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정치 인생 총정리: 민주화·선거·국정 운영의 50년 기록 (Lee Hae-chan)


거인의 설계도: 야전에서 일궈낸 50년의 정치 대서사, 이해찬 평전


제1장. 야전의 사령관: 철장 속에서 피어난 민주주의의 불꽃

[1] 청양의 바람, 관악의 안개

1952년 7월 10일, 충남 청양군(충청남도 청양군)의 들판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꿋꿋이 짙푸른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포성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불안한 시기였지만, 대지는 어김없이 여름의 열기를 머금고 벼를 키워냈다. 

그해 여름, 훗날 대한민국 정치의 지형도를 바꿀 아이, 이해찬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면장을 지낸 지역의 인텔리였다. 

덕분에 그는 전후의 폐허 속에서도 비교적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4.19 혁명, 그리고 이어진 5.16 군사정변. 

소년 이해찬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에서 권력이 어떻게 바뀌고 세상이 어떻게 요동치는지 본능적으로 체득하며 자랐다.


1971년, 그는 수재들만 모인다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관악 캠퍼스의 안개는 자욱했고, 학문의 상아탑은 최루탄 가스에 절여져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는 청년 이해찬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결정적 사건이었다. 

"사회가 병들었는데, 사회학을 책으로만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강의실 대신 도서관 지하, 혹은 이름 모를 선술집의 구석진 자리에서 금서(불온 서적)를 읽으며 동료들과 밤을 지새웠다.


대한민국 정치인. 이해찬


[2] 1974년, 민청학련의 사슬

운명의 시간은 1974년에 찾아왔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하며 민주화 운동 세력을 전면 압박했다.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3학년이던 이해찬은 학생 운동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그는 치밀했다. 

감정적인 구호보다는 논리와 조직력을 중시했다. 

하지만 독재의 칼날은 예외가 없었다.


민청학련 시절의 이해찬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바닥, 쇠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한 줌의 빛조차 사치였던 그곳에서 그는 고문을 견뎌야 했다. 

수사관들은 그에게 배후를 물었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우리의 배후는 억눌린 민중의 목소리다"라는 신념 하나로 버텼다. 

법정은 그에게 무기 징역이라는 가혹한 형량을 선고했다. (이후 감형되어 출소)

20대 초반, 꿈을 펼쳐야 할 청년의 인생이 그대로 매장될 위기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감옥에서의 시간은 그를 단순한 학생 운동가에서 '정치적 전략가'로 각성시키는 용광로가 되었다.


[3] 복역과 출소, 그리고 다시 거리로

감형을 받고 출소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감시와 탄압이었다. 

하지만 이해찬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서울 봉천동에 '광장서적'이라는 책방을 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서점이었지만, 사실 그곳은 재야 인사들과 학생 운동가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민주화의 전략을 짜는 '야전 사령부'였다. 

그는 책을 파는 주인이자, 금지된 지식을 유통하는 전달자였으며, 흩어진 민주화 역량을 하나로 묶는 기획자였다.


1980년의 '서울의 봄'은 짧았다. 

신군부가 등장했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1980년 신군부가 김대중 등을 내란 주동자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 터졌다. 

이해찬은 또다시 수사기관에 끌려갔다. 

이번에는 김대중이라는 거물 정치인과의 연결고리로 지목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그는 다시 감옥으로 향했다. 

두 번째 옥고였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옥 안에서 그는 깨달았다. 

거리의 투쟁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제도권 정치'라는 전장에서 싸울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4] 6월 항쟁의 야전 사령관

1987년, 대한민국은 폭발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은 전 국민을 거리로 불러냈다. 

이해찬은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6월 항쟁을 주도한 재야 단체)의 집행위원직을 맡았다. 

그는 감정적인 연설가보다는 치밀한 조직가에 가까웠다. 

시위대의 이동 경로를 설계하고, 경찰의 진압 방식을 예측하며,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그는 서울 시청 광장에서 밀려드는 인파를 보며 확신했다. 

이제 시대의 강물은 돌릴 수 없음을. 

6.29 선언이 발표되고 민주화가 가시화되었을 때, 그는 이미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의 민주주의를 국회의사당의 민주주의로 이식하는 작업, 즉 정권 교체를 위한 실무적 준비였다.


[5] 전략가의 탄생

이해찬의 청년기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여타 운동가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숫자와 조직, 그리고 실현 가능한 전략을 믿었다. 

감옥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고, 재야 활동은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가르쳤다.


이제 그는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본격적인 정글의 세계인 제도권 정치로 발을 내딛는다.

1988년, 평화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관악구 을(이해찬이 13대부터 당선된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를 시기하는 이들은 "감옥 갔다 온 놈이 뭘 하겠느냐"고 비웃었지만, 그는 단호했다.


"정치는 가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발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야전 사령관' 이해찬의 제1막은 저물고, '선거의 달인' 이해찬의 제2막이 오르고 있었다.


제2장. 선거의 달인: '이해찬 컴퓨터'가 가동되다

[1] 1988년, 관악의 기적

1988년 봄, 서울 관악구 을(관악구의 선거구 중 하나)의 골목길은 유독 분주했다. 

제13대 총선. 소선거구제가 처음 도입된 이 선거에서 서른여섯의 청년 이해찬이 평화민주당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당시 관악은 호남 출신 이주민과 고시생들이 뒤섞인 척박한 땅이었다. 

상대는 민주정의당의 쟁쟁한 거물들이었다.


제13대 총선에 출마한 관악구 이해찬 후보


이해찬은 달랐다. 

그는 감성적인 호소 대신 '데이터'를 들고 나왔다. 

골목마다 거주하는 유권자의 성향을 분석하고, 시간대별 이동 동선을 파악해 타격 지점을 정했다. 

결과는 대역전승. 

"운동권 출신이 뭘 알겠어"라던 비아냥은 경악으로 변했다. 

그는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국정감사라는 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5공 비리 청문회에서 그는 치밀한 자료 조사로 증인들의 거짓말을 낱낱이 파헤쳤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이해찬 컴퓨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국가 예산의 흐름과 행정 조직의 약점이 지도로 그려져 있었다.


[2] 서울시장 선거, 킹메이커의 서막

1995년, 대한민국은 사상 첫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조순(서울시장 재임, 경제학자 출신)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 캠프의 야전 사령관은 단연 이해찬이었다. 

그는 조순 후보에게 흰 눈썹과 학자적 풍모라는 이미지를 입히고, "서울의 자존심"이라는 슬로건을 던졌다.


그는 유세장의 바람 방향까지 계산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했다. 

상대 진영의 네거티브 공격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미리 준비한 반격 자료를 미디어에 흘려 국면을 전환했다. 

결과는 조순 시장의 당선. 

이 승리는 단순한 지방선거 승리가 아니었다. 

2년 뒤에 있을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불씨를 살린 사건이었다. 

이해찬은 이때부터 김대중(DJ)의 가장 신뢰받는 '전략가'로 자리매김한다.


[3] 1997년, 0.7%의 승부수를 던지다

1997년 대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이해찬은 새정치국민회의의 선거대책본부 기획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야권은 만년 2위에 머물러 있었다. 

이해찬은 냉정하게 분석했다. 

"호남 고립 구도를 깨지 못하면 필패다."


그는 이른바 'DJP 연합(김대중과 김종필의 단일화)'의 실무적 토대를 닦았다. 

이념적으로 정반대에 서 있던 김종필(JP)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그는 특유의 뚝심과 논리를 발휘했다. 

"승리를 위해서는 자존심보다 전략이 우선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선거 당일 밤, 전국이 손에 땀을 쥐는 개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사무실에서 숫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결과는 약 39만 표 차이. 

단 1.5%(논쟁: 실제 유효 득표율 차이는 약 1.6%)의 차이로 사상 첫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그 0.1%의 빈틈을 메운 것이 바로 이해찬의 설계였다.


[4] 승리 뒤에 숨겨진 고독한 원칙

그는 선거에서 이기는 법을 알았지만, 동시에 '독설가'라는 오명도 얻기 시작했다. 

동지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회의 중에 논리가 부족하거나 데이터가 틀리면 가차 없이 호통을 쳤다. 

"공부 좀 하고 오세요!"라는 그의 외침은 동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성정이 나빠서라기보다, 정권을 잡고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 '실수'란 곧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그의 엄격한 직업윤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인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정부의 밑그림을 그렸다. 

거리의 투사였던 청년은 이제 국가 시스템을 주무르는 거대한 설계자가 되어 있었다.


[5] 권력의 핵심으로

이해찬은 이제 단순한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정권의 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려운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렀다. 

이해찬의 보고서는 늘 간결했고, 결론은 명확했다.


그는 승리의 단맛에 취하지 않았다. 

정권 교체 이후 곧바로 닥친 IMF 외환위기라는 파고를 넘기 위해 그는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선거라는 전쟁터에서 단련된 그의 감각은 이제 '국가 개혁'이라는 더 큰 전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기는 법을 알았으니, 이제 제대로 운영하는 법을 보여줘야 한다."


이 다짐은 훗날 그가 교육부 장관으로서,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실세 총리로서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는 원동력이 된다.


제3장. 개혁의 칼날: "이해찬 세대"와 책임 총리의 탄생

[1] 교육의 판을 뒤집다, 장관 이해찬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해찬은 취임 일성부터 파격적이었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입시 지옥에 갇힌 아이들을 해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야간 자습을 폐지하고, 특기 적성 교육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 개혁은 (논쟁)이해찬 세대라는 거센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학력 저하 논란이 불거졌고,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식 소매상이 아니라 창의적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정면 돌파했다. 

비록 정책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었으나, 서열화된 교육 현장에 '다양성'이라는 화두를 던진 그의 뚝심은 교육계의 오랜 금기를 깨트린 일대 사건이었다.


[2] 노무현과 이해찬, 두 거인의 만남

이해찬의 정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노무현이다. 두 사람은 성격도 스타일도 달랐다. 

노무현이 뜨거운 가슴으로 대중을 휘어잡는 사자였다면, 이해찬은 차가운 머리로 판을 짜는 설계자였다. 

2002년 대선, 아무도 노무현의 승리를 점치지 않을 때 이해찬은 그의 곁에서 승리의 방정식을 풀었다.


두 거인 노무현과 이해찬


2004년, 탄핵의 풍파를 넘어선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단순한 의전형 총리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그에게 내치의 전권을 위임했다. 

이른바 '책임 총리'의 탄생이었다. 

이해찬은 매주 국정 현안 점검 회의를 주재하며 부처 간 이견을 조율했다. 

관료들은 그의 앞에서 벌벌 떨었다. 

수치를 틀리거나 준비가 부족하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해찬이 총리가 되니 정부가 비로소 돌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국정 장악력은 압도적이었다.


[3] 세종시,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그리다

이해찬 총리 시절 가장 공을 들인 프로젝트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즉 세종시 건설이었다.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가 균형 발전을 이루겠다는 노무현의 철학을 현실의 도면으로 옮긴 이가 바로 이해찬이었다. 

그는 반대 세력의 집요한 공격과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라는 절벽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표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충청권 표심을 넘어, 대한민국이 향후 100년을 생존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분권을 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지가 된 세종특별자치시는 사실상 그의 고집과 설계가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골프회동과 고독한 결단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그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2006년 3.1절 골프 파동(철도 파업 중 골프를 쳤다는 논란)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야당의 공세와 여론의 악화 속에서 그는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평소 "할 일만 잘하면 되지, 형식적인 의전이 뭐가 중요하냐"던 그의 실용주의적 태도가 대중의 정서와 충돌한 지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책임을 질 때는 깨끗하게 진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무대를 내려왔다. 

그는 총리 공관을 떠나며 다시 평의원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닦아놓은 행정의 시스템은 노무현 정부 후반기 국정 운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5] 시스템의 힘을 믿다

이해찬은 장관과 총리를 거치며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수리하고 업그레이드했다. 

그가 휘두른 개혁의 칼날은 때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고, (논쟁: 독선적 운영)이라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었다. 

'장관이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체계', '데이터에 기반한 행정'이라는 시스템이었다.


이제 그는 행정의 수장에서 다시 정당의 어른으로, 그리고 진보 진영의 거대한 뿌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 격동의 세월을 뒤로하고 그는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무너져가는 민주 진영의 가치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제4장. 킹메이커의 귀환: 민주당의 뿌리를 깊게 내리다

[1] 비극 속에서 일어서다, 운명적 재회

2009년 5월, 봉하마을의 비보는 이해찬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정치적 동반자이자 영혼의 단짝이었던 노무현의 서거. 

영결식장에서 헌화하며 오열하던 그의 모습은 평소 차갑고 냉철했던 '이해찬 컴퓨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그날, 무너진 민주 진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죽은 동지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다짐했다.


그는 즉시 야권 통합의 길로 뛰어들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친노 세력과 시민사회를 하나로 묶는 '혁신과 통합'의 산창자가 되었다. 

그에게 정치는 이제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고인이 남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이번에는 선수가 아니라, 무대를 만드는 기획자이자 어른으로서의 복귀였다.


[2] 7선 의원의 위엄과 '이해찬의 민주당'

2012년 제19대 총선, 그는 고향과도 같은 관악을 떠나 신설된 세종특별자치시에 출사표를 던졌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초석을 놓은 도시에서 심판을 받겠다는 의지였다. 

결과는 압승. 

그는 7선 의원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며 당의 중심축으로 우뚝 섰다.


2018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표가 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집권 여당이었으나 내부 계파 갈등의 불씨가 여전했다. 

이해찬은 취임하자마자 '시스템 공천'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대표의 자의적 판단이 아닌, 객관적 수치와 데이터로 후보를 가려내는 방식이었다. 

그는 당내 반발을 특유의 뚝심으로 눌렀다. 

"사심이 들어가면 정당은 망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민주당은 비로소 사당(私黨)이 아닌 공당(公黨)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3] 2020년, 180석의 기적을 설계하다

이해찬의 전략가적 면모가 정점에 달한 순간은 21대 총선이었다. 

당시 그는 암 투병 중(전승: 건강 악화설이 돌았으나 본인은 이를 부인하며 강행군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누볐다. 

그는 투표일 수개월 전부터 "우리는 180석을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듯 말했다. 

세간에서는 오만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의 머릿속엔 이미 전국 253개 선거구의 여론 지형이 완벽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결과는 그의 말대로였다. 

180석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승. 

대한민국 헌정사상 집권 여당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그는 승리 직후 겸허를 주문했다. 

"열린우리당 시절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는 승리의 기쁨보다 승리 이후에 올 오만과 독선을 경계했다. 

이것이 노련한 정치인 이해찬이 후배들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이었다.


[4] "20년 집권론"과 백년대계

이해찬은 당 대표 시절 이른바 '20년 집권론'을 주장해 보수 진영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권력에 대한 탐욕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직면한 저출산, 양극화, 남북 관계 등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는 긴 호흡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통찰이었다.


그는 정당이 단순히 선거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국가의 비전을 생산하는 연구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연구원을 강화하고, 당원 교육 시스템을 체계화한 것은 그가 남긴 보이지 않는 업적이다. 

그는 당 대표 임기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원칙'과 '기강'을 강조했다. 

그가 물러나는 날, 당직자들은 그에게 '철의 여인'에 비견되는 '철의 사내'라는 별칭을 헌정했다.


[5] 무대를 떠나는 거목

2020년 8월, 당 대표 임기를 마친 이해찬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2년의 의정 생활, 7번의 당선, 그리고 두 번의 민주 정부를 창출한 킹메이커의 퇴장이었다. 

그는 "할 소임은 다했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여의도를 떠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았다. 

그가 비록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그가 뿌린 씨앗들이 민주당이라는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음을. 

그는 이제 고독한 설계자의 책상을 정리하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세종시의 들판을 바라보며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5장. 거목이 남긴 향기: 설계자가 떠난 뒤의 풍경

[1] 여의도를 떠나 숲으로, 고독한 은퇴

2020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장을 나서는 이해찬의 뒷모습은 홀가분해 보였다. 

30년 넘게 그를 짓눌렀던 '권력의 무게'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관악도, 화려한 서울의 중심지도 아닌 자신이 직접 초석을 놓은 세종특별자치시의 한적한 마을로 향했다.


은퇴 후 그의 일상은 소박했다. 

텃밭을 가꾸고, 서재에 앉아 방대한 양의 서적을 다시 읽었다. 

평생을 '이해찬 컴퓨터'라 불리며 데이터와 씨름하던 그는 이제 노을이 지는 금강의 물줄기를 보며 철학적 사유에 잠겼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중요한 정국 현안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세종시로 향했다. 

그는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날카로운 훈수 대신, "길게 보라"는 묵직한 조언을 건넸다.


[2] 회고록 《나의 인생, 국민과 함께》

은퇴 이후 그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2022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한국 현대 정치사의 '비망록'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자신이 내렸던 수많은 결정의 막전막후를 가감 없이 서술했다. 

특히 (논쟁: 교육 개혁의 명과 암)에 대해서도 "당시에는 최선이라 믿었으나, 현장의 고통을 더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점은 아쉽다"며 이례적인 자기 성찰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정치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으로 '책임감'을 꼽았다. 

"정치인은 욕을 먹더라도 국가의 10년, 20년 뒤를 위해 오늘 가시밭길을 가야 한다"는 그의 문장은 많은 젊은 정치인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영광보다 자신이 몸담았던 민주 진영이 어떻게 하면 '시스템'으로 움직일 수 있을지를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3] 설계자의 마지막 침묵 

영원할 것 같던 설계자의 시간도 멈춰 섰다. 

2026년 1월 25일 오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신분으로 베트남 호찌민을 방문 중이던 이해찬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현지 의료진의 긴급 시술에도 불구하고 그는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1월 27일 오전, 고인의 시신이 고국으로 운구되던 날 대한민국 정치권은 거대한 슬픔에 잠겼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정파를 초월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그를 '독설가'라 비판했던 정적들조차 "한국 정치사에서 그토록 치밀한 전략가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한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장례는 유족의 뜻에 따라 31일까지 5일간 사회장으로 치러지며, 이재명 대통령은 무궁화장을 추서하며 고인의 헌신을 기렸다.


[4] 이해찬이 남긴 것: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의지

이해찬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누군가에게는 '독선적인 불도저'였고, 누군가에게는 '가장 완벽한 국정 운영자'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정당 정치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못했을 것이며,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거대 담론이 현실화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정치를 '예술'이 아닌 '과학'으로 접근했다. 

감성보다는 논리를, 구호보다는 실천을 앞세웠다. 

그가 남긴 세종시의 빌딩 숲과 민주당의 시스템 공천 룰은 그가 이 땅에 남긴 살아있는 지문이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설계한 대한민국의 골조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5] 에필로그: 하늘에서 바라본 대한민국

이제 이해찬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노무현 대통령 곁으로 돌아갔다. 

두 거인은 아마 하늘나라에서도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총리, 우리가 만든 세상이 좀 살만해졌나?" 

"대통령님, 아직 멀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있으니 국민들이 잘 헤쳐나갈 겁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설계자였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국가라는 기계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도록 수많은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은 치밀한 설계자. 

우리는 그를 '강철의 정치인'으로 기억하겠지만, 그는 그저 '국민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싶어 했던 한 인간으로 남길 원했을 것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쉼 없이 걸어온 고인의 여정에 경의를 표하며, 평안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이 글은 신문 기사, 공식 기록, 회고 자료, 다수의 언론 보도와 증언을 교차 검증하며 최대한 사실에 근접하게 구성한 서사형 평전입니다.

다만 현대 정치사의 특성상 일부 사건의 해석, 시점, 표현에는 자료 간 차이 또는 필자의 재구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만약 사실과 다르게 확인되는 부분, 연도·직책·사건 전개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 혹은 꼭 추가되었으면 하는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 맥락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세요.

지적·보완·추가 의견은 모두 환영하며, 확인 후 반영해 글을 계속해서 살아 있는 기록으로 다듬어가겠습니다.

또한 이 글은 단정적인 평가보다는 한 정치인의 선택과 전략을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해석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토론과 보완을 통해 이 글이 더 풍성해지길 기대합니다.


This article presents a narrative biography of Lee Hae-chan, tracing more than five decades of South Korea’s democratic politics through the life of a single strategist.

Beginning with his student activism and imprisonment during the authoritarian era, the story follows his transformation from a street-level organizer into a master electoral tactician. 

Lee played key roles in the June Democratic Uprising of 1987, the opposition’s victories in the 1990s, and the historic peaceful transfer of power in 1997. 

Known for his data-driven approach and uncompromising discipline, he became a central architect of progressive governance, serving as education minister and later as prime minister under President Roh Moo-hyun, where he helped institutionalize administrative reforms and the vision of a decentralized state, including the creation of Sejong City. 

After Roh’s death, Lee returned as a political elder, rebuilding party structures, enforcing system-based nominations, and engineering the landslide parliamentary victory of 2020.

His legacy is portrayed not simply as that of a politician, but as a designer of political systems who believed that democracy survives through structure, continuity, and long-term vision rather than charisma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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