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는 서사입니다. 

그러나 수년간의 성공적인 통치 이후, 성대한 교황 행렬 도중 갑작스러운 진통과 함께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습니다.


본 글은 이처럼 오랜 생명력을 지녀온 여교황 요한나 전설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 전설이 처음 등장한 13세기의 기록을 통해 그 기원과 중세 시대의 확산 과정을 추적합니다. 

둘째,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격화된 역사적 진실성 논쟁을 찬반 양측의 근거와 함께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학계에서 허구로 결론 내려진 이후에도 전설이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여교황 요한나의 이야기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각 시대의 사회적 불안과 이념, 그리고 문화적 열망을 비추는 거울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밝히는 데 중점을 둘 것입니다.


2. 전설의 기원과 중세 시대의 확산 (Origin and Medieval Proliferation of the Legend)

여교황 요한나 전설은 9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약 4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합니다. 

이 상당한 시간적 간극은 전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는 전설이 동시대의 목격담이나 기록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특정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탄생하고 가공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본 장에서는 전설의 초기 형태와 그것이 중세 사회에서 어떻게 의심의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로 수용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2.1. 최초의 기록과 서사의 형성

여교황 전설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초 도미니코회 수사였던 장 드 마이(Jean de Mailly)의 연대기에서 발견됩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1099년경 한 여성이 남장을 하고 교황의 자리에 올랐으나 말을 타던 중 아이를 낳으면서 정체가 드러났고,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초기 버전에서 여교황은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고, 배경 역시 11세기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유럽 전역에 퍼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같은 세기 후반, 또 다른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교황청 사제였던 마르틴 폰 트로파우(Martin of Opava)의 저서 『교황과 황제 연대기』(Chronicon Pontificum et Imperatorum)를 통해서였습니다. 

마르틴의 버전이 표준 서사로 자리 잡은 이유는, 그가 모호한 소문을 검증 가능한 역사 기록처럼 보이게 만드는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을 추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한나에게 요하네스 앙글리쿠스(Johannes Anglicus) 라는 이름, 9세기라는 시대, 그리고 아테네에서 연인을 따라 학문을 익혔다는 배경 이야기를 부여했습니다. 

이러한 구체성은 이야기를 훨씬 더 설득력 있고 쉽게 전파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여교황 전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요안나 교황의 출산을 묘사한 삽화


2.2. 중세 시대의 수용과 대중적 확신

13세기 후반부터 여교황 이야기는 단순한 일화를 넘어 중세 사회 전반에서 역사적 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광범위한 수용은 다양한 분야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야
주요 사례
내용
종교적 수용
도미니코회의 설교
교회의 타락과 인간의 나약함을 경고하는 교훈적 예시(exemplum)로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학술적 기록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 (Bartolomeo Platina)
1479년 교황청 도서관장이었던 플라티나는 『교황의 생애』에 이야기를 수록하면서도, "이 이야기는 저속하게 전해지나, 그 출처는 매우 불확실하고 모호하다"고 언급하며 학자적 유보를 드러냈습니다.
문학적 확산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53년에 저술한 『유명한 여성들에 관하여』에서 99번째 유명 여성으로 요한나를 포함시켰습니다.
공공 예술
시에나 대성당
1400년경, 역대 교황들의 흉상들 사이에 "Johannes VIII, Foemina de Anglia" (요한 8세, 잉글랜드 출신의 여성)라는 이름의 흉상을 제작하여 설치했습니다.

이처럼 종교, 학술, 문학, 예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여교황의 존재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중세인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이 보편적 믿음은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하며 치열한 진실 공방의 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3.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쟁 (The Debate Over Historical Truth)

중세 시대 동안 역사적 사실로 굳건히 자리 잡았던 여교황 전설은, 16세기 종교개혁의 폭풍 속에서 그 위상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에게는 교황권의 부패를 상징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고, 가톨릭에게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치욕적인 오점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설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첨예한 이념 대립의 중심에서 치열한 역사적 진실 공방의 대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본 장에서는 전설의 신빙성을 둘러싼 찬반 양론을 본격적으로 검토합니다.


3.1. 전설을 뒷받침하는 주장과 근거

여교황의 실존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여러 정황적 증거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현대 역사학계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 세다 스테르코라리아 (Sedia Stercoraria): 중앙에 구멍이 뚫린 이 의자는 새로 선출된 교황의 성별을 확인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젊은 부제가 의자 밑으로 손을 넣어 새 교황의 고환 유무를 확인한 뒤 "Duos habet et bene pendentes"(두 개가 있으며 잘 달려 있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의자가 실제로는 고대 로마 시대의 비데나 산파용 의자였으며, 교황의 대관식이라는 장시간의 의례 도중 생리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용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합니다.

• '기피하는 길' (Shunned Street): 요한나가 출산했다고 전해지는 로마의 특정 길(콜로세움과 성 클레멘스 성당 사이)을 후대의 교황들이 행렬 시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일화입니다. 

이는 사건의 끔찍함을 기리기 위한 관행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행 역시 전설이 널리 퍼진 13세기 이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전설이 관행을 낳았을 뿐 관행이 전설의 진실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는 반론이 제기됩니다.

• 최근의 화폐 분석: 2018년, 고고학자 마이클 하비히트(Michael E. Habicht)는 교황 요한 8세(872-882년 재위)의 것으로 알려진 주화에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모노그램(조합문자)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연대기적으로 더 이른 형태의 모노그램이 여교황 요한나의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지폈으나, 이는 아직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견해는 아닙니다.


3.2. 역사적 반박과 연대기적 모순

이러한 정황 증거들과 달리, 여교황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는 반박 증거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결정적입니다. 

전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교황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 사이에 2년 5개월의 공백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역사 기록은 이 연대기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습니다.


1. 교황 레오 4세는 855년 7월 17일에 사망했습니다.

2. 베네딕토 3세는 거의 즉시 후임으로 선출되었으나, 대립교황 아나스타시우스와의 분쟁으로 인해 그의 공식 즉위는 855년 9월 29일까지 지연되었습니다. 

이는 두 교황 사이의 최대 공백이 수개월에 불과했음을 의미합니다.

3. 결정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타르 1세와 교황 베네딕토 3세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주화는 연대기적 쐐기를 박습니다. 

로타르 1세가 855년 9월 28일에 사망했으므로, 이 주화는 반드시 그 이전에 주조되었어야 합니다. 

이는 베네딕토 3세가 이미 교황으로 인정받았음을 확증하며, 요한나가 들어설 시간적 여지를 완벽히 차단합니다.

이 외에도 동시대 기록의 부재(특히 교황권의 적대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조차 이 스캔들을 언급하지 않은 점)와 교황 공식 목록인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에서의 누락 등은 현대 역사학계가 여교황의 실존을 허구로 결론짓는 압도적인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전설의 역사적 가치는 '사실' 여부가 아니라, '왜 만들어지고 믿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찾아야 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4. 종교개혁 시기 전설의 정치적 소비 (The Political Consumption of the Legend during the Reformation)

역사적 진실성 여부와 무관하게, 여교황 요한나 전설은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격변기를 맞아 가장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 시기 전설은 단순한 과거의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의 첨예한 이념 대립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강력한 선전 도구로 재탄생했습니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각 진영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고 소비되는 정치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4.1. 프로테스탄트의 반-가톨릭 선전 도구화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에게 여교황 요한나 전설은 교황 제도 자체의 신성성과 권위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는 절호의 무기였습니다. 

이 전설은 단순한 둔기가 아니라 교황 권위의 두 기둥인 사도적 계승(여성에 의해 단절)과 교황 무류성(기만자에 의해 훼손)을 직접 겨냥한 정교한 외과용 메스와 같았습니다. 

특히 교황 행렬 중 아이를 낳는 여성의 이미지는 로마 교회의 부패를 감각적이고 잊을 수 없는 은유로 제공하며, 교황청을 성경의 '바빌론의 음녀' 와 연결시키는 완벽한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쿡(Alexander Cooke)이 저술한 『여교황 요한나: 프로테스탄트와 교황주의자의 대화』와 같은 책들은 이러한 선전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렸습니다.


바빌론의 음녀로 묘사된 여교황 요한나


4.2. 가톨릭 교회의 대응과 전설의 학문적 해체

프로테스탄트의 맹렬한 공격에 직면한 가톨릭 교회는 수세기에 걸쳐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여교황 전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16세기 가톨릭 학자 오노프리오 판비니오(Onofrio Panvinio)는 이 전설이 실제로는 10세기 교황 요한 12세가 여장부 애인에게 휘둘렸던 사건에서 와전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며 역사적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교회의 대응이 정점에 달한 것은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여교황 전설을 공식적으로 거짓으로 선언하고 시에나 대성당에 있던 흉상을 교황 자카리아(Pope Zachary) 의 것으로 수정하라고 명령한 사건입니다. 

이는 전설을 교회의 공식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교황 전설에 대한 결정타는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1647년,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학자 다비드 블론델(David Blondel)은 철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여교황 전설의 연대기적 모순과 역사적 근거 부재를 논증하며 전설을 "효과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이념적 공세를 넘어 학문적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전설이 허구임을 입증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 시기는 여교황 전설이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시대의 이념적 필요에 따라 그 의미가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하고 소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5. 현대의 문화적 재현과 재해석 (Modern Cultural Representation and Reinterpretation)

역사학계에서 허구로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교황 요한나의 이야기는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으며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20세기 후반 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그녀의 이야기는 억압적인 가부장제에 도전한 선구적인 여성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요한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닌, 현대적 가치를 담아내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5.1. 문학과 영화 속의 여교황

여교황 전설은 현대 작가와 영화감독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소설: 엠마누엘 로이데스(Emmanuel Rhoides)의 1866년 소설 『여교황 요안나』, 그리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도나 울포크 크로스(Donna Woolfolk Cross)의 1996년 역사 로맨스 소설 『여교황 요한나』가 대표적입니다.

• 영화: 1972년 리브 울만(Liv Ullmann) 주연의 영화와 2009년 크로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독일 영화 등이 제작되어 전설을 스크린으로 옮겼습니다.


에마누엘 로이데스의 교황 요안나 ( He papissa Ioanna ) 초판 표지


5.2.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서의 변용

이러한 현대적 해석은 전설의 중세적 목적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이 이야기는 성직자의 독신 의무를 어긴 것에 대한 경고이자 여성이 종교적 권위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근거를 강화하는 교훈적 예시(exemplum), 즉 경고의 이야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세의 '경고'가 현대의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변모한 과정은, 하나의 이야기가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현대 대중문화 속 요한나는 남성 중심의 견고한 종교 체제에 맞서 자신의 지성과 야망을 실현한 여성의 상징으로 그려지며, 현대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5.3. 전설의 지속적인 매력 분석

오늘날까지 여교황 전설이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사로잡는 이유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극적인 서사 구조: 변장, 금지된 지식 탐구, 권력의 정점 등극, 비밀스러운 사랑, 그리고 충격적인 정체 발각과 비극적 최후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강력한 드라마적 흡인력을 가집니다.

• 권위에 대한 도전: 거대하고 경직된 권력 구조의 상징인 교황청을 한 개인이, 그것도 사회적으로 가장 억압받던 존재인 여성이 기만하고 뒤흔들었다는 서사는 대중에게 통쾌함과 짜릿함을 선사합니다.

• 현대적 공감대 형성: 그녀의 이야기는 성차별이라는 구조적 억압에 맞서는 여성상에 대한 현대 페미니즘의 관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기존의 권위와 체제에 저항하는 반권위주의적 정서와도 공명하며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6. 결론 (Conclusion)

여교황 요한나의 존재는 수많은 역사적, 연대기적 반증을 통해 현대 역사학계에서 허구로 간주됩니다.

9세기 로마에 여성이 교황으로 재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전설의 세부 사항들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반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교황 요한나'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는 별개로, '여교황 요한나 전설' 그 자체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중요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 본 글의 핵심 결론입니다.

본 글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여교황 전설의 생명력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필요에 따라 그 의미를 유연하게 변용해 온 능력에 있습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중세 시대에는 교회의 타락을 경고하는 신비로운 일화이자 교훈적 예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황 제도의 신성성을 공격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이념적 무기이자, 가톨릭이 방어해야 할 치욕적인 오점으로 기능했습니다.

• 현대에 와서는 역사적 사실의 굴레를 벗어나,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한 페미니스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 속 매력적인 서사의 주인공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교황 요한나의 이야기는 9세기 교황청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창이라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만들고, 믿고, 소비했던 각 시대 사람들의 사회적 불안, 종교적 신념, 그리고 문화적 열망을 투영하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하나의 전설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얼굴로 변모하며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로서, 여교황 요한나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중세 연대기, 교황 연대표 등 공개된 사료와 현대 연구를 바탕으로, ‘여교황 요한나’ 전설이 언제·왜·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됐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구성했습니다. 

전설과 사실이 섞이기 쉬운 주제라서, 동시대 기록의 부재·연대기 모순처럼 학계에서 중요하게 보는 쟁점은 (논쟁) 취지로 구분해 서술했습니다. 

만약 특정 인명·연도·저작(책/영화) 표기에서 오탈자나 더 엄밀한 근거가 필요한 부분이 보이면, 댓글로 근거와 함께 알려주시면 빠르게 반영하겠습니다.


The legend of Pope Joan claims that a learned woman, disguised as a man, rose through the Church, became pope, and was exposed when she gave birth during a public procession. 

Most historians treat it as a medieval fabrication: the earliest accounts appear in 13th-century chronicles and were later expanded with names and a 9th-century setting by writers such as Martin of Opava. 

In the Middle Ages it spread as a moral warning and entered sermons, literature, and art.

During the Reformation it became propaganda—Protestants used it to mock papal authority, Catholics tried to refute it—until source criticism (notably David Blondel) and the documented succession from Leo IV to Benedict III left no time gap for Joan. 

Even so, modern novels and films reinvent her as a symbol of gendered exclusion and resistance, showing how a legend outlives its basis by adapting to each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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