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시대를 깨운 계몽의 거인
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이자, 작가, 과학자, 발명가, 외교관, 출판인을 아우르는 역사상 전례 없는 '만능인(polymath)'이었다.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 서사를 넘어, 신생 국가 미국의 정체성과 가치관의 원형을 빚어냈다.
식민지의 단합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헌신했던 그의 노력은 그에게 '최초의 미국인(The First American)'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으며,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그를 "자신의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인이자 미국이 어떤 사회가 될 것인지를 창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온화하고 유머러스하며 타협을 중시하는 프랭클린의 모습은 그의 절반에 불과하다.
역사학자 조너선 R. 덜(Jonathan R. Dull)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그 이면에는 미국 독립이라는 대의를 향한 "거의 광적인 열정", 조지 3세와 왕당파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의 "허영심, 자부심, 야망"으로 가득 찬 강인한 혁명가의 초상이 숨겨져 있다.
이 평전은 전설 속의 현인과 역사를 바꾼 무자비한 혁명가라는 두 얼굴을 아우르며, 시대를 깨운 계몽의 거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입체적인 삶을 깊이 탐구하고자 한다.
제1장: 보스턴의 소년, 시대의 정신을 품다 (1706–1723)
벤자민 프랭클린의 유년기는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특성, 즉 자수성가 정신과 기존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토대가 되었다.
보스턴의 엄격한 청교도 사회에서 보낸 이 시기는 정규 교육의 한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고, 억압적인 환경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터득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청교도의 교리는 거부했지만, 그 정신, 즉 엄격한 자기 수양, 공공 봉사, 그리고 세속적 성공을 통한 가치 증명이라는 윤리적 운영체계는 평생 그의 삶을 지배했다.
그의 초기 생애는 평생에 걸친 자기계발과 지식 탐구의 원동력이자, 훗날 미국적 가치의 상징이 될 정신적 씨앗을 틔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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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자민 프랭클린 |
청교도적 배경과 제한된 교육
프랭클린은 1706년 1월 17일, 보스턴의 양초 및 비누 제조업자였던 조사이어 프랭클린의 17명의 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의 정규 교육은 단 2년으로 끝나야 했다.
교육에 대한 갈증은 그를 책의 세계로 이끌었고, 그는 스스로를 '탐욕스러운 독서가(voracious reading)'로 만들었다.
학교 교육의 부재는 오히려 그에게 제도권 밖의 광범위한 지식을 탐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공으로서의 첫걸음과 '사일런스 두굿'
12세가 되던 해, 프랭클린은 형 제임스가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견습공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인쇄 기술을 익혔지만, 그의 창의적 열망은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형이 발행하던 신문 《뉴잉글랜드 커런트(The New-England Courant)》에 글을 기고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자, 그는 기지를 발휘했다.
'사일런스 두굿(Silence Dogood)'이라는 재치 있는 중년 과부의 가명을 빌려 쓴 편지를 몰래 신문사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사회 풍자가 담긴 이 편지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마을 전체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나중에야 이 인기 기고가가 자신의 동생임을 알게 된 제임스는 불쾌해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프랭클린은 처음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필력의 힘과 억압에 맞서는 자유로운 언론의 가치를 체감했다.
그는 카토의 편지를 인용하여 "사상의 자유 없이는 지혜도 없고, 언론의 자유 없이는 공공의 자유도 없다"는 신념을 일찌감치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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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이 사일런스 두굿 이라는 가명으로 1722년 7월 2일부터
9일 사이에 발행된 《뉴잉글랜드 쿠란트》 에 기고한 에세이 |
필라델피아로의 탈출
1723년, 17세의 프랭클린은 더 이상 형의 권위적인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견습 계약을 파기한 채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
당시 견습 계약 파기는 법을 어기는 행위였고,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 대담한 결단은 그의 강한 독립 정신과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추구하는 용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무일푼으로 도착한 필라델피아는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보스턴에서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프랭클린의 반항 정신과 실용주의적 사고를 형성한 용광로였다.
정규 교육의 결핍은 그를 자기 주도적 학습으로 이끌었고, 형의 억압은 그에게 자유로운 표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다져진 그의 독립심과 실용적인 지혜는 이제 필라델피아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힘으로 발현될 준비를 마쳤다.
제2장: 인쇄공에서 필라델피아의 거인으로 (1724–1748)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프랭클린은 단순한 인쇄 기술자를 넘어, 시민 사회의 기틀을 다지고 계몽주의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사회 개혁가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인의 부와 명성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성공을 공동체의 발전과 지식의 대중화를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
이 장에서는 그가 어떻게 출판업으로 성공을 거두고, 다양한 시민 단체를 설립하며 필라델피아를 북미 식민지 최고의 도시로 이끌었는지 조명한다.
출판인으로서의 성공
23세가 되던 1729년,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가제트(The Pennsylvania Gazette)》를 인수하여 식민지에서 가장 성공적인 신문으로 키워냈다.
그의 성공은 혁신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는 독자 투고란을 마련해 대중의 참여를 유도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또한 1732년부터는 '리처드 손더스(Richard Saunders)'라는 필명으로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k)》을 출간했다.
이 연감은 달력, 일기예보와 더불어 실용적인 격언들을 담아 매년 약 1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에게 막대한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A penny saved is a penny earned (절약한 1페니는 번 1페니와 같다)"와 같은 격언들은 단순한 문구를 넘어, 당시 미국인들에게 근면과 절약이라는 실용적인 가치를 심어주며 미국적 정신의 기틀을 마련했다.
시민 사회의 설계자
프랭클린은 개인의 성공을 공동체 발전으로 연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계몽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사회적 실험을 필라델피아에서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도시가 마주한 결핍을 하나씩 해결하며 현대 도시의 사회적, 지적 기반 시설을 구축했다.
지식 교류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1727년, "자신과 공동체를 개선하고자 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장인들의 모임"인 준토(Junto) 클럽을 조직했다.
이 클럽에서 책의 부족함을 절감하자, 1731년 미국 최초의 회원제 도서관인 필라델피아 도서관 회사를 설립하여 지식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도시의 안전 문제에 눈을 돌려 1736년에는 미국 최초의 자원 소방대인 유니언 소방대를 창설했다.
지적 탐구의 범위를 넓혀 1743년에는 북미 전역의 과학자들이 발견과 이론을 공유하는 미국 철학 학회를 창립했으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749년에는 고전 중심에서 벗어나 실용 학문을 가르치는 혁신적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다.
이처럼 그는 필라델피아를 지식과 협력의 중심지로 체계적으로 설계해 나갔다.
자기 완성을 위한 13가지 덕목
프랭클린은 20세의 나이에 도덕적 완성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13가지 덕목을 정하고 평생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이 체계적인 자기 관리 방식은 청교도주의의 엄격한 도덕적 자기 성찰을 세속화한 것으로, 그의 성공 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1. 절제(Temperance): 배부르도록 먹지 말라.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
2. 과묵(Silence): 자신이나 남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말라.
3. 질서(Order):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정돈하라. 모든 일은 시간을 정해놓고 하라.
4. 결단(Resolution): 해야 할 일은 하기로 결심하라. 결심한 것은 꼭 이행하라.
5. 검소(Frugality):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일 외에는 돈을 쓰지 말라. 낭비하지 말라.
6. 근면(Industry):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언제나 유용한 일을 하라.
7. 진실(Sincerity): 남을 의도적으로 속이려 하지 말라. 순수하고 정당하게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일치하게 하라.
8. 정의(Justice):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응당 돌아갈 이익을 주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
9. 중용(Moderation): 극단을 피하라.
10. 청결(Cleanliness): 몸과 의복, 거처를 불결하게 하지 말라.
11. 침착(Tranquility): 사소한 일이나 불가피한 일에 흔들리지 말라.
12. 순결(Chastity): 건강이나 자손을 위하는 경우 외에는 성관계를 피하라.
13. 겸손(Humility):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으라.
20여 년간 필라델피아에서의 활동을 통해 프랭클린은 성공한 사업가를 넘어 공동체의 발전을 이끄는 선구적인 시민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기관들은 도시의 지적,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그의 저술은 미국인의 가치관을 형성했다.
개인의 성장을 넘어 사회 전체의 개선을 추구했던 그의 실용적인 정신은 이제 자연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확장될 준비를 마쳤다.
제3장: 번개를 길들인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의 과학적 업적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려는 계몽주의적 이상을 구체화한 결과물이었다.
그는 추상적인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규명했으며, 그 지식을 인류에게 유용한 발명품으로 전환시켰다.
이 장에서는 그가 어떻게 번개의 비밀을 풀고 세상을 바꾼 발명품들을 탄생시켰는지 살펴봅니다.
연 실험과 번개의 비밀
1752년, 프랭클린은 번개가 전기 현상이라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대담한 실험을 구상하고 그 방법을 제안했다.
역사에 기록된 상징적인 '연과 열쇠 실험'은 그해 6월, 필라델피아에서 아들 윌리엄과 함께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기록은 후대의 전기 작가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저술에 크게 의존한다.
• 실험 방법: 그는 연 꼭대기에 뾰족한 금속선을 달아 전기를 유도하고, 비에 젖어 전도체 역할을 하는 삼끈을 연줄로 사용했다.
삼끈의 끝에는 금속 열쇠를 묶어 전하가 모이게 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절연체인 마른 실크끈을 잡았다.
• 역사적 의의: 프랭클린은 1752년 10월 19일 자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자신이 직접 실험을 수행했다는 언급 없이 그 방법과 성공을 기술했다.
이 실험을 통해 번개가 거대한 전기 방전 현상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고, 이는 현대 대기물리학과 전기공학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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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을 날려 피뢰침을 발명하다. |
세상을 바꾼 발명품들
프랭클린의 과학적 탐구는 언제나 실용적인 발명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공공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타인의 발명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는 것처럼, 우리 역시 타인에게 봉사할 기회를 기쁘게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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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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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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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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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스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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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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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벽난로의 열이 대부분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비효율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주철로 만들어진 이 스토브는 열을 더 오래 보존하고 방
전체로 고르게 분배하여 연료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가정 난방에
혁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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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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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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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실험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 뾰족한 금속
막대를 설치하여 번개의 전하를 안전하게 땅으로 흘려보내는 장치이다.
이 발명은 건물을 낙뢰로 인한 파괴적인 화재와 재산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표준 기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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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초점 렌즈(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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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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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노안과 근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발명했다. 하나의
렌즈를 위아래로 나누어, 윗부분으로는 먼 곳을, 아랫부분으로는
가까운 곳을 볼 수 있게 설계했다. 이는 여러 개의 안경을 번갈아 써야
하는 불편함을 없앤 혁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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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하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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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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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손가락으로 유리잔 가장자리를 문질러 소리를 내는 원리를
기계화한 악기이다. 크기가 다른 유리그릇들을 축에 꿰어 회전시키며
연주하는 방식으로, 모차르트, 베토벤 등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이 이
신비로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위해 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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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요도 카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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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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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광 결석으로 고통받던 형 존을 위해 발명했다. 당시 사용되던 뻣뻣한 금속 카테터는 환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프랭클린은 유연한 금속 튜브를 만들어 삽입 시
고통을 줄이고 시술의 안전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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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중초점 안경 |
광범위한 과학적 탐구
프랭클린의 과학적 호기심은 전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해양학: 북대서양의 강력한 해류인 멕시코 만류(Gulf Stream)의 존재를 최초로 도식화하고 명명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는 선박의 항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데 기여했다.
• 기상학: 폭풍이 항상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며, 폭풍의 이동 경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다.
• 인구학: 미국의 인구가 약 20년마다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하며, 식량 공급과 인구 성장의 관계를 분석하는 등 현대 인구통계학의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이처럼 벤자민 프랭클린은 체계적인 실험과 예리한 관찰, 그리고 실용적인 적용을 통해 당대 최고의 자연철학자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인류의 삶을 직접적으로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이 국제적인 명성은 그가 곧 맡게 될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이 되어, 정치 무대에서 그의 발언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게 된다.
제4장: 대영제국의 신민에서 독립의 선봉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정치 여정은 영국을 사랑하고 자신을 충실한 대영제국의 신민으로 여겼던 한 남자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건 확고한 혁명가로 변모하는 정치적, 심리적 비극의 드라마다.
제국의 틀 안에서 타협과 조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의 정체성은 영국 정부의 완고함과 억압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 장에서는 그를 독립의 선봉으로 내몬 결정적인 사건들을 추적한다.
런던에서의 외교 활동
1757년,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의회의 대리인으로 런던에 파견되었다.
1765년 영국 의회가 인지세법(Stamp Act)을 통과시키자 그는 강력히 반대했고, 하원 청문회에서 식민지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증언하여 법안 철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북미 식민지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으며, 제국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정점에 달했다.
결별의 서곡, 허치슨 편지 사건
결정적 전환점은 1773년 '허치슨 편지 사건'으로 찾아왔다.
프랭클린은 매사추세츠 총독 토머스 허치슨이 식민지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영국 정부의 강경 조치를 촉구한 비밀 편지들을 입수해 북미로 보냈다.
이 편지들이 공개되자 식민지의 분노는 폭발했고, 영국과 식민지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 사건으로 프랭클린은 영국 추밀원 청문회에 소환되어 '소요의 선동자'로 낙인찍히고 공개적인 모욕과 굴욕을 당했다.
이 경험은 단순한 정치적 좌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지켜온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산산조각 나는 깊은 개인적 단절이었다.
제국 내에서의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혁명가로의 각성
1775년 3월, 10년이 넘는 런던 생활을 청산하고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프랭클린은 더 이상 타협을 모색하는 외교관이 아니었다.
그는 차갑게 단련된 혁명가였다.
귀국과 동시에 그는 제2차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1776년 6월, 그는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등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5인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마침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그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모두 함께 뭉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우리 각자는 따로따로 교수대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일화의 진위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조국 독립을 향한 그의 비장하고 확고한 결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개인적 모욕과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제도적 억압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정치적 각성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한때 제국의 충실한 신민이었던 그는 이제 막 독립을 선언한 신생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짊어질 운명에 놓였다.
그의 다음 무대는 대서양 건너 프랑스가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는 조국의 운명을 건 가장 위험하고도 위대한 외교전을 펼치게 된다.
제5장: 프랑스를 사로잡은 외교관 (1776–1785)
벤자민 프랭클린의 프랑스 외교 임무는 갓 태어난 미국의 독립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당시 70세의 노정객이었던 그는 자신의 국제적인 명성, 깊은 지혜, 그리고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총동원하여 절대 왕정 국가인 프랑스로부터 군사 동맹과 재정 지원을 이끌어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을 맡았다.
이 장에서는 그가 어떻게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미국 독립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는지 분석한다.
위험한 항해
1776년 10월, 프랭클린은 비밀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18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100명이 조금 넘는 승무원을 태운 개조 상선 'USS 리프라이절(Reprisal)'호에 몸을 실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 대한 영국의 공식적인 해상 봉쇄는 없었지만, 대서양은 영국 해군의 위협으로 가득했다.
이는 전함이 아닌 상선으로 적진을 통과하는 위험천만한 항해였다.
항해의 긴박함은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 영국 상선 두 척을 나포하는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그의 임무가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전쟁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파리 사교계의 스타
파리에 도착한 프랭클린은 화려한 유럽 귀족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치밀하게 연출했다.
그는 가발 대신 소박한 담비 털모자를 쓰고, 값비싼 비단 옷 대신 평범한 갈색 옷을 입었다.
이러한 그의 소박한 옷차림과 기교 없는 태도는 프랑스인들에게 '신세계에서 온 소박한 천재'라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이미 전기 실험으로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던 그는 자신의 과학적 명성과 재치, 유머를 활용하여 프랑스 지식인과 귀족, 심지어 왕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그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파리 사교계의 스타였으며, 이 계산된 인기는 그의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프랑스와의 동맹 체결
프랭클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프랑스와의 공식적인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겐 백작을 상대로 끈질긴 외교 협상을 벌였다.
마침내 1777년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는 미국의 승리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프랭클린은 1778년 2월, 마침내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 및 통상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절실히 필요했던 재정 지원, 군수품, 그리고 강력한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국 독립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평화 협상과 전쟁의 종결
프랑스의 참전으로 전세는 미국에 유리하게 기울었고, 마침내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랭클린은 존 애덤스, 존 제이와 함께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평화 협상에 나섰다.
그는 1783년 파리 조약 체결을 이끌어내며 영국의 완전한 독립 승인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프랭클린이 프랑스에서 보낸 8년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외교적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는 한 국가의 운명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생 공화국의 마지막 기틀을 다지고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과업을 앞두고 있었다.
제6장: 건국의 아버지, 미국의 미래를 그리다
프랑스에서의 위대한 임무를 마치고 1785년 고국으로 돌아온 벤자민 프랭클린은 조지 워싱턴 다음가는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았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신생 공화국의 헌법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헌신했으며, 노예제와 같은 국가의 근본적인 도덕적 과제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그의 마지막 공적 활동과 그가 미국에 남긴 영원한 유산을 탐구한다.
펜실베이니아의 지도자
귀국 후, 프랭클린은 1785년부터 1788년까지 3년간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의장(오늘날의 주지사에 해당)으로 봉사하며 자신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지역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고 발전에 기여했다.
헌법 제정 회의의 원로
1787년, 81세의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 제정 회의에 최고령 대표로 참석했다.
비록 건강 문제로 인해 토론에 자주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회의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며 타협을 이끄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회의가 끝난 후 한 시민이 "우리가 어떤 정부를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공화국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요.(A republic, madam, if you can keep it)"
이 말에는 새로운 국가의 미래가 시민들의 덕성과 참여에 달려있다는 그의 깊은 통찰력이 담겨 있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 변화와 폐지 운동
프랭클린의 삶에서 노예제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의 도덕적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다.
• 초기의 모순: 젊은 시절 프랭클린은 직접 노예를 소유했으며, 자신의 신문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노예 판매 및 도망 노예 수배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는 당시 사회의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행동이었다.
• 후기의 각성: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생각은 극적으로 변했다.
그는 노예제를 "인간 본성에 대한 끔찍한 타락(an atrocious debasement of human nature)"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펜실베이니아 노예제 폐지 협회'의 회장이 되어 노예제 폐지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연방 의회에 제출하는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가장 적극적인 노예제 폐지론자로 활동했다.
최후의 나날들과 유산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84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약 2만 명의 시민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이는 당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수많은 발명품과 사회 제도 외에도, 미국 정신의 정수가 담긴 저서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 《자서전 (Autobiography)》: 이 책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고전이 아니다. 이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형을 제시한 기초 문헌이다.
프랭클린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유산을 스스로 기획하고, 자수성가한 인간의 원형을 창조했다.
그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은 하나의 페르소나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내어 수 세기 동안 미국적 정체성을 정의했다.
• 《부유해지는 길 (The Way to Wealth)》: 1758년에 출판된 이 에세이는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 실렸던 근면과 절약에 관한 격언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부의 축적 방법을 넘어, 성실한 노동과 합리적인 소비라는 미덕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번영할 수 있다는 그의 핵심 철학을 담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독립 전쟁의 영웅을 넘어, 미국의 헌법적 토대를 다지고 노예제라는 국가적 과제에 대해 용기 있는 도덕적 목소리를 낸 통합의 지도자였다.
그의 마지막 활동들은 신생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의 삶 전체는 다음 세대가 따라야 할 귀감이 되었다.
이제 그의 다채로운 생애를 종합하며 그가 남긴 영원한 유산의 의미를 되새겨 볼 시간이다.
꺼지지 않는 계몽의 불꽃
벤자민 프랭클린의 삶은 한 개인의 일대기를 넘어,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고 그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시와 같다.
인쇄공 견습생에서 시작하여 당대 최고의 과학자, 존경받는 정치가, 그리고 세계 무대를 누비는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채로운 업적은 어느 한 분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심오하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가 추구했던 이상, 즉 이성과 실용, 그리고 인류애를 자신의 삶을 통해 완벽하게 구현해낸 인물이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남긴 수많은 발명품이나 설립한 기관들에만 있지 않다.
프랭클린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실험의 근간을 이루는 네 개의 핵심 문서, 즉 미국 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파리 조약(1783), 그리고 미국 헌법(1787)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이다.
이는 그의 삶이 미국의 탄생부터 완성까지 모든 결정적 순간에 함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그의 초상은 단순한 화폐 단위를 넘어, 그가 상징하는 가치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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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100달러 지폐 |
과학적 탐구 정신,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시민 정신, 실용주의적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완성해 나가려는 자기계발의 의지. 벤자민 프랭클린이 지핀 계몽의 불꽃은 2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꺼지지 않고, 더 나은 사회와 개인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 글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 자서전, 서신, 의회 기록, 동시대 증언과 현대 평전들을 바탕으로 구성한 서사형 역사 에세이입니다.
출생 연도·직함·조약 연도·기관 설립 시기·저서 제목 등은 현재까지의 주요 연구 성과와 일반적으로 합의된 학설을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다만 ‘사일런스 두굿’ 편지의 반향, 런던 추밀원 청문회에서의 심리적 충격, “함께 매달리느냐 따로 매달리느냐”, “공화국입니다, 지킬 수만 있다면요” 같은 발언은 후대 회고와 전승에 기대는 부분이 있어, 실제 기록이 아닌 “그렇게 전해지는 일화”의 성격을 갖습니다.
또한 제국에 대한 환멸, 노예제에 대한 인식 변화 등 내면의 동기는 사료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추론과 해석을 곁들여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확한 정치·외교사나 사상사 연구를 위해서는 개별 1차 자료와 전문 연구서를 함께 참조하시길 권하며, 이 글은 프랭클린의 복합적인 삶과 시대적 의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문·해설용 장편 에세이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This essay follows Benjamin Franklin from a poor candlemaker’s son in puritan Boston to a self-made printer, writer and civic leader in Philadelphia.
It traces how he built a media empire, founded libraries, fire companies and schools, and framed a secular code of 13 virtues.
As a scientist he tamed lightning, invented the lightning rod and stove, and mapped the Gulf Stream.
Politically he moved from loyal Briton to chief architect of American independence, helping draft the Declaration and securing French alliance and the Treaty of Paris.
In old age he shaped the Constitution, turned against slavery, and left a legacy that defined the American Dream and Enlightenment ide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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