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을 무찌른 소년 왕,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다: 루이 3세 전기
영웅과 희극 사이, 짧고 굵었던 삶
역사의 무대 위에서 이토록 짧은 순간에 영웅과 희극의 주인공을 오간 왕이 또 있을까?
서프랑크의 소년 왕 루이 3세의 삶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극적인 대답이다.
불과 16세의 나이에 왕국을 유린하던 바이킹 대군을 격파하며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그 영광의 정점에서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역사상 가장 황당한 사고로 기록될 죽음을 맞이한 인물.
그의 삶은 출생의 비밀과 정통성 논란이라는 불안한 서막으로 시작되었고, 동생과 왕국을 나누어 통치하며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용맹한 군주의 모습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바이킹을 무찌른 위대한 승리의 서사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어이없는 희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 글은 영웅과 희극의 경계에 서 있었던 비운의 소년 왕, 루이 3세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따라가 본다.
1. 불안한 출발: 정통성 논란에 휩싸인 왕자
루이 3세의 통치는 시작부터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었다.
그의 혈통을 둘러싼 문제는 그가 왕좌에 오르기 전부터 평생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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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도비쿠스 3세 |
1. 비밀 결혼과 불투명한 혈통
루이 3세의 아버지, '말더듬이왕' 루이 2세는 부르고뉴의 앙스가르데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하지만 절대 권력자였던 할아버지 '대머리왕' 카롤루스 2세는 앙스가르데 가문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이 결혼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논쟁)
결국 카롤루스 2세는 아들을 강제로 이혼시켰고, 이로 인해 루이 3세와 그의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는 어린 시절 정식 왕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두 왕자는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멍에처럼 따라다니던 '사생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2. 귀족들의 논쟁: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
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논쟁이 불붙었다.
아버지 루이 2세는 죽기 전 왕국의 분열을 염려하여 장남인 루이 3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정했으나, 귀족 사회는 선왕의 유언과 프랑크의 오랜 전통 사이에서 둘로 나뉘었다.
일부는 루이 3세를 단독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중심에는 훗날 스스로 왕이 되어 형제에게 반기를 들게 될 프로방스의 보소 5세가 있었다.
다른 일부는 프랑크의 전통에 따라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와 왕국을 나누어 공동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맞섰다. (논쟁)
한 귀족이 외쳤다.
"왕국이 또다시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왕의 뜻에 따라 연장자인 루도비쿠스님을 유일한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자 다른 편에서 반박했다.
"두 분 모두 선왕의 아들이십니다. 형제에게 왕국을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프랑크의 오랜 전통이오!"
이처럼 그의 통치는 시작부터 위태로운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2. 나뉜 왕좌 위의 형제
기나긴 논쟁 끝에, 두 형제는 왕국을 나누어 함께 다스리는 길을 택했다.
1. 아미앵 협약: 왕국의 분할
880년, 루이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미앵에서 만나 서프랑크 왕국을 공식적으로 분할했다.
이 협약을 통해 각자의 통치 영역이 명확히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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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Ru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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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통치 영토 (Terri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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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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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네우스트리아, 일드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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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마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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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아키텐, 부르고뉴, 프로방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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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도비쿠스 3세의 영지 |
2. 형제의 우애
권력을 두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벌였던 다른 카롤루스 가문 왕족들과 달리, 루이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의 우애는 매우 돈독했다.
당시 제작된 주화나 초상화에서 두 사람이 함께 묘사된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들이 내분보다는 왕국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에 함께 맞서는 데 집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두 소년 왕 앞에는 왕국의 안팎에서 거센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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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와 카를로마누스 형제 |
3. 소년 왕의 위대한 승리: 사우코 전투
루이 3세의 짧은 통치 기간은 위협으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그의 군사적 재능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 시기이기도 했다.
1. 쉴 틈 없는 위협
소년 왕 루이 3세는 즉위 직후부터 두 가지 큰 위협에 직면했다.
• 보소 5세의 반란: 프로방스에서 스스로 왕을 칭한 보소 5세가 나타나 왕국의 남부를 위협했다.
• 바이킹의 침공: 북쪽 해안에서는 바이킹이 끊임없이 상륙하여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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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킹족을 무찌르는 전투 장면 |
2. 사우코 전투의 영웅 (881년 8월 3일)
881년, 바이킹 대군이 서프랑크 깊숙이 침공해오자 16세의 루이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는 사우코 앙 비우(Saucourt-en-Vimeu) 전투에서 노련한 바이킹 침략자들을 상대로 맹렬한 기습을 감행하여, 왕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들을 무참히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약 9,000명에 달하는 바이킹을 사살하며 왕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승)
이 위대한 승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고, 그의 영웅적 행위는 고대 독일어 서사시인 '루트비히의 노래(Ludwigslied)'에서 "경건하고 용맹한 왕"으로 칭송되었다.
그의 명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백 년이 지나도록 회자되어, 훗날 프랑스 무훈시 '고르몽과 이장바르(Gormond et Isembart)'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이 위대한 승리로 영웅의 반열에 오른 젊은 왕에게 누구도 예상치 못한 허무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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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코 앙 비우 전투를 칭송한 독일어로 된 책자 (9세기 후반경) |
4.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죽음
찬란했던 영웅 서사시는 한순간의 사고로 비극적 희극이 되었다.
1. 운명의 그날 (882년 8월 5일)
사우코 전투의 승리로부터 정확히 1년 2일이 지난 어느 화창한 날, 루이 3세는 생드니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그때 그는 평소 사모하던 게르몽 후작의 딸을 발견하고는 장난기 어린 마음에 말을 몰아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2. 비극적 희극
소녀가 놀라 아버지의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루이 3세는 웃으며 그녀를 따라 성문으로 돌진했다.
바로 그 순간, 비극이 일어났다.
그는 낮게 설치된 성문의 상인방(lintel)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엄청난 충격으로 그는 말에서 떨어졌고, 두개골이 골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진 주인을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이 황당하고 비극적인 사고로 바이킹을 물리친 영웅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17세 무렵이었으나, 출생 기록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19세로 보기도 한다.
그의 죽음은 역사상 가장 기이한 사망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극적인 이야기이지만, 동시대 연대기 작가인 하리울프는 그가 사우코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기록하여, 그의 죽음에 또 다른 설명을 덧붙인다.
한순간의 사고로 영웅은 사라졌고, 그의 죽음은 서프랑크 왕국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5. 짧은 통치가 남긴 것
루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서프랑크 왕국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 남겨진 왕국
루이 3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던 북부 영토는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에게 통합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바이킹과의 전쟁에 큰 타격이었으며, 유능한 군주를 잃은 카롤루스 왕조의 쇠퇴를 가속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과 2년 뒤인 884년,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마저 사냥 사고로 요절하면서 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이는 카롤루스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역사의 평가: 비운의 영웅
루이 3세는 오늘날 다음과 같이 평가받는다.
1. 유능한 군주: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등 유능하고 활기찬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2. 비극적 요절: 한창 명성을 떨치던 시기에 맞이한 어이없는 죽음으로 인해, 그가 가진 잠재력을 모두 펼쳐 보이지 못했다.
3. 왕조 쇠퇴의 상징: 그의 죽음과 그로 인한 혼란은 서프랑크 카롤루스 왕조의 권위가 약해지고, 결국 위그 카페의 카페 왕조로 대체되는 역사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루이 3세의 삶은 9세기 유럽의 혼돈 속에서 권력과 유산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 남았다.
그는 왕국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바이킹 대군을 꺾었지만, 정작 자신은 한순간의 청년다운 무모함에 쓰러졌다.
영웅의 위업과 희극적 죽음이라는 기이한 공존, 이것이 바로 역사에 기록된 소년 왕 루이 3세의 짧고도 강렬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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