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내린 사형 선고: 1233년 고양이 학살이 부른 흑사병의 저주
제1부: 불길한 그림자, 이단 심문관의 등장
서기 1233년 초겨울,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의 밤은 유난히 길고 차가웠다.
진흙탕이 얼어붙은 거리에 말발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조차 숨긴 채 숨을 죽였다.
그들이 온 것이다.
교황청의 이름으로 파견된 이단 심문관, 콘라트 폰 마르부르크(Konrad von Marburg)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콘라트는 고결한 성직자의 옷을 입었으나, 그의 눈빛에는 자비 대신 타오르는 광신(狂信)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최근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독일의 심장부에 사탄의 무리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털이 짐승의 형상을 한 악마를 숭배하며, 입에 담지 못할 음란한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콘라트가 지목한 이들은 평범한 농민과 가난한 과부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채찍과 고문대 앞에서는 누구도 결백할 수 없었다.
이른바 '자백의 방'이라 불리는 지하 감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하라! 너희가 숭배하는 그 검은 짐승의 정체가 무엇이냐!"
심문관의 조수들이 가시 돋친 의자에 앉은 노인의 손톱 아래로 바늘을 밀어 넣었다.
고통은 이성을 마비시켰고, 공포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결국 노인의 입에서 콘라트가 원하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보았습니다... 검은 고양이(Black Cat)였습니다. 꼬리를 치켜든 그 짐승이 나타나면, 우리는 차례로 그 엉덩이에 입을 맞추고(Osculum Infame) 악마를 영접했습니다."
이 황당무계한 자백은 콘라트의 펜 끝에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변모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고양이가 밤눈이 밝고 소리 없이 움직인다는 이유로 불길한 영물(靈物)이라는 전승이 떠돌고 있었다.
콘라트는 이 대중적 공포를 정교하게 엮어 '루시퍼 숭배자'라는 거대한 허상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백을 토대로 악마 숭배의 단계를 규정했다.
첫째, 커다란 두꺼비가 나타나 입을 맞추게 한다.
둘째, 창백한 남자가 나타나 인간의 온기를 앗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검은 고양이가 거꾸로 내려와 꼬리를 세우면 숭배자들은 그 주위에 모여 난교를 벌인다는 시나리오였다.
이 보고서가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에 도착했을 때,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경악했다.
교황권이 세속 군주들과의 다툼으로 위태롭던 시절, '공공의 적'은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에 가장 좋은 도구였다.
"지옥의 사자가 고양이의 가죽을 쓰고 우리 곁에 와 있다."
1233년 6월 13일, 마침내 교황은 전 유럽의 교회에 칙령을 선포한다.
그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선전포고라 불리는 '복스 인 라마(Vox in Rama, 라마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 칙령은 단순한 종교적 훈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은 고양이를 '사탄의 화신'으로 공식 낙인찍는 사형 선고였다.
칙령의 내용이 발표되던 날, 마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길가에서 세수를 하던 고양이들에게 향했다.
어제까지 쥐를 잡으며 집안의 평화를 지켜주던 반려 동물이, 하룻밤 사이에 영혼을 사냥하는 악마로 돌변한 순간이었다.
콘라트 폰 마르부르크는 승리감에 젖어 마을의 화형대를 점검했다.
장작더미 위에는 이단자로 몰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길렀던 '검은 짐승'들이 함께 던져질 예정이었다.
광기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인간의 무지가 불러올 거대한 재앙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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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제 178대 교황 그레고리오 9세 |
제2부: 교황의 칙령, 고양이와의 전쟁 선포
1233년 6월, 로마의 여름은 타오르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증오로 가득 찼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손에서 탄생한 칙령 '복스 인 라마(Vox in Rama)'의 사본들이 양피지에 옮겨져 유럽 각지의 교구로 흩어졌다.
이 문서는 단순한 종교적 권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악마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총동원령'이었다.
"라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슬피 울며 통곡하나니..."
성경 구절로 시작된 칙령은 곧이어 기괴하고도 상세한 '악마의 형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이단 심문관 콘라트가 보고한 망상들을 공식적인 교회 법전으로 승격시켰다.
칙령에 따르면, 사탄은 고양이의 형상을 빌려 인간의 침실에 침입하고,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검은 털 아래 숨겨진 사악한 눈빛으로 신의 질서를 비웃는 존재였다.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 광장, 신부의 입에서 칙령이 낭독되자 군중들 사이에서는 술렁임이 일었다.
"검은 고양이는 더 이상 짐승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사탄의 대리인이다. 누구든 이 짐승을 숨겨주거나 돌보는 자는 악마의 종자로 간주하여 교회의 파문에 처할 것이다!"
선포가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엌 한구석에서 졸고 있던 노랑이, 헛간의 쥐를 잡던 검둥이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돌변했다.
특히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들은 즉각적인 처단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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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x in Rama |
광기는 삽시간에 번졌다.
아이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민중들 사이에서는 괴이한 소문이 구전되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죽일 때 나는 비명은 악마가 지옥으로 끌려가며 지르는 단명이다."
"검은 고양이의 심장을 태운 가루를 이마에 바르면 이단자의 눈을 가질 수 있다."
학살은 축제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벨기에의 이프르(Ypres) 같은 도시에서는 '고양이 수요일(Kattenwoensdag)'이라는 기괴한 관습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성곽 꼭대기에서 수십 마리의 고양이를 산 채로 던져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고양이가 고통 속에 몸부림칠수록 군중은 환호했다.
그것이 신의 뜻을 받드는 경건한 행위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 광기 속에서 가장 고통받은 이들은 고양이를 가족처럼 돌보던 노파들이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이 고양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면, 이단 심문관들은 즉시 그들을 잡아들였다.
"짐승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고양이의 젖을 짜서 마녀의 물약을 만들었다!"
터무니없는 고발이 빗발쳤고, 화형대의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다.
고양이와 주인은 같은 말뚝에 묶여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하지만 이 잔혹한 정화 작업의 이면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생태적 균형의 파괴가 도사리고 있었다.
마을의 고양이들이 사라지자, 지붕 위를 달리던 발소리가 멈췄다.
쥐 구멍 앞에서 매복하던 노련한 포식자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 날 밤, 파리의 한 하수구 깊은 곳에서 수천 마리의 작은 눈동자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천적이 사라진 세상, 쥐들은 더 이상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창고의 밀을 파먹고, 아이들의 요람 위를 가로질러 다니며, 그들의 몸에 붙은 작은 불청객인 '벼룩'을 퍼뜨릴 준비를 마쳤다.
교황청은 승리를 확신했다.
지상에서 악마의 화신을 몰아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들이 열어젖힌 것은 천국으로 가는 문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3분의 1을 집어삼킬 거대한 죽음의 구렁텅이였다.
1233년의 겨울, 유럽의 들판에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대신, 굶주린 쥐들의 갉작거리는 소리만이 불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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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중세 동물 우화집에서 묘사된 고양이 |
제3부: 텅 빈 거리와 다가오는 죽음의 신
1. 포식자가 사라진 도성
고양이들의 비명은 짧았으나, 그 뒤에 찾아온 정적은 길고도 불길했다.
유럽 전역에서 '복스 인 라마'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 불과 몇 해 되지 않아, 도시의 풍경은 기이하게 변해버렸다.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런던, 독일의 마인츠 같은 대도시의 지붕 위를 소리 없이 누비던 그 유연한 그림자들이 자취를 감췄다.
한때 인간의 식량을 탐하는 쥐들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제압하던 '작은 수호자'들은 이제 이단 심문관의 횃불 아래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인간들은 승리했다고 믿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사람들은 서로를 축복하며 사탄의 화신을 몰아낸 자신들의 신앙심을 자축했다.
하지만 그들이 신의 뜻이라 믿으며 휘두른 칼날은, 사실 자신들의 목줄을 조이는 올가미였다.
포식자가 사라진 생태계의 공백은 즉각적이고도 잔인하게 메워졌다.
천적의 눈빛과 발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쥐들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숨어 지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번식의 축제를 시작했다.
암수 한 쌍의 쥐는 불과 1년 만에 수백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그 새끼들은 다시 몇 달 만에 어미가 되어 군단을 형성했다.
2. 쥐들의 제국, 인간의 식탁을 점령하다
13세기 중반, 유럽의 곡창지대와 도시 창고는 소리 없는 습격에 직면했다.
밤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갉작'거리는 소리는 이제 도시의 일상적인 배경음악이 되었다.
"신부님, 쥐들이 곡식 포대를 다 찢어놓았습니다. 고양이가 있었을 때는 감히 범접치 못하던 곳인데... 이제는 놈들이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의 하소연은 늘어갔지만, 교회는 단호했다.
고양이를 다시 들이는 것은 악마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라 경고했다.
대신 교회는 쥐들을 향해 '파문'을 선고하거나 성수를 뿌리는 기괴한 의식을 행했다.
하지만 쥐들은 라틴어 기도문도, 성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식탁 위에 올라와 빵을 갉아먹었고, 아기들이 잠든 요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민중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전승이 돌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죽인 대가로 쥐의 머리를 한 악마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밤마다 지하 하수구에서 쥐들의 왕이 인간의 언어로 회의를 한다더라."
이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쥐들은 인간이 정성껏 기른 밀과 보리를 집어삼키며 세력을 불렸고, 기근의 그림자가 유럽을 덮쳤다.
고양이를 죽여 신의 축복을 받으려 했던 인간들은, 이제 쥐 떼가 퍼뜨리는 오물과 배설물 속에서 서서히 병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다가올 대재앙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전조에 불과했다.
3. 검은 돛배와 보이지 않는 살인자
시간은 흘러 1347년 가을.
시칠리아의 메시나(Messina) 항구로 열두 척의 갤리선이 들어왔다.
배의 돛은 찢어져 있었고, 갑판 위에는 산 사람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선원들의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는 달걀만한 크기의 검은 종양(Bubo)이 솟아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흑사병(Pestis)'이라 불렀다.
배가 정박하자마자 밧줄을 타고 가장 먼저 내린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배의 창고 깊숙한 곳, 썩은 음식 사이에서 기거하던 검은 쥐들이었다.
그리고 그 쥐들의 털 사이에는 아주 작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살인마가 숨어 있었다.
바로 '열대쥐벼룩(Xenopsylla cheopis)'이었다.
과거라면 항구에 대기하던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이 '침략자'들을 즉각 사냥했을 것이다.
쥐들이 도심으로 숨어들기 전, 고양이들의 예민한 감각은 외래 쥐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들을 처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시나의 항구에도, 이탈리아의 거리에도 쥐들을 막아설 포식자는 없었다.
학살의 역사(1233년)가 남긴 텅 빈 자리는 흑사병에게는 고속도로와 같았다.
쥐들은 고양이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가옥과 가옥 사이를 연결하는 서까래를 타고 이동했다.
벼룩은 쥐의 피를 빨다 쥐가 죽으면 즉시 근처에 있는 인간에게 옮겨갔다.
4. 신의 징벌인가, 인간의 자충수인가
재앙은 들불처럼 번졌다.
피렌체의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침에 가족과 식사를 한 사람이 저녁에는 조상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저세상으로 갔다."
도시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교회는 다시 한번 종을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양이를 죽이라'는 종소리가 아니었다.
'회개하라'는 절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이 재앙이 여전히 '악마의 소행'이라 믿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남아있던 몇 안 되는 고양이들조차 '병을 옮기는 악마의 짐승'이라며 다시 한번 죽여 없애는 우를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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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묘사한 흑사병 |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런 기괴한 풍경이 목격되었다고 전해진다.
"시체 더미 위에서 쥐들은 왕처럼 군림하는데, 고양이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양이 학살(Cat Massacre)과 흑사병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현대 학계에서도 논쟁이 있다.
흑사병을 옮긴 것은 쥐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나 벼룩이라는 연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233년의 칙령 이후 유럽 내 고양이 개체수가 급감하며 쥐의 창궐을 제어할 생태계적 안전장치가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초한 '종교적 결벽'은 생물학적 재앙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신의 이름으로 죽인 짐승이 사실은 인간을 지키던 유일한 방패였음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 나가는 비명 속에서야 인류는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5. 쥐들의 연회는 끝나지 않았다
유럽의 지도는 붉게 물들었다.
런던에서 파리까지, 빈에서 모스크바까지.
검은 쥐들은 이제 도시의 주인이 되었다.
고양이가 사라진 성당의 제단 위를 쥐들이 가로지르고, 미사 대신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만이 가득했다.
인간은 고립되었고, 자연은 뒤틀렸다.
1233년의 그 겨울밤, 콘라트가 펜 끝으로 휘갈긴 '검은 고양이는 사탄이다'라는 한 문장이, 100년 뒤 인류에게 이토록 처참한 청구서로 돌아올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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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전염병 희생자들의 집단 매장 |
제4부: 역설의 비극, 인간이 초대한 재앙
1. 광신자의 비참한 종말
1233년, 고양이 사냥의 도화선을 당겼던 이단 심문관 콘라트 폰 마르부르크(Konrad von Marburg)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교황의 신임을 등에 업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이단'의 굴레를 씌웠지만, 그가 뿌린 공포의 씨앗은 결국 스스로를 집어삼켰다.
그해 7월 말, 마인츠(Mainz) 근교의 한적한 도로.
콘라트는 말을 타고 이동하던 중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분노한 지역 귀족들이 보낸 자객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화형대에 세웠던 수많은 무고한 이들처럼, 처절한 비명 속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자 독일 전역에서는 "악마를 사냥하던 악마가 죽었다"는 조롱이 섞인 구전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콘라트가 죽었다고 해서 그가 퍼뜨린 '고양이 혐오'의 유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교황의 칙령은 유럽인의 잠재의식 속에 "검은 고양이는 곧 불운이자 사탄"이라는 공식을 깊게 새겨놓은 뒤였다.
2. 흑사병이 남긴 상흔과 뒤늦은 복권
1347년부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노동력이 부족해진 농노들의 지위가 상승하고 봉건제가 흔들리는 등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났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에야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며 사람들은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쥐가 들끓는 도심 한복판에서 고립되어 죽어가는 집들과 달리, 고양이를 몰래 기르거나 고양이가 머물던 외딴 창고 근처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병마를 피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이는 악마의 짐승이 아니라, 쥐의 머리를 한 역병 사탄을 막아주는 신의 방패였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민중들 사이에서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퍼져나갔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럽의 농가와 선박들은 다시 고양이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고양이가 배에 타면 폭풍우를 피하고 역병을 막아준다는 새로운 미신(Superstition)을 만들어내며 그들을 '수호신'으로 극진히 모셨다.
3. 역사의 거울: 복스 인 라마의 교훈
1233년의 '복스 인 라마' 칙령과 그로 인한 고양이 학살은 인간의 무지와 독선이 생태계라는 정교한 시계바늘을 건드렸을 때 어떤 파멸이 오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종교적 결벽증은 눈앞의 '검은 고양이'를 악마로 규정했지만, 정작 그들이 보지 못한 진짜 악마는 쥐의 털 속에 숨어든 벼룩과, 타인의 생명을 제물 삼아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인간의 광기였다.
현대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천적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의 방어막을 허물어버린 인류 최악의 자충수(自充手)로 기록된다.
오늘날 우리는 검은 고양이를 보며 더 이상 사탄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반려 동물로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온기를 나누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800년 전 유럽의 텅 빈 거리와 쥐 떼의 발소리, 그리고 화형대에서 죽어간 이름 없는 생명들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연의 일부를 '악'으로 규정할 때, 그 대가는 반드시 인류 전체의 몫으로 돌아온다."
1233년의 광풍이 잦아든 지 수백 년이 흘렀다.
이제 마르부르크의 광장에도, 파리의 하수구에도 그날의 비명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오늘날 길모퉁이에서 마주치는 검은 고양이의 노란 눈동자 속에, 어쩌면 그 시절 인간의 어리석음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역사의 목격담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13세기 교황령 「Vox in Rama(복스 인 라마, 1233)」와 콘라트 폰 마르부르크(Konrad von Marburg)의 이단 심문 활동을 출발점으로, “검은 고양이=악마”라는 상징이 어떻게 공포와 폭력을 증폭시키는지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실제 역사 기록에는 과장·선동적 서술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지역·시기별로 “고양이 학살”의 규모와 양상은 일률적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고양이 학살이 흑사병을 불렀다’는 직선적 인과는 학계에서도 (논쟁) 지점입니다.
흑사병의 전파는 복합적(쥐·벼룩·인간 기생충 등)이며, 이 글은 “희생양 만들기와 생태 균형 붕괴가 낳는 위험”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인과를 단순화해 서사화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로 단정하기 어려운 요소는 (논쟁)/(전승)으로 읽어주시고, 중요한 수치·연대는 별도 자료로 교차 확인을 권합니다.
This piece dramatizes a debated medieval episode: in 1233 Pope Gregory IX issued the bull Vox in Rama, shaped by inquisitor Konrad von Marburg’s claims about alleged “Luciferian” rites involving a black cat.
The story traces how sensational descriptions could intensify fear, justify persecution, and spark cruelty toward cats in some regions.
It then connects that violence to a larger cautionary theme: removing predators can destabilize urban ecology, letting rats and their fleas spread more easily.
Finally, it pivots to 1347’s Black Death arrival by ship and underscores that the cat-massacre→plague chain is contested; plague dynamics involved multiple hosts and vectors.
The takeaway is about scapegoating, misinformation, and unintended consequences when power sanctifies violence. Konrad’s later death and the slow return of cats show how narratives flip—yet the human cost remains.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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