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 현해탄 비극과 ‘사의 찬미’가 남긴 것 (Yoon Sim-deok)


1926년, 현해탄에 사라진 목소리: 윤심덕 이야기


1926년 8월 4일, 칠흑 같은 바다 위에서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도쿠주마루(德壽丸)'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대마도 근해를 지나고 있었다. 

갑판을 순찰하던 승무원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1등 객실 중 하나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자, 승객은 온데간데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그는 서둘러 객실 불을 켰다. 

배 안은 깊은 잠에 빠진 승객들의 숨소리로 고요했다. 

하지만 이 객실의 주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객실 안에 남겨진 것은 단출했다. 

여행 가방 위에 놓인 메모 한 장과 약간의 팁.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


메모지 끝에는 두 개의 주소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그리고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배에는 비상이 걸렸다. 

엔진이 멈추고 모든 객실에 불이 켜졌다. 

승무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지나온 항로를 수색했지만 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갈 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다뿐이었다.


이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윤심덕(尹心悳)과, 식민지 조선의 연극계를 이끌던 천재 극작가 김우진(金祐鎭)이었다. 

유서 한 장 없이 현해탄의 격랑 속으로 사라진 서른 살 동갑내기 두 예술가의 비극적인 선택은, 곧 식민지 조선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파문이 되어 돌아왔다.


1. 별의 탄생: 평양의 '왈녀', 동경을 꿈꾸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의 가난한 기독교 가정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비록 가난했지만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 덕에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마침내 그녀는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음악학교(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 되었다. 

이는 그녀의 음악적 재능이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그녀의 성격 또한 특별했다.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활달하고 대범한 성격 탓에 '왈녀(曰女)'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신문 기사는 그녀의 파격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큰 키에 옥색 치마를 발뒤축까지 늘어뜨리고, 평안도 사투리로 남자 친구를 만나면 거리낌 없이 외쳤다.

"야, 오랍아! 너 잘 있댔니?"

그리고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봉건적 인습이 강했던 당시 사회에 큰 충격과 동시에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도쿄 유학 시절, 윤심덕은 수많은 유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홍난파, 채동선 등 당대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고, 그녀의 인기는 하나의 사건으로 증명되기도 했다.


• 박정식의 상사병: 니혼대학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열렬히 구애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그는 실연의 충격으로 상사병에 걸려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였고,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수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직 예술을 향해 있었다. 

도쿄음악학교에서 전문적인 성악 훈련을 받으며 대형 오페라 가수의 꿈을 키웠다. 

그녀의 강력하고 풍부한 성량은 모두를 감탄하게 했고, 아무도 그녀의 빛나는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누가 알았을까? 동경의 밤하늘을 수놓았던 이 눈부신 별이, 고국의 차가운 현실 속에서 그토록 빨리 빛을 잃게 될 줄을.


윤심덕


2. 화려한 무대, 그 뒤의 그림자

1923년 귀국한 윤심덕은 곧바로 조선 음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녀의 데뷔 무대는 연일 화제였고,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에 '옥쟁반에 구르는 구슬 소리' 라는 극찬을 보내며 열광했다. 

그녀가 출연하는 음악회는 매번 큰 이슈가 되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화려함은 길지 않았다. 

정통 클래식 음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식민지 조선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대형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슴에 묻은 채, 그녀는 생계를 위해 대중가요와 연극 무대에 서야만 했다.


• 연기력 논란: 그녀는 극단 '토월회'의 주역 배우로 무대에 섰지만, 성악 발성에 익숙한 탓에 대사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기력 부족이라는 혹평 속에 그녀는 배우로서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예술가로서의 좌절보다 더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신여성(新女性)'을 향한 당시 사회의 이중적인 시선이었다. 

조선은 무대 위에서는 새로운 스타를 갈망했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여전히 낡은 잣대로 그녀를 재단하려 했다. 

그녀의 재능에는 환호했지만, 그녀의 자유는 용납하지 못했다. 

그녀의 자유로운 행동과 사생활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곧 각종 스캔들의 표적이 되어갔다.

예술가로서의 이상과 비루한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던 윤심덕. 

그녀의 삶에 곧 운명적인 동반자가 나타났다. 

그녀의 예술적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줄 단 한 사람이었다.


3. 시인과 소프라노: 비극적 운명의 시작

김우진(金祐鎭). 

윤심덕과 동갑내기인 그는 목포 최고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가업을 이어야 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그는 깊은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순례극단 '동우회' 의 고국 순회공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약 두 달간 전국을 함께 돌며 예술과 민족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억압 속에서 꿈이 좌절된 두 예술가의 깊은 공감대, 즉 '예술적 동병상련(藝術的 同病相憐)' 이었다.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던 유부남 김우진과 윤심덕의 관계는 당시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서로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세상은 이들의 관계를 '정사(情死)'로 단정했지만, 주변인들의 증언은 엇갈렸다. 

단순한 연인을 넘어선 예술적 동지였는가, 아니면 세상이 오해한 복잡한 우정이었는가. 

진실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는 그들이 서로를 부르던 애칭에서도 드러난다.

• 김수산(金水山): 김우진의 호.

• 윤수선(尹水仙): 김우진이 윤심덕에게 지어준 애칭. '수산' 곁에 피어있는 '수선화'라는 의미였다.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세상의 거센 비난과 오해에 부딪혔다. 

특히 윤심덕은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추문에 휩싸이게 된다.


4. 추문과 도피: 세상의 돌팔매를 맞다

결정적인 사건은 1925년에 터졌다. 

남동생의 미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윤심덕은 경성의 대부호이자 소문난 호색한이었던 이용문을 만났다. 

이 만남은 '윤심덕이 돈 때문에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되어 그녀의 명예를 난도질했다.

언론과 대중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 

당시 잡지와 신문은 그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 잡지 『신여성』 (1925년 3월호)

• 잡지 『개벽』 (1925년 2월호)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을 견디지 못한 윤심덕은 결국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얼빈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1년 가까이 은거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상의 기억에서 잊혀갈 무렵,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운명이 그녀에게 내민 마지막 기회는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해탄의 검푸른 물결로 향하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초대장이었다.


5.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死의 讚美)

1926년, 윤심덕은 일본 닛토레코드(日東레코드)로부터 음반 취입 제의를 받는다. 

마침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윤성덕을 배웅할 겸,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일본으로 향했다.

경성역에서 그녀를 배웅하던 친구, 극작가 이서구와의 대화는 의미심장했다.

윤심덕: "선물로 뭘 사다드릴까요?" 

이서구: "넥타이나 하나 사다줘요." 

윤심덕: "죽어도 사와요?" 

이서구: "그래,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사서 부치고 죽어요."

단순한 농담이었지만, 이것은 비극적인 예언이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들려온 지 3일 후, 이서구에게는 그녀가 보낸 파란 넥타이가 도착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예정된 녹음을 모두 마친 윤심덕은 음반사 사장에게 특별한 요청을 한다.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 에 자신이 직접 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비극적인 노래, '사의 찬미'가 탄생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이 가사는 단순히 한 개인의 절망을 넘어, 3.1운동의 실패 이후 희망을 잃고 암울한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던 식민지 지식인 사회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대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비탄은 시대의 비탄이었다.

녹음을 마친 그녀는 도쿄에 있던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마침내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시모노세키로 향했고,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 될 '도쿠주마루'에 몸을 실었다. 

그것이 비극으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이었다.


6. 노래는 전설이 되어

두 사람의 실종 사건이 '정사(情死)'로 보도되자 조선 사회는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그녀의 유작 '사의 찬미'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으로 이어졌다. 

음반은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10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살아생전 그녀를 비난했던 대중이, 그녀의 죽음 이후 그녀의 노래에 열광한 것이다.

하지만 유서도,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사건은 끊임없는 의혹을 낳았다. 

그중 가장 끈질기게 제기된 것은 바로 '생존설' 이었다.


• 여동생 윤성덕의 증언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윤심덕은 동생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는 즉시 이태리로 갈 터이니 오랫동안 소식을 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궁금하게 생각지 말라."

• 음모론 

가장 구체적인 음모론은 음반회사가 기획했다는 설이었다. 

'사의 찬미' 음반 판매를 극대화하기 위해 닛토레코드사가 두 사람의 죽음을 기획하고, 그 대가로 3만 원을 주어 이탈리아 로마로 도피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1934년에는 자신이 김옥균의 손자라 주장하는 이가 나타나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기상을 하는 두 사람을 보았다고 주장해 또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 공식 조사 

결국 소문이 끊이지 않자 1930년, 김우진의 유족은 총독부에 공식 수색을 요청했다. 

1931년,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으로부터 "로마에는 해당 인물이 없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는 공식 통보가 오면서 생존설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그 비극성과 미스터리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재창작되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장르
연도
작품명
주연 배우 (윤심덕 역)
영화
1969
윤심덕
문희
영화
1991
사의 찬미
장미희
뮤지컬
2005
사의 찬미
바다
TV 드라마
2018
사의 찬미
신혜선


안현철 감독의 <윤심덕>(1969)


윤심덕의 삶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신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좌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의 이상은 봉건적 사회의 편견과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육신은 현해탄의 차가운 파도에 잠겼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을 넘어 전설이 되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사의 찬미'의 선율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며, 시대의 편견에 맞서 스러져간 한 예술가의 영혼을 애달프게 노래하고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실존 인물 윤심덕·김우진의 삶과 죽음을, 당시 신문·회고·연구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서사형 글입니다. 

사건의 연대와 큰 흐름, 인물 관계는 알려진 기록에 따르되, 일부 구체적인 장면과 대사·심리 묘사는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한 문학적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존설·음모론 등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 범위 안에서만 소개했으며, 단정적인 판단보다는 여러 가능성을 함께 떠올려 보자는 취지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The essay traces the tragic life of soprano Yun Sim-deok, from her rise as the first Korean woman trained in Western opera to her disappearance with playwright Kim U-jin in 1926. 

It recalls her childhood, bold “new woman” image and Tokyo studies, her short stardom in colonial Korea, then the scandals, gossip and money troubles that broke her artistic hopes. 

The story culminates in the recording of “Praise of Death,” her last voyage with Kim from Japan, their presumed double suicide in the Korea Strait and the posthumous hit of the song. 

It closes by showing how rumours, inquiries and later films and musicals turned Yun into a symbol of a generation’s despair and desire for freedom.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