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링거 제국의 해체와 유럽 국경의 시작, 843년 베르됭 조약의 의미 (Treaty of Verdun)


카롤링거 제국의 해체와 유럽 국경의 태동: 베르됭 조약(843)의 지정학적 분석


1. 샤를마뉴의 유산과 제국 통합성의 구조적 취약성

800년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받은 샤를마뉴(Charlemagne)의 치세는 로마적 보편 제국 이념의 부활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방대한 기독교 제국은 탄생 직후부터 강력한 '원심력(Centrifugal forces)'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는 제국의 광활한 규모에 비해 취약했던 행정력뿐만 아니라, 제국 통합을 지향하는 로마적 주권 개념과 영토를 모든 아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게르만적 '분할 상속' 관습 사이의 본질적 모순에서 기인했다.

샤를마뉴의 유일한 계승자 루도비쿠스 1세(경건왕 루트비히)는 817년 '제국 분할령(Ordinatio Imperii)'을 통해 장남 로타르 1세에게 황제직과 통합 주권을 부여함으로써 제국의 구심력을 강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도리어 다른 형제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으며, 제국 내 헤게모니 파편화(Hegemonic fragmentation)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의 서거는 제국 통합의 마지막 보루가 사라졌음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형제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중세 유럽의 지정학적 재편으로 이어졌다.


2. 정치적 갈등의 정점: 퐁트누아 전투에서 스트라스부르 서약까지

루도비쿠스 1세 사후, 장남 로타르 1세는 제국 전역에 대한 단독 지배권(Suzerainty)을 주장하며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권을 지원하는 등 형제들을 압박했다. 

이에 반발한 '독일왕' 루트비히 2세와 '대머리왕' 샤를 2세는 로타르의 패권주의에 맞서 강력한 동맹을 형성했다.

이들의 갈등은 841년 6월 퐁트누아 전투(Battle of Fontenoy)에서 정점에 달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기록에 따르면, 이 참혹한 내전으로 인해 10만 명에 달하는 프랑크 정예병들이 전사했다. 

이 군사적 소모전은 로타르 1세의 압도적 우위를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급증하던 외부적 위협(841년 루앙을 강타한 바이킹(Vikings)의 약탈과 마르세유, 아를까지 진출한 이슬람 세력(Saracens)의 침공)에 노출된 제국을 수습해야 한다는 현실적 자각을 촉발했다.

842년 스트라스부르 서약(Oaths of Strasbourg)은 이러한 군사적 교착 상태를 정치적 연대로 전환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루트비히 2세는 서프랑크 가신들을 위해 고대 프랑스어(로망어)로, 카를 2세는 동프랑크 가신들을 위해 고대 고지 독일어(테우디스카)로 서약했다. 

이는 지배층의 공용어인 라틴어 너머에서 각 지역의 민족적·언어적 정체성이 발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정학적 상징이자, 로타르 1세로 하여금 단독 지배를 포기하고 영토 분할이라는 타협안을 수용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베르됭 조약


3. 베르됭 조약(843)의 영토 분할과 중세 유럽의 재편

843년 8월, 세 형제는 베르됭에 모여 제국을 세 주권 왕국으로 분할하는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이는 보편 제국 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개별 국가 체제로 이행하는 유럽사의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왕국명
통치자
주요 영토 범위
현대 국가와의 연결성
서프랑크 왕국
카를 2세 (대머리왕)
뫼즈(Meuse), 에스코(Scheldt), 손(Saône), 론(Rhône) 강 서쪽 지역
프랑스의 지리적 모태
중프랑크 왕국
로타르 1세
북해에서 이탈리아 북부에 이르는 중앙 지대 (아헨, 로마 포함)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스위스, 로렌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 (독일왕)
라인 강 동쪽에서 알프스 북동쪽의 게르만 지역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모태


카롤링거 왕국의 최대 판도, 843년 세 부분으로 나뉘는 지도


로타르 1세는 황제 칭호와 함께 제국의 수도 아헨, 정신적 지주인 로마를 차지했으나, 형제들의 왕국에 대해서는 오직 명목상의 지배권만을 가졌다. 

이는 제국이라는 보편적 권위가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채 파편화되었음을 의미하며, 후대 유럽의 주권 국가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게 될 지정학적 단층선(Fault lines)을 형성했다.


4. 지리적 정보 부족과 영토 분할의 상관관계 분석

베르됭 조약의 영토 획정 과정은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동시대 역사가 니타르트(Nithard)의 기록에 따르면, 로타르 1세는 제국 분할안을 구상하면서도 "지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ignorantia regionem)" 깊은 곤경에 처했다.

제국 전역에서 120명의 전문가가 동원되어 왕실 소유지(villas dominicales)와 수도원, 주교구의 목록을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된 지도의 부재는 기형적인 국경 형성을 초래했다. 

특히 로타르 1세가 차지한 중프랑크 왕국(Francia Media)은 북해에서 이탈리아에 이르는 좁고 긴 '복도형 영토'로 획정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내부 소통을 저해하고 방어 측면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했으며, 이는 중프랑크 왕국이 독자적인 국가로 장기 존속하지 못하고 주변국에 의해 흡수되는 구조적 결함으로 작용했다. 

당시의 지리적 무지는 제국을 '면(Area)'이 아닌 '세수 기반의 자산 네트워크(Revenue-based network)'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한스 뮈첼 - 베르됭 조약, 843년


5. 가신 보상 문제와 조세권 중심의 분할 논리

베르됭 조약의 영토 분할은 민족적 동질성이 아니라 철저히 재정적 균형과 '재정-군사 체제(Fiscal-military logic)'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세 국왕의 핵심 관심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영토보다는 조세권, 특히 실질적 수익원인 왕실 직영지(villas dominicales), 수도원, 주교구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있었다. 

이는 왕권의 유지에 필수적인 가신들에 대한 보상 체계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로타르 1세는 협상 과정에서 자신을 따르는 가신들이 상실한 몫을 보상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는 당시 국경 획정의 최우선 순위가 가신들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보상 체계'의 확립이었음을 입증한다. 

결과적으로 민족적·언어적 경계를 도외시한 채 세입 가치에 따라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은, 피통치자들의 정체성과 괴리된 채 향후 천 년간 지속될 유럽 내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6. 베르됭 조약의 역사적 가치: 현대 국가 체제의 모태

베르됭 조약은 제국의 보편적 지배에서 개별 국가 체제로 이행하는 '유럽 분할의 시작'으로서 다음과 같은 지정학적 유산을 남겼다.

• 주권 국가의 원형: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는 각각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현대 주권 국가의 지리적·문화적 핵(Core)이 되었다. 

842년의 스트라스부르 서약에서 확인된 언어적 분화는 각 지역의 독자적 민족 정체성 형성을 가속화했다.

• 지정학적 진공 상태(Shatterbelt): 중프랑크 왕국은 자연적 방어선이 부재한 '복도형 구조'로 인해 곧 해체되었으며, 그 영토인 로타링기아(Lotharingia, 알자스-로렌 등)는 서유럽의 거대한 '지정학적 진공 상태'이자 '분쇄 지대(Shatterbelt)'가 되었다.

• 천 년의 단층선: 로타링기아를 둘러싼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영토권 분쟁은 1871년 보불전쟁을 거쳐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핵심적인 갈등 축으로 작용했다.


7. 통합과 분열의 변주곡으로서의 유럽사

샤를마뉴의 통합 실험이 그의 사후 급격한 분열로 귀결된 것은 게르만적 분할 관습, 지리적 정보의 부재, 그리고 가신 중심의 분권적 권력 구조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위로부터의 분열'은 역설적으로 유럽 특유의 역동적인 민족 국가 시스템을 탄생시키는 산고가 되었다.

베르됭 조약이 획정한 인위적 국경은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나, 동시에 각 지역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성장하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 

843년 베르됭에서 시작된 제국의 해체는 보편적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자율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현대 유럽 국가 체제의 첫 페이지를 쓴 것이다. 

결국 유럽사는 베르됭에서 시작된 지정학적 단층선을 통합이라는 가치로 승화시켜 나가는 끊임없는 변주와 극복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카롤링거 제국의 해체와 843년 베르됭 조약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구조·지리 인식·재정 논리를 종합해 서술한 글입니다.

1차 사료와 주요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꼼꼼히 교차 검증하며 작성했으나, 중세사 특성상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나 학계에서 논쟁 중인 쟁점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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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된 결론보다는 함께 읽고, 함께 토론하는 역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The Treaty of Verdun (843) marked the definitive fragmentation of Charlemagne’s Carolingian Empire and laid the foundations of modern European borders. 

After Charlemagne’s death, structural weaknesses—vast territory, limited administration, and the contradiction between Roman imperial unity and Germanic partible inheritance—made cohesion fragile. 

Civil war among his grandsons culminated after the Battle of Fontenoy (841), forcing compromise. 

The treaty divided the empire into West, Middle, and East Francia, ancestral cores of France and Germany, while the unstable Middle Kingdom became a long-term geopolitical fault line. 

Lacking accurate geographic knowledge, borders were drawn according to fiscal assets rather than ethnic unity, shaping centuries of confl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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