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명장 장문휴, 당나라의 심장을 겨누다: 등주 공격의 전말과 역사적 의의
잠자는 바다를 깨운 발해의 포효
732년, 발해의 명장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수군은 황해를 건너 대제국 당나라의 심장부인 산둥반도 등주(登州)를 급습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고구려를 계승한 신흥 강국 발해가 당나라라는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에 맞서 자신들의 자주성과 막강한 군사적 역량을 만방에 과시한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장문휴의 등주 공격은 발해가 더 이상 변방의 세력이 아님을 선포한, 잠자는 바다를 깨운 우렁찬 포효와 같았다.
1. 등주 공격의 서막: 왜 발해는 당을 공격했는가?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한 결정은 복합적인 국제 정세와 깊어지는 외교적 갈등 속에서 내려졌다.
당대 동북아시아의 긴장 관계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 핵심 갈등 요인
◦ 흑수말갈 문제: 본래 발해의 영향권 아래에서 조공을 바치던 흑수말갈이 726년, 발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발해의 동북방 지배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논쟁)
◦ 당의 흑수주 설치: 당 현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흑수말갈 지역을 당의 '흑수주(黑水州)'로 편입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이는 발해의 배후에 친당(親唐) 세력을 심어 발해를 견제하려는 명백한 의도였다. 발해 무왕(武王)에게 이 조치는 과거 고구려가 당-신라 연합에 의해 멸망했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심각한 군사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 대문예의 망명: 무왕은 흑수말갈의 배신을 응징하고자 동생 대문예(大文藝)에게 정벌을 명했다. 그러나 과거 당나라에서 숙위로 생활하며 그 국력을 직접 목도했던 대문예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난날 우리 고구려가 강성하여 30만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와 맞섰지만 결국 멸망했다. 지금 발해의 병력은 불과 고구려의 3분의 1이다."라며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키며 출정을 반대했다. 이처럼 발해 지배층 내부의 전략적 이견이 표출된 가운데, 형의 진노를 산 대문예는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당나라로 망명하고 만다.
◦ 외교적 파국: 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망명한 동생을 처벌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당 현종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대문예에게 벼슬을 내리며 보호했다. 대국으로서의 신의를 저버린 당의 기만적인 태도에 분노한 무왕은 결국 무력 사용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로써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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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문휴 장군의 등주 전투 |
2. 장문휴, 발해의 검이 되어 등주를 향하다
732년 9월, 무왕의 명을 받은 장문휴 장군은 발해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심장을 겨누었다.
그의 칼끝이 향한 곳은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닌, 당나라의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 공격 개요
◦ 시기: 732년 9월
◦ 지휘관: 장문휴 (張文休)
◦ 공격 목표: 당나라의 등주 (登州, 현재 산둥성 펑라이시). 이곳은 동아시아 제1의 무역항이자, 과거 수·당이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전함과 보급선을 집결시켰던 해군기지였다. 등주를 타격하는 것은 당의 경제적 번영에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과거부터 이어져 온 잠재적 침공 발판을 선제적으로 무력화하는 고도의 전략적, 상징적 행위였다.
◦ 전개: 장문휴가 이끈 발해 수군은 황해를 가로질러 등주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발해군의 신속하고 맹렬한 공격에 당군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 결과: 발해군은 등주를 함락하고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했다. 또한, 성내의 당군을 거의 섬멸하고 주요 군사 및 기반 시설을 철저히 파괴한 뒤, 당의 본격적인 반격군이 도착하기 전에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3. 장문휴의 군사적 리더십과 전술 분석
등주 공격의 성공은 발해의 군사적 역량과 이를 지휘한 장문휴의 탁월한 리더십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3.1. 과감한 선제타격 전략
당의 흑수말갈 포섭과 대문예 비호 등 잠재적 침공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발해는 수세적인 방어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적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하는 공세적인 선제공격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당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결단이었으며, 무왕의 결단력과 이를 완벽하게 실행해 낸 장문휴의 탁월한 지휘 능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3.2. 제해권 장악과 기습 상륙 능력
발해 수군이 황해라는 거친 바다를 건너 당의 본토를 직접 공격했다는 사실은 당시 발해가 상당한 수준의 제해권과 항해술을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적지에 신속하게 상륙하여 목표를 점령하는 기습 상륙 작전 능력은 발해군이 고도로 훈련된 정예 병력이었음을 증명한다.
3.3. 목표 달성 후 신속한 철수
장문휴의 군대는 등주자사를 살해하고 군사 시설을 파괴하는 핵심 목표를 달성한 뒤,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신속하게 철수했다.
이는 당의 대규모 반격군이 조직되기 전에 전장을 이탈하는 지극히 계획적이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장문휴의 지휘 아래 발해군이 얼마나 잘 훈련되고 통제된 군대였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등주 공격의 파장과 역사적 의미
장문휴의 등주 공격은 동아시아 정세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발해의 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4.1. 당나라와 신라의 반격, 그리고 실패
등주 공격에 격분한 당 현종은 바로 그 망명자 대문예(大門藝)에게 군사를 주어 발해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는 협공 작전을 요청했다.
신라는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군사를 출병시켰으나, 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인해 군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아무런 성과 없이 퇴각해야 했다.
4.2. 마도산 전투와 발해의 군사적 자신감
당의 반격에 굴하지 않은 무왕은 이듬해인 733년, 거란과 연합하여 당의 마도산(馬都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발해-거란 연합군은 『구당서』에 따르면 6천, 『신당서』에 따르면 1만 명에 달하는 당군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등주 공격에 이은 마도산 전투의 승리는 발해의 군사적 위상을 동아시아에 확고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3. '해동성국'의 초석을 다지다
등주 공격과 마도산 전투는 개별적 사건이 아닌, 발해가 기획한 계산된 2단계 군사 작전의 성격을 띤다.
첫째, 등주 공격을 통해 발해는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당의 안보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둘째, 마도산 전투의 대승으로 육상에서의 군사적 우위와 거란과의 연합을 통한 외교적 역량을 입증했다.
이 연속적인 군사적 압박은 발해의 국제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훗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의 초석이 되었다.
1. 대등한 외교 관계 수립: 당은 더 이상 발해를 변방의 복속 세력으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일련의 군사적 승리는 당이 발해를 동북 지역의 강력한 대등 상대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군사적 자긍심 고취: 외부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역으로 대제국을 공격하여 승리한 경험은 발해인들에게 엄청난 국가적 자신감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는 발해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3. 고구려 계승 국가의 위상 확립: 당나라에 대한 군사적 승리는 발해가 과거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의 기상과 힘을 이어받은 강력하고 자주적인 국가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가장 확실한 증표였다.
역사에 기록된 발해의 용맹, 장문휴
장문휴의 등주 공격은 발해 역사상 가장 빛나는 군사적 승리 중 하나이자, 한국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수세적인 방어의 역사를 넘어, 우리 역사에도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공세적이고 주체적인 외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사례이다.
장문휴와 발해 수군의 용맹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진정한 '해동성국'이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의 이정표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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