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식 날 사라진 소년 왕, 잉글랜드 에드위그 왕과 잔혹한 스캔들의 진실 (Eadwig)


10세기의 불꽃, 에드위그 왕: 스캔들과 분열의 연대기


1. '모든 이의 연인(All-Fair)'이라 불린 소년 왕

역사의 기록은 때로 기록자의 펜 끝에 따라 한 인물을 전혀 다르게 묘사하곤 합니다. 

잉글랜드의 에드위그(Eadwig)는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로 '모든 이에게 아름다운'을 뜻하는 '판칼리(Pancali)' 혹은 '공평왕(All-Fair)'이라 불렸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외모가 매우 수려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별명이 그를 증오했던 교회 세력이 아닌, 그를 사랑했던 '일반 민중(Common people)'에 의해 붙여졌다는 사실입니다.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이 소년은 과연 교회 문헌에 기록된 것처럼 방탕한 문제아였을까요? 

아니면 거대해진 종교 세력으로부터 국왕의 권위를 되찾으려 했던 야심 찬 개혁가였을까요? 

10세기 잉글랜드의 가장 뜨거운 논쟁적 인물, 에드위그의 프로필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구분
주요 내용
이름(고대 영어)
Ēadƿig (에아드위그)
재위 기간
955년 11월 23일 ~ 959년 10월 1일
별칭
공평왕(All-Fair), 판칼리(Pancali)
가족 관계
부친 에드먼드 1세, 모친 앨프기푸(성 엘기바), 친동생 에드가(Edgar)
주요 사건
대관식 스캔들, 차터 대량 발행, 왕국 분할(957년), 혼인 무효화

어머니는 '샤프츠버리의 앨프기푸(Ælfgifu of Shaftesbury)', 아내는 '에드위그의 왕비 앨프기푸'로 이름이 같습니다.


웨식스 왕조 4대국왕 에드위그


2. 출생과 비극적인 어린 시절 (940년 ~ 955년)

에드위그는 940년경, 잉글랜드의 국틀을 잡아가던 에드먼드 1세와 앨프기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에드위그와 그의 동생 에드가가 어머니가 같은 친형제(Full brothers)라는 점입니다. 

이들의 어머니인 앨프기푸는 두 형제가 아주 어릴 때 사망하여 성녀로 추앙받았습니다.

946년, 아버지 에드먼드 1세마저 도둑 레오파에 의해 살해당하자, 너무 어렸던 형제 대신 숙부인 이드리드(Eadred)가 왕위에 오릅니다. 

에드위그는 숙부의 재위 기간 중 국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왕궁 밖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955년경, 지병으로 쇠약해진 숙부 이드리드를 지켜보며 두 형제가 은밀히 대화를 나눕니다.

에드가: "형님, 숙부님의 병세가 심각합니다. 이제 음식을 씹는 것조차 힘겨워하신다니, 왕국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에드위그: "우리가 어리다는 이유로 던스턴(Dunstan) 신부와 오다(Oda) 대주교가 국고와 권력을 모두 쥐고 흔들고 있구나. 내가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우리 가문의 권위를 되찾아올 것이다."


955년 11월, 숙부 이드리드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15세의 에드위그는 마침내 웨식스 왕조의 적통으로서 왕관을 쓰게 됩니다.


3. 대관식 스캔들: 왕관을 던져버린 소년 (956년 1월)

956년 1월, 킹스턴어폰템스에서 열린 대관식은 잉글랜드 사상 초유의 스캔들로 얼룩집니다. 

성 던스턴의 전기인 'B의 기록(Vita S. Dunstani)'에 따르면, 에드위그는 연회 도중 국왕의 의무를 저버리고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왕을 찾으러 간 던스턴이 목격한 것은 왕관을 바닥에 내팽개친 채 장차 아내가 될 앨프기푸(Ælfgifu),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에델기부(Æthelgifu) 즉, 아내, 장모와 밀회를 즐기는 소년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던스턴: "폐하! 나라의 원로들이 기다리는 성스러운 연회장을 버리고 이토록 부도덕한 여인들의 치마폭에 숨어 계시다니요! 당장 왕관을 쓰고 돌아가십시오!" 

에델기부: "무례한 수도사여! 왕께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든 그것은 국왕의 자유다. 어찌 감히 국왕의 사적인 공간에 발을 들이며 모욕을 주는가!" 

에드위그: "내 권위는 신으로부터 온 것이지, 그대들의 잔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독립적인 통치를 방해하는 너의 오만함을 반드시 대가로 치르게 하겠다!"


던스턴에게 끌려가는 에드위그


에델기부는 숙부 이드리드 시절부터 권력을 쥐고 있던 던스턴 세력을 축출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 앨프기푸와 에드위그의 결혼을 밀어붙였는데, 이는 왕실 내부의 혈연 결속을 강화해 외부 세력(교회)의 간섭을 막으려는 전략이었습니다.

훗날 교회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 에델기부는 가장 먼저 보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대주교 오다의 명령에 의해 얼굴에 뜨거운 인장으로 낙인이 찍히거나 힘줄이 끊기는 고문을 당한 뒤 아일랜드로 쫓겨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기록자들이 그녀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시각의 충돌]

• 던스턴의 주장(교회의 시각): "왕은 성스러운 대관 의무를 저버리고 육체적 욕망에 빠졌다. 이는 왕국의 도덕적 위기다."

• 에드위그의 입장(정치적 독립): "나는 숙부 시절 권력을 독점했던 구세대로부터 독립하고 싶다. 내가 선택한 여인과의 결합은 왕권 강화의 시작이다."


4. 홀로서기를 위한 몸부림: '디플로마틱 메인스트림(Diplomatic Mainstream)'

에드위그는 즉각적인 반격에 나섰습니다. 

그는 던스턴을 플랑드르로 추방하고 할머니 에드기부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분풀이가 아닌, 권력의 재편이었습니다.

그는 기존 교회 세력이 주도하던 '던스턴 B(Dunstan B)' 스타일의 차터(Charter, 국왕 문서)를 폐기했습니다. 

'던스턴 B' 차터는 화려한 종교적 수사(Proem)와 기도를 넣어 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문서였습니다. 

대신 에드위그는 국왕 중심의 실무적인 스타일인 '디플로마틱 메인스트림(Diplomatic Mainstream)'으로 회귀했습니다.

• 디플로마틱 메인스트림(Diplomatic Mainstream): 국왕의 행정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10세기 표준 문서 양식.

이전의 문서들이 화려한 금박과 '신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장황한 기도문으로 채워졌다면, 에드위그의 새로운 문서들은 차갑고 날카로웠습니다. 

종교적 미사여구를 걷어낸 자리에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땅을, 어떤 조건으로 준다'는 서슬 퍼런 국왕의 명령만이 남았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행정 시스템이 신권(神權)에서 정권(政權)으로 이동하는 결정적 장면이었습니다.


[에드위그의 전무후무한 토지 하사]

• 발행 규모: 4년의 짧은 재위 기간 중 무려 87개의 차터가 잔존함.

956년의 열풍: 특히 956년 한 해에만 약 60개의 차터를 발행. 

이는 현존하는 전체 앵글로색슨 차터의 약 5%에 달하는 엄청난 양임.

전략적 의도: 교회 세력을 배제하고, 자신에게 충성할 새로운 신흥 귀족(Laymen) 세력을 포섭하여 강력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 함.


5. 왕국의 분열: 템스강을 경계로 나뉜 형제 (957년)

에드위그의 급진적 행보는 북부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957년,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인들이 에드위그에게 등을 돌리고 동생 에드가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과거에는 이를 단순한 '반란'으로 보았으나, 최근 사학계에서는 에드가가 성년이 됨에 따라 왕위 계승자(Atheling, 애덜링)에게 영토를 떼어준 사전 합의된 행정적 분할이었을 가능성에도 주목합니다.


957년 어느 겨울밤

에드위그: "에드가, 너마저 던스턴의 손을 잡고 나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냐?" 

에드가: "형님, 이것은 칼이 아니라 민심입니다. 머시아의 귀족들과 교회는 형님의 독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합니다. 왕국을 나누어 평화를 지키는 것이 우리 가문을 위하는 길입니다."

에드위그는 분노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동생이 자신을 쫓아냈던 원수들의 '얼굴'이 되어 나타났을 때, 소년 왕의 정치는 사실상 거기서 끝이 났습니다.


구분
남쪽 (에드위그)
북쪽 (에드가)
지역
웨식스, 켄트
머시아, 노섬브리아
주요 거점
런던, 윈체스터, 캔터베리
머시아 전역
통화권(Coinage)
잉글랜드 전체(유일한 발행권)
없음 (에드위그의 동전 사용)
지위
명목상 상위 왕 (Nominal Superior)
분할 통치자


에드위그는 영토의 절반을 내주었음에도 잉글랜드 전체의 통화 발행권을 유지하며 여전히 '잉글랜드인의 왕'이라는 권위를 지켰습니다.


이드위그 왕의 동전


6. 짧은 재위의 끝과 갑작스러운 죽음 (958년 ~ 959년)

958년, 에드위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집니다. 

대주교 오다가 에드위그와 앨프기푸의 결혼이 근친혼(Consanguinity)이라는 명분으로 혼인 무효화를 강행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에드위그에게서 후사가 태어날 경우 에드가의 왕위 계승 서열이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공작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오다 대주교가 근친혼을 명분으로 혼인 무효화를 선언했을 때, 어머니 에델기부와 딸 앨프기푸는 함께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오다 대주교의 부하들이 앨프기푸를 체포하여 얼굴에 뜨거운 다리미나 인장으로 낙인(branding)을 찍어 그녀의 아름다움을 훼손했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고통을 주는 것을 넘어, 왕비로서의 자격을 영구히 박탈하려는 상징적 거세였습니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은 채로, 그녀들은 잉글랜드 밖인 아일랜드로 강제 유배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일랜드로 쫓겨났던 앨프기푸가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상처를 치료하고 몰래 귀국하여 에드위그를 만나러 오던 중, 다시 오다 대주교 측에 붙잡히고 맙니다.

이때 그녀는 더욱 잔혹하게 뒷꿈치 힘줄(Hamstring)을 끊기는 형벌을 당했고, 결국 그 고통과 과다출혈로 인해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앨프기푸가 겪은 이 참혹한 고문이 과연 실화인지, 아니면 왕권을 굴복시킨 교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잔혹한 프로파간다'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실제로 에드위그 사후, 그녀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지주로서 평온하게 여생을 보냈다는 '유언장'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강제로 헤어지게 된 에드위그는 1년 뒤인 959년 10월 1일, 윈체스터(Winchester)에서 2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민중들은 나를 '판칼리'라 부르며 사랑해주었으나, 제단 뒤의 수도사들은 나를 괴물로 그려내었구나. 아내를 빼앗기고 왕국이 나뉘었어도 나는 나의 법령(Charter)과 나의 동전(Coin)으로 이 땅을 다스렸다. 비록 나의 불꽃은 짧았으나, 누구보다 독립적인 왕으로 남고자 했음을 역사는 기억할 것인가."


7. 역사는 에드위그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에드위그 사후, 앨프기푸는 에드가 왕과 화해하여 부유한 지주로 여생을 보냈다는 기록이 그녀의 '유언장'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스캔들의 희생양이 아닌, 왕실의 일원으로 존중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에드위그 재위의 3가지 핵심 인사이트]

1. 세속 권력의 독립 선언: 종교적 수사로 가득한 '던스턴 B' 스타일을 버리고 실무적인 '디플로마틱 메인스트림'을 택해 국왕 중심의 행정 체계를 확립하려 함.

2. 신흥 엘리트 양성: 956년의 폭발적인 토지 하사는 구세력을 견제하고 자신만의 충성스러운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승부수였음.

3. 기록된 역사의 편향성: 교회 역사가들은 그를 '부도덕한 왕'으로 낙인찍었으나, 실제 민중들은 그를 '공평왕'이라 부르며 지지했음은 기록의 이면을 보게 함.


역설적이게도 에드위그를 몰아내고 왕좌에 앉은 동생 에드가(Edgar)는 훗날 '평화왕'이라 불리며 대단한 성군으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에드가가 누린 그 평화의 기틀은, 사실 형 에드위그가 956년 한 해에만 수십 건의 차터를 발행하며 포섭했던 '신흥 귀족 세력'과 그가 확립한 '실무적 행정 시스템'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형이 뿌린 씨앗을 동생이 수확한 셈입니다. 

교회 세력은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했던 동생 에드가는 '성군'으로, 자신들에게 대항했던 형 에드위그는 '파렴치한'으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에드위그는 잉글랜드 통일 초기, 강력한 지역적 정체성과 종교 권력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던 고독한 투쟁가였습니다. 

그의 짧았던 4년은 잉글랜드 왕권이 어떻게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행정적 기틀을 마련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이 글은 10세기 잉글랜드의 왕 에드위그(Eadwig)를 둘러싼 기록(교회 문헌, 왕실 문서, 후대 연대기 등)의 흐름을 바탕으로,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서사입니다.

재위, 왕국 분할, 혼인 무효화 같은 큰 사건의 골격은 역사적 사실에 기대되지만, ‘대관식 스캔들’의 디테일이나 앨프기푸(Ælfgifu) 관련 잔혹 서술처럼 자료마다 엇갈리는 부분은 전승 또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단정적 결론이 아니라 “기록의 편향과 권력 갈등”을 드러내는 서사적 해석이며,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신 분은 원문 사료와 연구서를 함께 대조해 읽어주시길 권합니다.


Eadwig, crowned young in 955, became a lightning rod for how history is written. 

Church accounts portray him as scandalous, especially after a coronation episode tied to Ælfgifu and her mother, while another reading sees a teenage king trying to curb an overmighty clerical elite. 

He expelled key church figures and shifted royal charters toward a more practical, king-centered style, issuing grants to build lay support. 

In 957 the realm split: Eadwig held the south, Edgar rose in the north. In 958 Archbishop Oda annulled Eadwig’s marriage on kinship grounds. 

Eadwig died in 959, leaving a contested legacy later eclipsed by Edgar’s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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