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제주 설화: 영웅·여신·해녀 조상신이 만든 ‘이야기의 섬’ (The Folklore of Jeju)


신비로운 제주의 옛이야기: 처음 만나는 제주 설화


이야기의 섬, 제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화산이 빚어낸 독특한 풍경과 에메랄드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 예로부터 '이야기의 섬'이라 불렸습니다.

제주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 속에는 화산섬의 거친 자연과 싸우며 삶을 일궈온 제주 사람들의 지혜와 상상력이 오롯이 녹아있습니다.

제주 설화는 다른 지역의 이야기와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들의 서사입니다. 

제주 설화 속 여성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때로는 슬픈 운명을 이겨내고 마을을 지키는 신(당신(堂神))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남성 못지않게 강인한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어야 했던 제주 여성들의 삶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이 글은 제주 설화의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당신의 첫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웅장한 영웅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의 이야기, 그리고 제주 땅 곳곳에 새겨진 전설까지. 

이 글을 통해 당신은 제주라는 섬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신이 된 한 영웅의 위대한 여정을 따라가 볼까요?


1장: 신이 된 영웅의 위대한 여정 - 궤눼깃당본풀이

1-1. 이야기 속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무쇠상자에 갇힌 채 바다를 떠돌던 아이. 

그 아이가 용왕의 사위가 되고, 바다 건너 큰 나라의 난리를 평정한 뒤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금의환향하는 이야기,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나요? 

'궤눼깃당본풀이'는 바로 그런 장대한 영웅의 일대기를 담은 제주 신화입니다.


제주도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궤네기동굴


1-2. 이야기의 주인공들

'궤눼깃당본풀이'의 핵심 인물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이들의 관계를 알면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해집니다.


등장인물
소개
어린 도령
벡주또의 아들. 아버지에게 버림받지만 용왕의 사위가 되고 강남천자국의 영웅이 되는 비범한 인물.
소천국
도령의 아버지. 아들이 자신을 희롱하자 화가 나 무쇠상자에 가두어 바다에 버리는 비정한 인물.
용왕과 막내딸
바다에 버려진 도령을 구해준 인물. 막내딸은 도령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와 혼인함.
강남천자
도령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군사를 내어주어 나라의 난리를 평정하게 하는 인물.


1-3. 흥미진진한 이야기 줄거리

이제, 파란만장한 영웅의 일대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 생생하게 펼쳐보겠습니다.


1) 버려진 아이, 바다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

어머니 벡주또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 살이 되자 아버지 소천국을 찾아갑니다. 

아이는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의 수염을 당기고 가슴을 치며 놀았지만, 소천국은 이를 희롱으로 여겨 크게 노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들을 무쇠상자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바다에 던져버리고 맙니다.

무쇠상자는 하염없이 떠다니다 용왕국의 산호수 가지에 턱 걸렸습니다. 

용왕은 세 딸을 차례로 보내 상자를 가져오게 했지만, 두 언니는 해내지 못하고 오직 막내딸만이 상자를 열 수 있었습니다. 

상자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옥처럼 잘생긴 도령이 나타났습니다. 

도령은 자신이 "강남천자국의 난리를 평정하러 가다 풍파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용왕은 그를 사위로 삼고자 했고, 도령의 뜻에 따라 막내딸과 혼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도령, 보통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에 돼지나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우는 엄청난 식성을 자랑했죠. 

매일같이 고기를 대접하던 용왕국의 창고는 이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더는 사위를 먹일 수 없게 된 용왕 부부는 결국 딸과 사위를 다시 무쇠상자에 넣어 바다로 떠나보냈습니다.


2) 강남천자국을 구한 영웅

부부가 탄 무쇠상자는 강남천자국 해안에 닿았습니다. 

상자는 그곳에서 신비로운 조화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강남천자가 황봉사를 불러 점을 치게 하니, "천자께서 직접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해야 상자가 열릴 것"이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천자가 점괘대로 행하자 과연 상자 문이 열리며 옥 같은 도령과 아기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도령은 용왕국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진짜 출신과 목적을 밝히며 "조선 제주도에서 세변 난리를 막으러 왔다"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의 기개를 높이 산 천자는 즉시 그를 도원수로 삼고 군사를 내주었습니다. 

도령은 전쟁터에서 머리가 둘, 셋, 넷 돋은 무시무시한 장수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단숨에 나라의 난리를 평정했습니다.


3) 금의환향하여 신이 되다

큰 공을 세운 도령에게 천자는 제후의 자리와 큰 상을 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도령은 이 모든 것을 정중히 거절하며 그의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전선을 만들고 많은 군사를 거느린 뒤, 당당하게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버려졌던 아이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어 고향 땅에 금의환향했습니다.


1-4. 이야기 속 숨은 의미 파헤치기

이 이야기는 단순히 흥미로운 영웅담을 넘어, 제주 사람들의 생각과 기상을 담고 있습니다.

• 첫째, 시련의 의미: 주인공에게 '바다에 버려짐'이라는 시련은 죽음이나 좌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용왕국, 강남천자국이라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영웅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이는 어떤 고난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제주 사람들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 둘째, 제주인의 기상: 제주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다 건너 거대한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는 과거부터 바다를 통해 외부 세계와 활발히 교류하며 넓은 세계관을 가졌던 제주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합니다. 

이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땅이 아니라, 오히려 바다를 길 삼아 더 큰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섬사람들의 대담한 세계관이 담긴 서사입니다.

영웅의 위대한 여정을 따라가 보았으니,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한 여성의 당찬 이야기를 만나볼 차례입니다.


2장: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 - 가믄장아기 이야기 (삼공본풀이)

2-1. 이야기 속으로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 라는 부모의 질문에 "저는 제 복(福)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당당히 외친 소녀가 있습니다. 

이 대답 하나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거부가 되어 자신을 버린 부모까지 구원하는 여성. 

'삼공본풀이'는 바로 이 '가믄장아기'의 감동적인 성공담이자, 그녀가 어떻게 운명의 신이 되었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2-2. 이야기의 주인공들

운명에 맞선 가믄장아기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등장인물
소개
가믄장아기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셋째 딸. "제 복으로 산다"고 답했다가 쫓겨나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부자가 되어 부모까지 구원하는 주체적이고 지혜로운 인물.
부모
가믄장아기가 태어난 후 부자가 되었음에도, 딸의 대답에 노여워하며 내쫓는 인물. 나중에 가난한 맹인 거지가 되어 딸과 재회함.
은장아기, 놋장아기
가믄장아기의 언니들. 부모 덕에 산다고 대답하여 사랑받지만, 가믄장아기와는 대조적인 인물.
마퉁이
가믄장아기가 쫓겨난 후 만난 짝. 함께 마를 파던 구덩이에서 금덩이를 얻어 부자가 됨.


2-3. 흥미진진한 이야기 줄거리

가믄장아기의 시점에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제 복으로 살겠습니다" - 쫓겨난 셋째 딸

옛날, 강이영성과 홍운소천 부부는 몹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세 딸을 낳았는데, 첫째는 사람들이 은그릇에 밥을 먹여 '은장아기', 둘째는 놋그릇에 밥을 먹여 '놋장아기'라 이름 지었습니다. 

하지만 셋째는 나무 바가지에 밥을 먹여 '가믄장아기'라고 불렀죠. 

신기하게도 막내 가믄장아기가 태어난 뒤로 집안의 살림이 점점 피어나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딸들이 열다섯이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딸들을 하나씩 불러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 덕에 이리 잘 먹고 잘 사느냐?" 첫째와 둘째 언니는 모두 "아버지, 어머니 덕분입니다"라고 대답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믄장아기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덕도 아니고, 제 배꼽 아래 달린 제 복으로 살아갑니다." 

이 대답에 부모는 크게 노하여 가믄장아기를 집에서 내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시련을 기회로 바꾸다

맨몸으로 쫓겨난 가믄장아기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길에서 마퉁이를 만나 함께 살며 마를 캐서 겨우 입에 풀칠했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마를 파던 구덩이에서 단단한 것이 만져졌습니다. 

더 깊이 파보니, 그것은 바로 눈부신 금덩이였습니다! 

가믄장아기와 마퉁이는 금덩이 덕분에 하루아침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3) 부모를 구원하고 운명의 신이 되다

큰 부자가 된 가믄장아기는 자신을 내쫓은 부모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부모님이 재산을 모두 잃고 눈까지 멀어 동냥젖으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녀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온 동네 거지를 모두 초대하는 '걸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잔치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으로 들어온 맹인 거지 부부가 바로 그녀의 부모님이었습니다. 

가믄장아기는 부모님께 음식을 대접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그 순간 놀랍게도 부모님의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부모를 구원한 가믄장아기는 이후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맹인 부부를 묘사한 무신도


2-4. 이야기 속 숨은 의미 파헤치기

가믄장아기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과 울림을 줍니다.

• 첫째, 주체적인 여성상: "내 운명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며 부모나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한 가믄장아기의 모습은 제주 여성의 강인함과 주체성을 상징합니다. 

그녀는 시련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와 용기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줍니다.

• 둘째, 진정한 효의 의미: 자신을 버린 부모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 구원하는 가믄장아기의 행동은 진정한 효와 용서의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는 단순한 봉양을 넘어선, 더 깊고 넓은 차원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가믄장아기처럼 신이 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제주 설화 속에 더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슬픈 운명을 신성함으로 승화시킨 또 다른 여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3장: 슬픔을 넘어 신이 된 여인들 - 양씨아미와 오설룡 따님아기

3-1. 이야기 속으로

제주 설화에는 유독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인물, 특히 여성들이 죽어서 마을이나 집안을 지키는 '조상신'이 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그 강한 한(恨)을 풀어줌으로써 오히려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제주 사람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이제, '양씨아미'와 '오설룡 따님아기'의 슬프고도 신성한 이야기를 통해 그 세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3-2. 운명을 받아들인 무녀(巫女) - 양씨아미본풀이

1) 이야기 요약

예촌 양씨 집안의 '양씨아미'는 태어날 때부터 신을 모셔야 할, 즉 심방(무당)이 될 운명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일곱 살 때부터 원인 모를 병을 앓으며 자랐는데, 열다섯 되던 해 마을의 큰 굿판에 구경을 갔다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춤을 추며 무녀가 될 운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하늘과 땅의 일을 훤히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심방이 되기로 결심한 양씨아미를 위해, 오라버니는 굿에 필요한 도구(무구)를 구하러 떠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라버니는 돌아오는 길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오라버니의 죽음을 알게 된 양씨아미는 깊은 슬픔에 잠겨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고, 이후 집안을 지키는 조상신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2) 숨은 의미: 운명과 희생

'양씨아미본풀이'는 제주 사회에서 '심방'이라는 존재가 짊어져야 했던 운명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특히, 이 이야기는 같은 운명을 타고나도 여성이 심방이 되는 과정은 남성에 비해 훨씬 험난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기 쉬웠음을 암시합니다. 

안타깝게도 양씨아미의 비극은 제주 설화 속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옛 제주에서는 같은 운명을 타고나도 여성이 심방이 되는 길이 남성에 비해 훨씬 험난했다고 전해집니다.

"여성으로 심방이 될 운명을 타고 났으나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조상신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남성으로 같은 운명을 타고 난 경우에는 대체로 뜻을 이루거나 설령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고도 조상신으로 대접받는 것이 예사이다."


양씨아미 설화


3-3. 욕망으로 버림받은 딸 - 오설룡 따님아기 본풀이

1) 이야기 요약

오설룡이라는 큰 부잣집에 귀하게 얻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에게는 밤마다 몰래 마구간으로 가 마소의 간을 빼먹는 기이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딸의 손발을 잘라 다른 마을로 보내버리는 비정한 결정을 내립니다.

버려진 딸은 남의 집 첩으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죽은 뒤, 오설룡의 집에서는 다시 마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억울하게 죽은 딸의 혼 때문이라 여겼고, 그때부터 굿을 할 때마다 딸의 영혼을 위로하며 집안의 조상신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2) 숨은 의미: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

마소의 간을 빼먹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욕망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옛 사람들의 두려움과 동시에, 그 힘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줍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영혼을 외면하거나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신'으로 모심으로써 그 한을 풀어주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 이는 제주 사람들이 가진 독특한 생사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 시선을 인물에서 땅으로 옮겨, 제주의 특정 장소에 얽힌 거대한 전설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4장: 제주 땅에 새겨진 전설 - 용머리 해안 이야기

4-1. 이야기 속으로

제주 남서쪽 산방산 아래에는, 마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머리를 들고 바다로 뛰어드는 듯한 모양의 해안 절벽이 있습니다. 

바로 '용머리 해안'입니다. 

바람과 파도가 수만 년에 걸쳐 빚어낸 이 기이하고 멋진 풍경 뒤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의 황제까지 긴장하게 만든 거대한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4-2. 이야기의 배경과 인물

용머리 해안에 얽힌 전설의 배경과 핵심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인물/배경
소개
용머리 해안
제주에 왕이 태어날 기운이 서린 '왕후지지(王侯之地)'.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 형상을 하고 있음.
중국 진시황
천하를 통일한 황제. 제주도에서 왕이 태어날 것을 우려하여 용의 맥을 끊으려 함.
고종달
진시황의 명을 받은 풍수 술법에 능한 신하. 용머리 해안의 맥을 끊는 임무를 수행함.


4-3. 흥미진진한 이야기 줄거리

이야기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궁궐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날, 진시황은 "동쪽 바다 건너 제주도라는 섬에 왕이 태어날 땅, 즉 왕후지지(王侯之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깊은 근심에 빠집니다. 

자신의 천하에 또 다른 왕이 나타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시황은 즉시 풍수 술법에 능한 신하 '고종달'을 제주도로 보내, 왕의 기운을 품은 땅의 맥을 끊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제주에 도착한 고종달은 산세를 살피며 왕후지지를 찾아 헤맸고, 마침내 산방산 아래 바다로 힘차게 뻗어 나가는 용의 형상을 한 땅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용머리 해안이었죠.

고종달은 용의 기운을 끊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는 먼저 용의 꼬리 부분을 한 칼에 내리치고, 이어 등 부분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고종달이 칼을 내리치자, 차가운 바위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뻘건 피가 샘솟듯 흘러내렸고, 저 멀리 거대한 산방산마저 '도르르...' 하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통째로 몸을 떨었습니다.

이 일로 용의 맥이 끊겨 제주도에서는 끝내 왕이 태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용머리 해안에 가보면 바위 중간중간이 마치 칼로 자른 듯 뚝 끊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때 고종달이 남긴 흔적이라고 전해집니다.


용머리 해안


4-4. 이야기 속 숨은 의미 파헤치기

이 짧고 강렬한 전설은 제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 첫째, 제주에 대한 자부심: "우리 땅이 중국의 황제마저 두려워할 만큼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기운을 품고 있었다"는 설정은 제주라는 공간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과 긍지를 표현합니다. 

비록 전설 속에서 왕의 탄생은 좌절되었지만, 그만큼 신성하고 특별한 땅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 둘째, 역사적 상상력: 실제 역사적 인물인 진시황을 이야기 속에 등장시켜, 제주의 독특한 지형 형성을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연결 짓는 제주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바위의 모양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땅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입히는 창의적인 방식입니다.


5장. 제주의 창조의 신 설문대할망

5-1. 누구일까요?: 제주의 창조 여신

설문대할망은 제주 섬을 만든 거대한 몸집의 창조 여신입니다. 

그녀의 규모가 얼마나 상상 초월이었는지 궁금하신가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눕고, 그 발끝은 바다 건너 멀리 관탈섬에 닿았다고 합니다. 

한라산 정상에서 관탈섬까지의 거리가 무려 40km가 넘으니, 그 어마어마한 거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설문대할망, 전우익 作, 2016년


5-2. 무엇을 만들었나요?: 제주 곳곳에 남은 신의 흔적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토록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제주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설문대할망의 손길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 한라산과 오름: 치마폭으로 흙을 퍼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낡은 치마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사이로 흘러내린 흙 부스러기들이 제주 전역에 흩어져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 백록담과 산방산: 빨래를 하려고 한라산에 앉았는데, 산봉우리가 너무 뾰족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꼭대기를 툭 떼어 던져버리니 그것이 산방산이 되었고, 움푹 파인 자리에는 물이 고여 백록담이 되었습니다.

• 우도: 설문대할망이 눈 오줌이 너무 급해 육지와 섬 사이에 다리를 놓았는데, 그만 오줌 줄기에 육지와 연결된 부분이 쓸려나가 우도라는 섬이 되었다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 기타 흔적들: 이 외에도 다랑쉬 오름의 분화구는 그녀의 주먹 자국이며, 성산일출봉의 등경돌은 등잔으로, 한천의 족감석은 족두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5-3.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신의 비극적인 마지막

제주를 창조한 위대한 여신이었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두 가지 비극적인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1. 물장오리 설화: 자신의 큰 키를 자랑하며 여러 연못의 깊이를 재던 설문대할망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한라산의 '물장오리'에 들어갔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2. 오백장군 설화: 500명의 아들을 먹이기 위해 거대한 솥에 죽을 끓이다가, 발을 헛디뎌 솥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죽을 먹었던 아들들은 뒤늦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슬피 울다 모두 바위가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한라산 영실의 오백장군 바위입니다.


5-4. 그래서 설문대할망은?: 신화이면서 전설인 이야기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는 '신화'와 '전설'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어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계속됩니다.

신화(神話)로 보는 이유: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의 면모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전설(傳說)로 보는 이유: 산방산, 오름 등 구체적인 증거물(장소)과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쟁 자체가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제주 사람들의 삶과 자연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바다를 품은 해녀, 구슬할망

6-1. 해녀들의 조상신

구슬할망은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나주 김씨 집안의 조상신으로 모셔지는 분입니다. 

그녀의 이름 '구슬할망'은 그 자체로 그녀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진주(구슬)를 캐던 할머니'라는 뜻과 동시에, 제주 방언의 발음을 빌리면 '벼슬(구실)을 한 할머니'라는 뜻을 품은 절묘한 언어유희입니다. (구실할망본풀이)

설문대할망이 태생부터 초월적인 신이었던 것과 달리, 구슬할망은 육지에서 온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부와 명예를 얻고 마침내 신으로 추앙받게 된, 매우 인간적인 신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슬할망


6-2. 한 편의 인생 역전 드라마

한양의 양반집 딸에서 제주 해녀의 조상신이 되기까지, 구슬할망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1. 우연한 만남: 한양의 허 정승 댁 딸이었던 그녀는 부모에게 쫓겨나 길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주 특산물을 진상하러 왔던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의 '김 사공'을 만나게 됩니다.

2. 제주로의 입도: 그녀는 김 사공에게 애원하여 그의 도포 자락에 숨어 몰래 제주로 들어와 숨어 지내게 됩니다.

3. 해녀가 되다: 해녀들의 모습을 본 그녀는 스스로 물질을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는 곧 해녀 무리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상군 잠수가 되었습니다.

4. 부와 명예: 신기하게도 그녀가 잡는 전복마다 값진 진주가 가득했습니다. 

이 덕분에 김 사공과 그녀는 큰 부자가 되었고, 진주를 임금께 바쳐 남편은 종2품 벼슬인 '동지(同知)'를, 자신은 '구슬할망'이라는 칭호와 함께 큰 상을 받게 됩니다.

5. 조상신이 되다: 아홉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어서도 너희 후손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될 것이니 나를 잘 위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렇게 그녀의 신앙은 아홉 딸을 통해 딸에서 딸로 이어지는 독특한 모계 계승의 전통을 남기게 됩니다.


6-3. 제주 여성들의 꿈과 희망

거대한 창조신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것과 달리,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구슬할망의 마지막은 제주의 모든 여성들이 꿈꾸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상신이 억울한 죽음 이후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으로 모셔지는 반면, 구슬할망은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개척하고 스스로 조상신이 된 '비극이 아닌 행복한 결말'을 가졌습니다.

본래 한 가문의 수호신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거친 바다에서 고된 물질을 하며 살아가야 했던 제주 해녀들과 여성들의 부와 성공에 대한 간절한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기에 모든 제주 여성의 마음속에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설문대할망과 구슬할망은 제주의 자연과 사람을 대표하는 두 얼굴입니다. 

두 여신의 특징을 비교하면 그 차이점과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분
설문대할망 (창조의 신)
구슬할망 (해녀의 신)
정체
거인, 제주 섬 창조 여신
육지 출신 여성, 해녀의 조상, 나주 김씨 집안의 수호신
규모
우주적, 초월적 (섬과 산을 만듦)
인간적, 현실적 (물질로 부를 축적)
주요 활동
제주 지형 창조 (한라산, 오름 등)
물질, 진주 채취, 진상, 가문 일으키기
삶의 결말
비극적 죽음 (물에 빠지거나 솥에 빠짐)
행복한 삶을 누리고 스스로 조상신이 됨
의미
제주의 자연과 지형의 유래를 설명하는 '신화'
제주 여성(해녀)의 강인한 생명력과 꿈을 담은 '성공 신화'


결국 두 할머니의 이야기는 제주의 바람과 돌, 그리고 파도소리에 새겨진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며,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가장 제주다운 목소리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남을 제주 이야기

지금까지 우리는 제주의 신비로운 이야기 속을 여행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세상을 구한 영웅의 이야기('궤눼깃당본풀이')부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당찬 여성의 삶('가믄장아기'), 슬픔을 넘어 마을의 수호신이 된 여인들의 이야기('양씨아미'와 '오설룡 따님아기'), 제주의 땅에 새겨진 거대한 전설('용머리 해안'), 그리고 제주섬 창조의 신('설문대할망')과 해녀의 조상 나주 김씨 집안의 수호신('구슬할망')까지.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삶을 일궈온 제주 사람들의 정신과 지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던 독특한 세계관이 담겨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앞으로 당신이 제주를 여행하거나 제주 사람들을 만날 때, 오늘 만난 이 이야기들을 떠올려보세요. 

제주의 바람과 돌, 오름과 바다가 이전과는 다른, 더욱 깊고 다정한 의미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제주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남아 빛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제주 지역의 본풀이(무가)·설화·지명 전승을 바탕으로, 독자가 흐름을 따라가기 쉽도록 장면 전개와 문장 호흡을 다듬어 서사적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같은 이야기도 마을·심방 계통·채록 시기·구술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행지 정보처럼 활용하실 경우에는 현지 안내문·지역 자료집·공식 문화 유산 안내를 함께 확인해 주세요.


This post introduces Jeju’s folktales as heritage. In 'Gwenaegitdang-bonpuri,' a child abandoned in a chest survives, weds the Dragon King’s daughter, returns, and is worshiped as a deity. 

In 'Samgong-bonpuri,' Gamyeongjangagi is cast out for claiming she lives by her own luck; she survives hardship, finds fortune, restores her parents, and becomes a god of fate. 

Two tragic tales follow: Yangssi Ami dies after her brother’s death and is enshrined as an ancestor spirit; O Seollyong’s daughter is banished for a taboo appetite and later appeased as a household deity. 

Yongmeori Coast is tied to Qin Shi Huang’s envoy who 'cuts' a dragon vein to block a future king. 

Last, Seolmundae Halmang shapes Jeju’s mountains but meets tragedy, while Guseul Halmang, a haenyeo ancestress, earns honor through pearl diving and passes worship through daughters. 

Together, tales frame Jeju as hardship a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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