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잭슨이 바꾼 미국: 거부권, 뱅크 워, 그리고 눈물의 길 (Andrew Jackson)


앤드루 잭슨: 민주주의의 투사와 모순의 유산


미국의 모순을 구현한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제7대 미국 대통령으로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추적이고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됩니다. 

그의 생애와 통치 철학을 깊이 있게 다룬 존 미첨의 퓰리처상 수상작 『아메리칸 라이언(American Lion)』은 잭슨을 '미국적 성격의 최고와 최악'을 동시에 구현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는 '보통 사람'의 권익을 옹호하며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힌 투사였지만, 동시에 잔혹한 인종차별 정책을 밀어붙인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본 전기는 앤드루 잭슨의 대통령직 수행이 어떻게 현대 미국 대통령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강력한 선례를 남겼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면모와 인종차별적 정책을 추진한 모순적 측면을 균형 있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의 복합적인 유산을 통해 우리는 미국 민주주의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앤드루 잭슨 (1845년)


1. 프론티어의 전사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대통령의 탄생

앤드루 잭슨의 초기 생애와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그의 정치적 정체성과 국민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척박한 프론티어에서 태어나 독립 전쟁의 상흔을 겪으며 자란 그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1812년 전쟁에서의 군사적 성공은 그를 워싱턴 기득권층과 차별화되는 '국민의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포퓰리즘적 리더십과 강력한 대통령직 추구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흉터가 만든 아이: 왁소의 고아 

앤드루 잭슨의 몸은 그 자체로 미국의 잔혹한 개척사였습니다. 

1767년, 아일랜드계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가난한 오두막, 척박한 접경지 왁소(Waxhaws: 노스·사우스캐롤라이나 접경의 황무지)가 그의 요람이었습니다.

열세 살의 소년 잭슨은 독립 전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습니다. 

전령으로 활동하던 그는 영국군에게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한 영국 장교가 흙먼지 묻은 군화를 내밀며 명령했습니다. 

"닦아라, 꼬마야." 

잭슨은 장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거절했습니다. 

분노한 칼날이 휘둘러졌고, 잭슨의 머리와 왼손에는 깊은 흉터가 남았습니다.


코핀 소령의 군화 닦기를 거절하는 어린 앤드루 잭슨


이때 새겨진 흉터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증오의 낙인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잔인했습니다. 

두 형은 전사하거나 병사했고, 포로 수용소에서 그를 간호하던 어머니마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네 살의 잭슨은 연고 없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힘으로 법률을 공부한 그는 말 한 필과 법전 한 권을 들고 서부 테네시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도박과 결투, 땅 투기를 통해 자수성가하며 '거친 서부의 실력자'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명예에 목숨을 건 '결투의 달인' 

잭슨의 성격은 불 같았고, 자신의 명예나 아내 레이첼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100번이 넘는 결투를 치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


가장 유명한 사건은 1806년, 테네시 최고의 명사수였던 찰스 디킨슨과의 결투였습니다. 

디킨슨이 레이첼을 모욕하자 잭슨은 주저 없이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결투 당일, 잭슨은 상대의 총알이 심장을 비껴가게 하기 위해 일부러 헐렁한 코트를 입고 나갔습니다.

디킨슨의 총탄이 잭슨의 가슴에 박혔고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잭슨은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차갑게 미소 지은 뒤, 단 한 발의 총성으로 상대를 거꾸러뜨렸습니다.


이때 박힌 탄환은 평생 그의 가슴 속에 남아 그를 괴롭혔습니다. 

의사들이 탄환을 제거하자고 권할 때마다 그는 "이건 내 명예의 징표"라며 거절했습니다. 

이러한 무모할 정도의 용기와 고집은 민중들에게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 같은 사나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습니다.


전쟁의 서막: 기회를 포착한 변방의 장군 

1812년,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전운이 감돌자 잭슨은 이를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로 보았습니다. 

당시 그는 테네시주 민병대의 소장이었지만,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이 거칠고 통제 불능인 '촌구석 장군'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남부 해안을 위협하고 원주민 부족들이 영국과 결탁하여 봉기하자, 다급해진 연방 정부는 결국 잭슨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규군이 아닌, 자신처럼 거친 프론티어의 사냥꾼들과 민병대를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습니다. 

잭슨은 보급이 끊기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병사들과 똑같이 땅바닥에서 잠을 자며 행군을 강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은 그가 호두나무처럼 단단하다며 '올드 히코리(Old Hickory)'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1.1. 뉴올리언스 전투의 신화

1812년 전쟁 당시 뉴올리언스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앤드루 잭슨을 국가적 전쟁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그 소식이 대서양을 건너오기 전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기술적으로는 불필요했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영국에 맞서 거둔 통쾌한 심리적 승리였습니다. 

잭슨은 두 배나 많은 수의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민병대 위주의 병력을 이끌고 단 30분 만에 2,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의 리더십에 내재된 모순과 실용주의가 동시에 드러났습니다. 

그는 전투에 참여한 아이티 출신 자유 흑인과 크리올 흑인 병사들에게 백인 병사와 동일한 급여를 지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남부 백인 지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지만, 승리라는 지상 과제를 위해 자신의 인종적 이념마저 유보할 수 있었던 그의 냉철한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훗날 그가 보여줄 백인우월주의적 정책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뉴올리언즈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 (1815년)


전쟁 영웅을 넘어 국가의 심장으로 

뉴올리언스의 승리는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잭슨은 이후 스페인령이었던 플로리다로 진격하여 사실상 그곳을 무력 점령했습니다. (논쟁: 당시 먼로 행정부의 공식 승인 여부는 여전히 역사적 논쟁거리.) 

정부의 명령을 종종 무시하며 독단적으로 행동했던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워싱턴의 기득권 정치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서부와 남부의 민중들에게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지도자"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테네시주 상원 의원직을 거치며 서서히 중앙 정치의 생리를 익혔습니다. 

하지만 세련된 언변과 가문 배경을 앞세운 기존 정치인들 사이에서 잭슨은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와 같았습니다. 

당시 미국 정계는 건국 주역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잭슨은 자신을 향한 엘리트층의 멸시를 역이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패한 수도 정치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국민의 대변자'로 포지셔닝했습니다.

1820년대 초, 미국 전역에 선거권이 확대되면서 투표권을 갖게 된 수많은 보통 사람(백인 남성)들은 자신들과 닮은 거친 배경의 영웅에게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적 명성에 '반(反) 엘리트'라는 정치적 명분까지 거머쥔 잭슨은, 이제 전쟁터가 아닌 백악관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1.2. 1824년 선거와 '부패한 거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잭슨은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는 최다 득표를 했지만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대통령은 하원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 헨리 클레이가 존 퀸시 애덤스를 지지하는 대가로 국무장관에 임명되자,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부패한 거래(Corrupt Bargain)'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잭슨은 이 개인적인 정치적 패배를 '민중의 의지가 부패한 엘리트들의 밀실야합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보편적 서사로 탁월하게 전환시켰습니다. 

이는 현대 포퓰리즘의 근간을 이루는 '국민 대 기득권'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구도를 만들어낸 순간이었습니다.


1.3. 1828년 선거와 비극: 레이첼 잭슨의 죽음

젊은 변호사였던 잭슨이 테네시주 내슈빌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 하숙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집주인의 딸이자 마을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레이첼 도넬슨(Rachel Donelson)을 만났습니다. 

당시 레이첼은 루이스 로바즈라는 남성과 결혼한 상태였으나,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시달리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잭슨은 고통받는 그녀를 지켜보며 깊은 연민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국 레이첼은 남편과 결별했고, 1791년 잭슨과 레이첼은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잭슨은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두 사람은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뜨거운 사랑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당시, 레이첼의 전 남편이 이혼 절차를 완료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법적 서류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의도치 않게 레이첼은 서류상 '중혼(Bigamy)' 상태가 된 것입니다. 

2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부는 즉시 다시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 '실수'는 평생 잭슨의 정적들에게 가장 비열한 공격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레이첼 잭슨 (1823년에 그린 초상화)


1828년 대선 캠페인은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하고 추악한 선거 중 하나였습니다. 

상대 후보 측은 잭슨의 아내 레이첼이 전 남편과의 이혼 절차가 법적으로 마무리되기 전에 잭슨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지며, 그녀를 간통과 중혼이라는 치욕적인 낙인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레이첼은 이러한 인신공격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잭슨의 선거 승리 직후인 1828년 12월 22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잭슨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비극은 단순히 그에게 충성심의 가치를 일깨운 것을 넘어, 정치적 반대를 합법적 이견이 아닌 자신과 국가에 대한 치명적이고 비열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세계관을 확립시켰습니다. 

그는 정치적 적들을 아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로 여겼고, 이는 이후 국정 운영에서 개인적인 충성심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통치 스타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군과 정치적 경쟁자들을 정복한 잭슨은 이제 새로운 미개척지, 즉 대통령직 자체의 제도적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민중'의 이름으로 그 장벽을 허물기로 결심했습니다.


2. 잭슨 혁명: 대통령직의 재정의와 권력 강화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직을 의회의 부속 기관이 아닌 국민의 직접적인 대리인으로 재정의하며 미국 정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 철학인 '잭슨 민주주의'를 통해 행정부의 권한을 전례 없이 강화했으며, 이는 현대 미국 대통령직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잭슨은 자신이 민중의 뜻을 대변하는 유일한 선출직 공직자라는 신념 아래 의회와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2.1. '보통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 잭슨 민주주의의 원칙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는 미국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혔지만, 그 혜택은 철저히 백인 남성에게 국한되었습니다. 

그 핵심 원칙은 백인 우월주의를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 참정권 확대: 잭슨 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주에서 재산 소유 요건이 폐지되면서 모든 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우연한 결함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의 백인들(농민, 노동자, 농장주)을 '인종적 본질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라는 공통분모 아래 통합하려는 잭슨 민주주의의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 엽관제 (Spoils System): 잭슨은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관직을 임명하는 정책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보상을 넘어, 레이첼의 비극을 통해 정치적 배신을 뼈저리게 경험한 잭슨이 다시는 그러한 위협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백악관을 절대적으로 충성스러운 '가족'으로 채우려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 강력한 행정부: 잭슨은 의회를 소수 엘리트 기득권의 대변자로 간주하고, 대통령이야말로 '민중의 의지'를 실현하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믿었습니다. 

전기 작가 존 미첨이 지적했듯이, 잭슨은 "어떤 기관도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서서는 안 된다" 고 주장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페티코트 사건: 한 여인을 위해 내각을 해체하다 

잭슨의 고집스러운 충성심은 '에이전 오닐 사건(Eaton Affair: 페티코트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국방장관인 존 에이전의 부인 마거릿이 '과거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장관 부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자, 잭슨은 격노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자신의 아내 레이첼이 겪었던 비극과 겹쳐 보았습니다. 

"내 내각의 여성을 모욕하는 것은 곧 나를 모욕하는 것"이라 선언한 잭슨은, 부인들의 따돌림을 방관한 부통령 칼훈을 비롯해 내각 전체와 등 돌리는 선택을 했습니다. 

결국 이 사소한 사교계 갈등은 내각 총사퇴라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습니다. 

잭슨에게 정치적 논리보다 중요했던 것은 '내 사람'을 지키겠다는 지독한 의리였습니다.


패티코트 사건


2.2. 뱅크 워(Bank War): 거대 은행이라는 괴물과의 전쟁 

잭슨의 강력한 대통령직 수행이 가장 극적으로 폭발한 사건은 이른바 '뱅크 워'라고 불리는 제2 합중국 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과의 정면충돌이었습니다. 

당시 이 은행은 국가의 돈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이었지만, 사실상 선출되지 않은 소수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사설 기관에 가까웠습니다.

잭슨에게 은행 총재 니콜라스 비들(은행권의 실력자)은 헨리 클레이와 같은 부패한 정치 엘리트들의 경제적 파트너일 뿐이었습니다. 

잭슨은 이 거대 은행이 농민과 노동자의 고혈을 짜내어 동부의 부유한 상인들에게만 혜택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은행을 서민의 경제적 자유를 옥죄는 '머리 여럿 달린 괴물(Hydra)'로 규정했습니다.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을 처치하는 앤드루 잭슨


1832년, 잭슨의 정적들은 그의 재선을 막기 위해 함정을 팠습니다. 

은행 인가 연장 법안을 대선 직전에 통과시켜, 잭슨이 이를 거부하면 경제 혼란의 책임을 묻고, 승인하면 그의 지지 기반인 서민들을 배신하게 만들려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잭슨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소식을 듣고 정치적 동지인 마틴 밴 뷰런에게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이 은행이 나를 죽이려 하지만, 내가 먼저 은행을 죽일 것입니다!"


잭슨은 즉각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 거부권은 단순히 정책적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부권 행사 서한을 통해 "은행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고, 권력자를 더 강력하게 만들 뿐"이라며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대통령이 입법부를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 국민의 이름으로 기득권의 심장부를 타격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결국 잭슨은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민심'이라는 무기로 은행을 해체해버렸습니다. 

비록 이로 인해 후에 심각한 경제 공황이 찾아왔다는 비판도 받지만, 잭슨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부패한 기득권 처단'이라는 과업을 완수하며 제왕적 대통령의 위엄을 만천하에 과시했습니다.


2.3. 연방법 무효화 사태: "연방은 보존되어야 한다" 

평소 '주의 권리'를 존중하며 중앙 정부의 간섭을 꺼렸던 잭슨이었지만,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 앞에서는 누구보다 단호한 '연방의 수호자'로 돌변했습니다. 

이 사건은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연방 정부의 높은 관세 정책에 반발하며, "우리 주에서는 이 법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효화(Nullification)' 선언입니다.


잭슨의 무효화를 기사화한 글의 인쇄물


이 사태의 배후에는 잭슨의 현직 부통령이었던 존 C. 칼훈이 있었습니다. 

칼훈은 주 정부가 연방법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잭슨에게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은 한 연회장에서 역사에 남을 건배사 대결을 펼쳤습니다. 

잭슨은 칼훈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며 잔을 높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연방, 그것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에 칼훈은 "연방은 자유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라며 주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맞섰습니다. 

하지만 잭슨은 말로만 그칠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행동을 '반역'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즉각 군대에 출동 준비 명령을 내리며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연방법을 집행하는 요원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나는 반역자들의 목을 매달아 버릴 것입니다."


결국 잭슨의 압도적인 위세와 군사적 위협, 그리고 적절한 관세 인하 타협안이 제시되면서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굴복했습니다. 

잭슨은 평소 자신이 강조하던 '지방 분권'보다 '미합중국의 통합'이 상위의 가치임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는 총칼을 들어서라도 나라가 쪼개지는 것을 막아낸 대통령이었으며, 이는 훗날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 전쟁을 치를 때 중요한 심리적·법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두 번의 불발, 그리고 지팡이를 든 노사자 

1835년 1월 30일,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암살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의사당에서 나오던 잭슨을 향해 리처드 로렌스라는 괴한이 두 자루의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괴한이 첫 번째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었고, 당황한 그가 두 번째 총을 쐈으나 그마저도 불발되었습니다. (전승: 훗날 조사 결과 습한 날씨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확률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67세의 고령이었던 잭슨은 도망치는 대신,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두르며 암살범을 때려눕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야 할 정도로 잭슨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하늘이 보호하는 인물"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화는 잭슨의 '불사신' 같은 이미지를 공고히 하며 그의 철권통치에 신비로운 힘을 더해주었습니다.


리처드 로렌스가 앤드류 잭슨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3. 민주주의의 어두운 이면: 인종 정책과 눈물의 길

앤드루 잭슨의 민주주의는 백인 남성에게는 기회의 문을 활짝 열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에게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어두운 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정책은 백인 우월주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유산에서 가장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추구한 '국민'의 범위는 명백히 인종적으로 제한되었고, 그의 민주주의는 특정 인종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3.1. 인디언 제거법과 대법원 판결의 무시

잭슨은 남동부의 비옥한 토지를 백인 정착민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인디언 제거법(Indian Removal Act)'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존 미첨이 지적했듯이, "잭슨은 진심으로 제거를 믿었다" 고 할 만큼 이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그는 원주민 부족들을 백인의 서부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경쟁하는 주권'으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832년 Worcester v. Georgia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체로키족이 조지아주의 법률이 아닌 연방법의 적용을 받는 독립적인 정치 공동체라며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이 판결을 오만하게 무시하고 제거를 명령했습니다. 

행정부 수반이 사법부의 최종 판결을 거부하고 강제 이주를 명령한 이 사건은, 그의 행정 권력이 사법부의 권위를 어떻게 침해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입니다.


3.2. 눈물의 길(Trail of Tears): 강제 이주의 비극

인디언 제거법의 결과, 1838년 미군은 체로키족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클라호마의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 끔찍한 여정은 '눈물의 길(Trail of Tears)'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법의 전체 시행 과정에서 약 46,000명의 원주민이 강제 이주당했고, 그중 체로키족의 여정은 가장 참혹한 비극 중 하나였습니다. 

이주 과정에서 4,000명 이상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비인도적인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 루시 에임스 버틀러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억압받는 인디언들의 본래 땅에서 부와 자유를 누리고 있는 '백인'의 탐욕에 의해 영원으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라며 정책의 부당함을 통탄했습니다. 

반대 목소리를 낸 테네시 주 유일의 하원의원이었던 데이비드 크로켓은 잭슨의 표적이 되어 다음 선거에서 낙선했습니다. 

'눈물의 길'은 미국이 자국 내 소수 민족에게 자행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미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눈물의 길 지도


3.3. 노예제 옹호자로서의 잭슨

앤드루 잭슨 자신은 테네시의 대규모 농장 '허미티지'에서 다수의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였습니다. 

그의 정치 경력 내내 노예 제도를 일관되게 옹호했으며, 그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 철학은 노예제와 분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백인 우월주의는 아메리카 원주민 정책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오직 백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공적인 정책과 사적인 신념은 깊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모순은 그의 백악관 생활과 통치 스타일에 깊이 스며들어 그의 유산을 오늘날까지도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앤드루 잭슨의 노예였던 한나 잭슨. 1865년경에 촬영된것으로 추정


모순된 자비: 입양된 아들 린코야 

잭슨은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몰아낸 인물이지만, 사생활에서는 묘한 자비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813년 탈러섀치 전투(Creek War 중 발생한 전투) 이후, 잭슨은 몰살당한 원주민 마을에서 굶주리고 있던 아기 '린코야'를 발견했습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이 아기를 자신의 집인 허미티지로 데려가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는 린코야를 "내 아들"이라 부르며 극진히 보살폈고, 백인 아이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하려 노력했습니다. 

잭슨은 국가 정책으로는 원주민의 터전을 빼앗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원주민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린코야가 17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잭슨은 진심으로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앤드류 잭슨이 린코야를 입양하는 모습을 묘사한 석판화.


4. 앤드루 잭슨의 복합적 유산

앤드루 잭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현대 미국 대통령의 역할과 권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찬란한 빛과 인종적 비극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복합적인 것입니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현대 대통령직의 설계자 

잭슨은 대통령을 의회의 부속물이 아닌 국민의 직접적인 대표자로 격상시킨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는 대중 캠페인과 미디어를 활용하여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현대적 대통령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거부권의 적극적인 사용, 행정부 중심의 국정 운영 등 그가 확립한 강력한 행정부 모델은 후대의 많은 대통령에게 선례를 남겼으며, 오늘날 미국 대통령이 가진 막강한 권력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양면성 

잭슨의 민주주의는 인종차별이라는 결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를 그 작동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의 '국민'이라는 개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을 배제한 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백인 남성들의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의도적인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한편으로는 평등의 가치를 확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적 억압을 국가 정책으로 제도화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을 심화시켰습니다.


사자의 황혼: 허미티지의 마지막 포효 

1837년, 잭슨은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와 고향 테네시의 저택 허미티지(The Hermitage: 잭슨의 농장)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퇴임은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과의 최후 결전이었습니다.

그의 몸 안에는 젊은 시절 결투로 박힌 탄환 두 발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패한 납 성분이 혈관을 타고 흘렀고, 그는 매일 피를 토하며 만성 폐부종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노사자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아는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 있을 것"이라며 당당히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1845년 6월 8일, 78세의 나이로 잭슨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기이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기르던 앵무새 '폴'이 장례식장에서 주인에게 배운 거친 욕설을 내뱉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승) 

당황한 조문객들에 의해 앵무새는 식장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는 잭슨의 삶이 얼마나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자신이 억압한 이들조차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눈을 감은 이 모순적인 종막은, 가장 앤드루 잭슨다운 마침표였습니다.


지폐 속의 초상: 영광과 논란 사이 

오늘날 미국인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은 바로 앤드루 잭슨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잭슨 자신은 생전에 종이 화폐(지폐)를 "노동자의 가치를 갉아먹는 종이 조각"이라며 혐오했고, 오직 금화와 은화만을 신뢰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지폐의 모델이 된 것은 역사의 얄궂은 장난과도 같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그의 인종차별적 행보를 비판하며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을 흑인 여성 인권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노예 해방 운동가)으로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이는 잭슨의 유산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미국에서도 여전히 뜨겁게 충돌하고 있는 살아있는 쟁점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잭슨 

앤드루 잭슨은 오늘날에도 포퓰리즘, 대통령의 권한, 그리고 미국의 인종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계속해서 소환되고 있습니다. 

기득권에 맞서는 민중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그의 모습은 현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존 미첨의 평가처럼, 잭슨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우리와 닮은' 대통령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미국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로서, 미국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공개된 전기·사료·연구를 바탕으로 앤드루 잭슨의 생애와 정책을 정리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구성과 심리 묘사, 대화 일부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사실로 확정하기 어려운 내용은 (전승), 해석이 엇갈리는 쟁점은 (논쟁)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제도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하며, 본문은 연대기 강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확장”과 “인종적 배제”라는 두 축에서 잭슨의 유산을 균형 있게 조망하는 재구성 서사입니다.


Andrew Jackson, the 7th U.S. president, rose from frontier hardship to national fame after the Battle of New Orleans. 

After the 1824 “corrupt bargain,” he forged a populist coalition and won in 1828; his wife Rachel’s death hardened his politics around loyalty. 

In office he claimed to speak for the people, expanded voting rights for white men, embraced the spoils system, and used the veto to strengthen the presidency. 

He faced South Carolina’s Nullification to preserve the Union and fought the Bank of the United States as an elite threat. 

Yet his democracy was racially bounded: he pushed Indian Removal, resisted Supreme Court limits, and set the path toward the Trail of Tears; he also defended slavery, even while adopting the Native child Lyncoya. 

 His legacy endures as strong executive populism—and as a warning that democratic expansion coexisted with racial in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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